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보다 정식, 국내 지도자 비중” 전력강화위원 의견 많아…홍명보 등 K리그 감독 거론에 소속팀 팬 반발
#가이드라인 또는 내정설
2023 아시안컵 종료 이후 클린스만 감독은 수습도 없이 다시 미국으로 떠났다. 곧 그의 거취는 경질로 가닥이 잡혔다.
대한축구협회장이 수일째 모습을 드러내지 않던 시점, 협회에서 진행된 회의 중 차기 감독에 대한 단서가 나왔다. 일부 회의 내용이 공개됐고 이석재 부회장의 입에서 "정해성 위원장 같은 분들이 전력강화 위원장으로 가고, 새로운 감독을 한국 지도자로 하면 문제 없을 것"이라는 발언이 나온 것이다.
쉽게 넘어갈 수 없는 내용이었다. 마이클 뮐러 위원장이 전력강화위원장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고 클린스만 감독의 경질 역시 결정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이에 협회 고위층에서 향후 대표팀의 방향에 대해 이미 가이드라인을 내린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왔다.
이어진 협회의 움직임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정해성 위원장이 새로운 전력강화위원장에 임명됐다. 고정운 김포 FC 감독, 박성배 숭실대 감독, 박주호 해설위원 등 새로운 10명의 전력강화위원도 정해졌다.
그러자 부정적 반응이 흘러나왔다. 2022 카타르 월드컵 직후 2023 아시안컵을 치르기까지 축구협회와 대표팀은 철저한 실패를 경험했다. 혁신이 필요한 시점이지만 협회는 전력강화위원장으로 '내부 인사'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정 위원장은 앞서 2023년 1월 대회분과위원장직을 맡으며 협회에 입성했다. 이후 협회는 축구인 100인 사면 논란에 휩싸여 부회장 등 이사진을 대거 교체했으나 정 위원장은 이석재 부회장과 함께 유임된 7인 중 한 명이었다.
10명의 위원 면면을 두고도 반발이 이어졌다. 전력강화위원회는 감독 선임 외에도 대표팀 운영에 대한 조언을 한다. 선수 선발을 추천하고 상대팀에 대한 정보, 전력 분석 등도 겸한다. 하지만 이번 위원회는 10명 중 5명이 프로, 실업, 아마추어 무대에서 감독직을 맡고 있다. 능력에는 의심이 따르지 않지만 겸직으로 위원회 활동에 집중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지난 20일 위원회 구성이 발표된 직후 이어진 21일 첫 번째 회의부터 전력강화위원 2명이 불참했다.
본격적인 새 감독 선임 절차인 전력강화위원회 회의 이전부터 축구계에서는 여러 인물이 언급됐다. '익명의 협회 관계자'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김기동, 김학범, 신태용, 최용수, 홍명보, 황선홍 등 각자 후보를 나열했다. 전력강화위원회조차 꾸려지지 않았음에도 "한국 지도자로 하면 문제없을 것"이라던 임원의 발언이 머릿속에 스칠 수밖에 없었다. 현직 감독들이 후보로 오르내리는 것을 두고 ‘이미 내정된 것 아니냐’는 팬들의 반발도 이어졌다. 특히 김기동·김학범·홍명보 감독의 경우 소속팀의 리그 개막을 눈앞에 두고 있는 시점이다.
#'두루뭉술'한 선임 기준
전력강회위원회의 첫 회의 이후 정 위원장은 취임 일성과 함께 회의 결과를 발표했다. 향후 감독 선임에 대한 기준이 공개되기도 했다. 그는 회의 중에 논의된 감독 요건 여덟 가지를 공개했다. △전술적 역량 △육성 △성과 △대회 경험 △협회, 연령별 대표팀과 소통 능력 △리더십 △스태프 구성 능력 등이 나열됐다.
이상윤 해설위원은 이 같은 기준에 대해 "조금은 구체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국가대표 감독 후보 리스트에 오를 만한 인물이라면 누구든 어느 정도 전술 역량이나 성과, 대회 경험은 갖추지 않나. 어떤 요소로 걸러내는 작업을 할지 모르겠다"고 짚었다. 앞서 파울루 벤투 감독 선임 당시 '주도하는 축구'를 목표로 삼고 이를 구현할 수 있는 지도자를 선택했던 과정과 사뭇 다른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 '방향성'이 없다는 지적이다.
국내파 지도자로 후보군이 좁혀지는 듯한 상황에 대해 정 위원장은 "국내와 해외 모두 다 열어놓고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에서 우려하는 현직 K리그 감독들에 대해서도 "위원들과 함께 그 부분도 열어놓고 상의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대표팀은 오는 3월 21일과 26일 태국과 2026 북중미 월드컵 아시아지역 2차예선 2연전을 치른다. 감독 선임, 코칭스태프 구성, 선수 선발 등의 작업에 시간이 촉박하다. 정 위원장은 "기간적으로 봤을 때 외국인 감독에게도 열려 있지만 위원회에서 '국내 감독에 비중을 둬야 하지 않나' 그런 의견이 많았다"고 했다.
