30대 피의 여성 검거 “기억 안 난다” 진술…청와대보다 탁 트인 용산 관저 ‘경호 구멍’ 지적
#대통령 관저를 내비게이션으로…
2월 5일 오전 2시 30분쯤. 윤석열 대통령이 머무르는 서울 용산구 한남동 관저에서 불과 20m 떨어진 지점에 일반 택시 한 대가 도착했다. 일대를 경호하는 서울경찰청 소속 202경비단에 가로막힌 택시기사는 "호출 받은 주소로 내비게이션을 따라 왔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정작 호출자에 전화를 시도해보니 '없는 번호'라며 연결이 되질 않았다. 결국 택시기사만 머쓱한 상태로 차를 돌려야 했다.
이런 상황이 같은 날 오전 4시 20분쯤까지 약 2시간 동안 반복됐다. 이때 대통령 관저 앞으로 모인 택시는 18대로 전부 '호출 받고 왔을 뿐이었다'고 입을 모았다. 매우 수상한 이 사건은 경찰청과 서울경찰청 및 국가수사본부까지 보고돼 수사로 전환했다. 이에 용산경찰서가 택시기사들에 대한 업무방해 혐의 적용을 검토하며 직접 호출자를 찾아 나섰고, 202경비단은 택시 출입을 금지하는 등 주변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용산경찰서는 사건 발생 하루 만에 용의자 A 씨(여·32)를 검거했다. 애초 없는 번호로 표시된 탓에 추적이 어려울 것으로 예상됐으나, 택시 호출 앱과 통신사 등의 협조를 통해 비교적 수월하게 피의자를 특정할 수 있었다. 붙잡힌 A 씨는 경찰에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했다. 경찰은 A 씨가 술에 취한 상태로 택시를 호출한 것으로 추정하지만 조사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경찰은 A 씨가 쓴 앱의 관계자들한테도 진술을 받고 있다. A 씨 번호가 '없는 번호'로 안내된 원인 등을 알아보기 위해서다. 현재로서는 '안심번호' 때문이라는 분석에 힘이 실리지만 이 역시 더 따져봐야 한다. 안심번호는 호출 때마다 다른 번호가 부여되는데, 사건 당시 일부 택시기사들에는 호출자 번호가 동일하게 표시됐다고 한다. 물론 앱에 기술적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사건 당시 A 씨는 'OO전문학교'로 출발지를 입력했다고 알려졌다. 대통령 관저 인근 관서가 2000년대 초반까지 사용했던 이름으로 지금은 없는 곳이다. A 씨가 이곳을 어떻게 알고 입력했는지가 미궁이다. 공교롭게도 해당 앱에서는 이 관서의 현재 이름을 입력하면 내비게이션이 멀찍이 큰길까지만 안내하지만, 옛 OO전문학교로 검색하면 202경비단 등이 있는 대통령 관저 앞까지 안내한다고 한다.
용의자가 사용한 앱의 운영사 관계자는 "허위번호 가입은 절대 불가능하고, 저희도 구체적인 경위를 계속 파악하고 있다"며 "출발지를 '대통령' '관저' 등으로 입력한 데이터가 없어 인근에 진입한 택시들의 자료를 전부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또 "아직은 가명화 시스템에 따른 일회성 안심번호가 부여돼 없는 번호로 표출된 것으로 판단 중"이라며 "경찰의 도움 요청에 계속 협조할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이번 사건 직후 각 택시 호출 업체들도 분주해졌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자신들 앱에서 가짜호출이 이뤄졌는지 등을 알아보면서다. 특히 사건 당일 몇몇 택시는 또 다른 업체 로고를 부착한 채 운행했다. 해당 업체는 긴장 상태로 자체 조사를 벌였는데, 이날 새벽 대통령 관저 인근으로 호출된 택시기사가 없다고 나와 간신히 안도했다. 이 업체 관계자는 "기사님이 여러 호출 업체와 가맹계약을 맺은 듯하다"고 설명했다.
#"대진연도 난입 시도…" 취약해진 대통령 경호
이번 사건은 단순 만취 해프닝으로 끝날 가능성도 있다. 그러나 인적이 드문 시간대에 택시들이 대통령이 머무르는 곳까지 다다른 상황 자체는 가볍게 넘기기 어렵다는 지적이 크다. 일각에선 당시 모여든 택시가 비속어 발음을 연상하게 하는 '18대'였다는 점에서 불안감을 내비치기도 했다. 최근 여야 정치인이 습격당한 사건이 잇따른 탓에 대통령마저 정치적 반감에 따른 공격 대상으로 지목된 게 아니냐는 우려였다.
