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답하지마 1997! 한보·기아 트라우마가…
▲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가운데)이 경북 상주의 폴리실리콘 공장을 둘러보고 있다. 연합뉴스 |
증권가에서 중견그룹 위기설은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제기되기 시작했다. 주로 글로벌 금융위기 전 공격적인 인수·합병(M&A)에 나선 그룹들, 업황 부진에 시달리고 있는 건설, 조선, 해운업종 영위 그룹들이 주 대상이다. 이 과정에서 몇몇 중견 건설사와 해운회사들이 개별기업단위로 법정관리나 워크아웃에 들어갔지만 그룹단위로 심각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 곳은 웅진그룹이 처음이다. 웅진홀딩스는 웅진그룹의 지주사로서 사실상 그룹의 실체다.
익명의 증권사 크레딧(기업신용분석) 애널리스트는 “웅진그룹이 손을 든 이유는 결국 프로젝트파이낸싱(PF)의 부담에 짓눌린 극동건설, 그리고 심각한 업황 부진에 빠진 태양광발전 관련 사업에 있다”며 “문제는 비슷한 문제에 얽힌 다른 그룹들도 많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 |
이처럼 중견그룹 관련 사업의 재미가 쏠쏠하다 보니 증권사들 가운데는 자기자본을 투자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번 웅진그룹의 경우에도 발행한 채권 가운데 시장에서 소화되지 않은 부분을 주간사인 증권사가 자기자본으로 떠안은 물량이 적지 않다. 무보증 회사채의 경우 회사가 법정관리에 들어갈 경우 상당부분 손실이 불가피해진다.
웅진홀딩스가 올 들어 발행한 회사채 물량만 총 2600억 원이다. 이 가운데 지난 1월 20일 발행된 회사채 1100억 원은 한국투자증권이 400억 원, KB투자증권이 200억 원, 우리투자증권과 IBK투자증권, 삼성증권, 현대증권, 대우증권이 각각 100억 원씩 인수했다. 이후 4월 6일 발행 회사채 700억 원은 한국투자증권과 대우증권이 각각 600억 원과 100억 원을 인수했고, 6월 26일 발행 회사채 800억 원 중 한국투자증권이 절반을 인수했다. 웅진홀딩스는 또 지난 7월과 8월 중에 CP(기업어음)를 약 200억 원 발행했고, 이 물량 중 일부가 개인고객에게 판매된 것으로 알려졌다.
증권사로서는 인수한 채권을 고객에게 되판 경우에도 문제다. 웅진홀딩스의 경우 우량채권으로 인정받는 신용도 ‘A-’등급(국내 신용평가사 기준)인데도 부도가 난 만큼 고객 신뢰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을 수 있기 때문.
국내 신용평가사들은 9월 27일 계열사인 극동건설이 부도를 맞고 지주사인 웅진홀딩스가 기업회생 절차를 신청한 이후에야 웅진그룹에 대한 신용등급을 내렸다. 한국기업평가는 웅진홀딩스 신용등급을 기존 ‘A-’에서 ‘D’로 강등했다. D는 채무불이행(디폴트) 상태를 의미한다. 또 계열사인 웅진코웨이(A+)와 웅진케미칼(BBB+), 웅진씽크빅(A)에 대해서는 신용등급 하향 검토 대상에 올렸다. 나이스신용평가도 웅진홀딩스의 회사채 신용등급을 기존 ‘BBB+’에서 ‘D’로 강등했다.
물론 뒷북 평가를 내린 신용평가사만 탓할 일은 아니다. 고객에게 투자 조언을 해줘야 할 증권사들도 위험 감지를 사전에 못했던 것은 마찬가지다.
웅진그룹이 지난달 MBK파트너스와 1조 2000억 원에 웅진코웨이를 매각하는 계약을 맺자 증권사들은 앞 다퉈 웅진코웨이에 대해 낙관적 전망을 내놓았다. 현대증권은 웅진코웨이에 대해 “재평가 계기가 마련됐다”며 주가 상승여력이 높아졌다고 평가했다. 뒤이어 대신증권도 ‘도약하는 일만 남았다’는 제목의 보고서를 냈고, IBK투자증권 역시 “MBK파트너스 인수 이후 배당성향에 대한 안정적 기대심리는 주가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증권사의 회사채 관련 사업에 대한 위기감도 높다. 익명의 증권사 회사채 담당 관계자는 “국고채 금리가 사상최저 수준으로 떨어지면서 채권투자자에게 회사채는 새로운 수익원으로 각광받기 시작했는데, 주요 투자대상인 A등급 채권에서 문제가 발생했다”면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 LIG건설 등에 대한 신용평가사들의 뒷북 평가가 도마에 올랐는데, 또다시 같은 논란이 제기되면서 증권사들의 채권판매에 타격이 미칠 수 있다”고 우려했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웅진그룹으로 문제가 끝날 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 적잖은 중견그룹들에 대한 유동성 위기론이 최근 부쩍 힘을 받고 있다. A등급인 웅진이 손을 들면서 중견그룹들의 채권발행이 더욱 힘들어지고, 이는 다시 이들의 유동성위기를 더욱 부채질하는 악순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기관투자자들은 신용등급 ‘A’ 이상의 우량 건설사 회사채만 주로 편입하고 있다. 신용등급이 ‘트리플B(BBB)’ 이하인 건설사는 회사채 발행을 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이스신용평가는 한국토지주택공사 등 공기업을 포함해 47개 건설사에 대한 신용등급을 매겼는데 이 중 29.7%인 14개 건설사 신용등급이 ‘BBB’ 이하였다. 한국신용평가가 등급을 매긴 34개 건설사 중에는 10곳의 등급이 ‘BBB+’ 이하였다.
증권사의 한 IB담당자는 “웅진그룹 사태가 터진 후 중견그룹들의 회사채 발행이 급감하고 있다”면서 “금융권 대출이 막힌 상황에서 시장에서의 조달도 이뤄지지 않는다면 자금난이 더욱 심해지며 도미노 부도가 나타나고 그 피해가 증권사와 투자자에게도 이어질 개연성이 높아지고 있다”고 걱정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