또 전력강화위원회는 단기적으로 임시 감독을 내세운 이후 천천히 감독 선임 작업을 하는 것보다 빠르게 정식 감독을 뽑는 것으로 가닥을 잡은 듯했다. 임시 감독에 대한 의견도 있었으나 3월부터 정식 감독 체제를 꾸려야 단단해진다는 주장이 다수인 것으로 전해졌다.
#새 감독 후보는
일각에서는 3월을 넘어 싱가포르와 중국을 상대할 6월까지도 임시 감독 체제를 이어간 후 정식 감독을 선임해도 늦지 않다는 의견이 나온다. 6월 이후로는 유럽의 주요 프로리그 일정이 마무리된다. 또 다른 굵직한 대회인 유로 2024, 2024 파리 올림픽 등도 끝난다면 대표팀으로선 선택의 폭이 넓어진다.
공석이 생긴 한국 대표팀의 사령탑에 관심을 보이는 해외 지도자들도 속속 늘어나고 있다. 스티브 브루스(잉글랜드), 필립 코쿠(네덜란드), 세뇰 귀네슈(터키) 등 다양한 유형의 지도자들이 접근하고 있다는 소식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 월드컵에서 사우디 대표팀을 이끌어 아시아 국가대표 감독 경력을 갖고 있는 에르베 르나르(프랑스)에도 연결되고 있다. 르나르 감독의 경우 현재 프랑스 여자축구 국가대표팀을 맡고 있기에 그에게 지휘봉을 맡긴다면 파리 올림픽 이후부터 가능하다. 이처럼 6월까지 임시 체제를 가동한다면 '새 직장'을 찾는 감독들은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대표팀은 이미 임시 감독 체제를 겪은 바 있다. 2001년 거스 히딩크(네덜란드) 감독 부임 전후로 박항서 감독과 김호곤 감독이 1~2경기 대표팀을 이끌었다. 2014 브라질 월드컵 이후에는 감독 선임 작업이 늦어져 당시 울리 슈틸리케 신임 감독이 관중석에서 경기를 지켜봤고 벤치에는 신태용 감독이 앉았다.
세계적으로도 드문 사례는 아니다. 독일은 2023년 9월 친선경기에서 일본을 상대로 1-4 충격패를 당한 이후 한지 플릭 감독과 작별하고 율리안 나겔스만 감독 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생긴 사령탑 공백을 루디 푈러 국가대표 단장이 메웠다. 독일의 레전드 선수 출신으로 지도자로도 활약, 독일 국가대표 지휘봉까지 잡았던 그는 2005년 이후 행정가 업무에 집중해 왔으나 자국 대표팀의 '비상상황'에 기꺼이 감독대행 역할을 맡았다. 앞서 일본에 패했던 독일은 대행 체제에서 프랑스에 2-1 승리를 거뒀다.
축구팬들이 국내 지도자 선임에 불편한 기색을 드러내는 이유는 저마다 대표팀 지휘봉을 잡기가 여의치 않은 탓이다. 2007년 축구협회는 부산 아이파크 감독으로 취임한 지 2주밖에 되지 않은 박성화 감독을 올림픽대표 감독으로 선임한 바 있다. 2012시즌을 앞두고선 전북 현대가 최강희 감독을 국가대표팀에 내주기도 했다. 갑작스레 선장을 잃은 부산과 전북은 각각 어려운 시즌을 치렀다.
김학범·김기동·홍명보 감독 등 현역 K리그 사령탑이 거론되는 것은 특히 조심스러운 상황이다. 이들은 한입으로 '제의를 받지 않았으며 현재 팀에 집중하겠다'는 뜻을 내비치고 있다. 또 다른 후보 중 하나인 황선홍 감독 역시 부담스럽기는 마찬가지다. U-23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그는 오는 4월 중순 U-23 아시안컵을 앞두고 있다. 이는 올림픽 예선을 겸하는 대회다. 대표팀은 일본, 아랍에미리트, 중국과 한 조에 편성돼 쉽지 않은 여정을 예고하고 있다.
이상윤 해설위원은 "협회가 현직 프로 감독을 선택하는 것에는 부담이 있을 것"이라면서 "그래도 쉬고 있는 감독 중에서 선택하기에는 폭이 좁다. 결국 적정선에서 국내 감독을 선택할 것이라고 본다"고 전망했다. 새 전력강화위원회 2차 회의는 24일 개최된다. 후보 리스트를 추리는 등의 작업이 이어질 예정이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