내비게이션을 따라 대통령 관저 20m 앞까지 택시가 몰린 이 황당한 사건은 대통령 경호 시스템의 허점을 드러냈다는 비판으로 이어진다. 대통령실의 한 관계자는 일요신문에 "대통령 관저 주소지가 외부에 공개돼 있다 보니 한번쯤 불거질 수는 있는 문제로 보인다"면서도 "최근 '한국대학생진보연합'의 난입 시도도 있었는데, 경호 체계는 어떤 형태로든 보완하는 게 낫다고 본다"고 말했다.
실제 대통령의 거처가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옮겨진 뒤 경호 체계가 다소 취약해졌다는 인식이 팽배하다. 경찰 등에 따르면 청와대 시절에는 대통령 근접 경호부터 매우 견고했다. 청와대에서는 경비·방호 인력이 집무실 인근을 경호하고, 경찰 101단이 그 외곽을 수호하며, 202경비단은 더 멀리서 외곽을 또 지켰다. 아울러 전·의경까지 202경비단에 추가 지원에 나서며 3∼4중의 방어벽이 구축됐다.
용산 대통령실 이전 후에는 대통령과 방어벽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워졌다. 경찰 101경비단 등이 경비·방호와 함께 집무실 내·외곽을 경비하고, 경찰 202경비단은 관저 등 외곽을 지킨다. 대통령 집무실과 관저의 거리가 약 3km 떨어져 있는 탓에, 청와대 시절 한 축을 이뤘던 101경비단과 202경비단이 제각각 별도의 지역을 경호하게 된 점도 커다란 차이다.
올 1월 6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소속 약 20명이 보안 검색을 뚫고 대통령실 건물 바로 앞까지 진출 가능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란 분석이다. 집회·시위 신고 여부를 놓고 대진연과 경찰이 옥신각신하다 결국 현행범 체포로 상황은 마무리됐으나, 대진연이 훨씬 교묘하거나 거칠게 움직였다면 매우 위험한 상황이 될 수도 있었다. 경찰은 이 사건으로 계기로도 경호를 한층 강화한 상태다.
현직 서울경찰청 관할 한 경비과장은 "청와대는 약 30년에 걸쳐 경호 체계를 업데이트해 최적의 시스템을 구축했다"며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기면서 101경비단의 총원 및 낮·밤 경비 경력 증원도 검토됐다던데 현실화는 의문이고, 관저를 지키는 202경비단 등도 주변 민가가 청와대 때보다 많아 제약이 큰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101·202경비단 관계자는 "보안 상 말해줄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 했다.
청와대 때완 다르다…관저·집무실·영빈관 경비력 분산 심각
과거 오랜 기간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한 B 씨도 이번 사건을 눈여겨봤다. 그는 최근 한국대학생진보연합 진입 시도부터 택시 집단 출몰까지 바라보며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쓴소리를 남겼다.
B 씨는 대통령 집무실 등을 용산으로 옮긴 순간 예견된 상황이라고 바라봤다. 그에 따르면 청와대 경호 시스템은 노태우 정부가 구축한 후 소위 '호랑이 계획'으로 불리며 1·2·3단계에 걸쳐 수년간 체계화됐다.
대통령에 대한 접근을 까다롭도록 한 설계는 기초 중 기초였다. 이에 따라 청와대는 경복궁 옆 정부서울청사 창성동 별관 일대부터 202경비단을 배치했고, 영빈관 담장 일대는 경찰 22특경대와 청와대 경호대가 공동경비구역으로 함께 지켰다.
청와대 내부도 101경비단과 사법경호원들이 철통 방어하는 한편, 뒤편 인왕산도 군을 통해 방어망을 구축해뒀다. 특히 청와대는 A, B, C구역으로 나뉘었는데 대통령의 이동 동선에 돌출형 바리케이드 추가 설치 등 경호 체계에도 미묘한 변화를 줬다고 한다.
이 밖에도 소위 '적선타'로 불리는 국립고궁박물관 일대부터 청와대 앞 분수대와 정문에 이르기까지 22, 31, 33초소 등을 경찰 경비단 및 경호대 사이에 촘촘하게 배치해 검문을 가능토록 하기도 했다.
용산의 대통령실과 관저 등은 지리적으로 탁 트인 곳에 위치한 데다 주변에 민간시설도 훨씬 많은 편이라 이 같은 시스템 적용이 불가능하다. 특히 대통령실과 관저뿐 아니라 영빈관마저 매우 떨어진 곳에 위치한 탓에 경비력 분산이 불가피하다.
B 씨는 "청와대는 테러범 등의 접근을 막는 '디펜스형' 경호가 핵심인데, 국방부 등이 써오던 용산 대통령실은 누군가의 공격에 공격으로 맞서는 '오펜스형' 경호일 수밖에 없다"며 "대대적인 시스템 개편이 없으면 유사 사례가 반복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