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료현안협의체 ‘의대 정원’ 논의 전무하다 10월 돌연 추진…의협, 회의 도중 퇴장 등 불성실한 태도 일관
#정부의 일방 추진
"대화를 제안한다. 대한전공의협의회 대표와 각 수련 병원 대표는 물론 전공의 누구라도 참여가 가능하다"(2024년 2월 28일 박민수 보건복지부 2차관).
"국민 불편과 불안을 조속히 해결하려면 전공의를 포함한 의사들과 조건 없이 대화에 나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2024년 3월 3일 김택우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장).
의대 증원 여부로 극한의 갈등을 벌이는 정부와 의료계가 같은 말을 한 때도 있었다. 서로 물리력을 동원하는 대신 '대화'로 해결하자고 꾸준히 제안해왔다. 하지만 앞으로도 양측의 대화는 시작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는 게 현실이다. 오히려 잘못을 서로에게 떠넘긴다.
대한의사협회 비상대책위원회(의협 비대위)가 정부의 독단적인 정책 추진을 비판하자 대통령실은 '소통은 의협이 거부했다'며 직접 반박에 나섰다. 대통령실은 "정부는 의협과 공식소통 채널을 구성해 28차례 논의를 진행했다"면서 "2024년 1월 15일 의협에 공문을 보내 의대 정원 증원 규모에 대한 의견을 요청했으나 의협이 끝까지 답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일요신문 취재를 종합하면 이 같은 양쪽의 입장은 모두 옳지만 모두 틀렸다.
우선 정부가 말한 의협과의 소통채널은 '의료현안협의체'로 2023년 1월 발족한 기구다. '정부 대표' 보건복지부와 '의료계 대표' 의협이 2024년 2월까지 1년 넘게 소통해왔다. 해당 협의체는 '의학교육 및 전공의 수련체계의 발전 방안' 등을 마련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갈등은 협의체가 반환점을 돌 때쯤 싹텄다. 2023년 9월 21일 14차 회의가 진행되기까지 복지부는 의협 측에 '의대 정원'은 거론조차 않은 상황이었다. 양측은 주로 지역·필수의료 문제 해결을 위한 여건 개선 등의 얘기를 이어갔는데, 복지부가 10월 26일 15차 회의 직전에 돌연 '의사인력 확대 추진안'을 내놓았다.
당시 복지부는 구체적인 증원 규모까지는 제시하지 않았다. 다만 △여력이 있는 대학은 2025학년도부터 우선 증원을 고려하고 △증원 수요는 있으나 교육 여건이 미흡한 대학은 투자계획 이행 여부 확인 후 2026학년도 이후 단계적으로 늘려간다는 구상이었다.
복지부가 이같이 나선 데에는 또 다른 소통기구인 '이용자 중심 의료혁신협의체'의 영향도 일부 반영됐다. 이곳에서는 의사 증원이 계속 논의돼 왔다.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전국보건의료산업노동조합, 한국환자단체연합회 등이 참여한 곳으로, 문재인 정부 시기인 2020년 10월 발족해 현 정부 임기 1년째이던 2023년 5월까지 가동한 곳이다.
결국 정부가 '의료현안협의체'와 '의료혁신협의체' 투 트랙으로 협의를 진행하면서도, 의료계 반발이 불 보듯 빤한 의사 증원은 이용자 단체하고만 논의했을 뿐 의협은 그 대상에서 제외해온 것이다. 그동안 의협이 "의사 증원 관련 일절 논의가 없다가 갑자기 공문을 보내 증원규모 의견을 요청한 정부 행태가 황당하다"고 비판해온 이유다.
#의협의 무책임
여기까지만 보면 정부의 일방적인 추진이 두드러지지만 의협의 무책임한 태도도 비판을 피하기는 어렵다. 복지부가 의사 증원안을 내놓은 10월 26일 이후 의협은 시종 불성실한 행태로 일관했다.
11월 15일 17차 회의에서 의협은 '과학적 데이터에 입각한 의사 증원 논의'를 요구했다. 이에 복지부는 11월 23일 18차 회의에서 의대 정원 수요조사를 실시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의협은 '과학적 근거에 기반을 두지 않았다'며 회의 도중 일제히 퇴장했다. 당시 의협에서는 양동호 광주광역시의사회 대의원회 의장, 김종구 전라북도의사회 회장, 이승주 충청남도의사회 대의원회 의장, 서정성 의협 총무이사 등이 참석했다.
그 후로도 저마다의 도돌이표식 논리 전개와 파행이 반복됐다. 복지부가 '여론의 지지'를 들어 의협에 적정 증원규모 의견 제시를 요구하면, 의협은 '전공의 근무여건 개선' '의학 교육 질 제고' 등 선행 조건 마련이 우선이라고 맞섰다. 이렇게 2024년 1월 31일 27차 회의까지 진행됐고, 2월 7일 열린 마지막 28차 회의는 시작과 동시에 끝났다.
단, 의협은 복지부가 의사 증원안을 내놓기 훨씬 이전부터 논의 자체를 피해온 정황도 보인다. 예컨대 6월 8일 10차 회의에서 복지부와 의협은 필수의료를 중심으로 한 '인력 재배치' 등을 논의했다. 그러자 서울과 대전 등의 지역의협이 이를 사실상의 증원 관련 사안으로 보고 중앙집행부에 항의 서면을 제출하는 등 거세게 반발했다. 정부와 증원 관련 논의를 하는 자체가 부적절하다는 논리였다.
이러다 보니 의협 입장에서는 복지부와 논의 테이블에 앉았더라도 의대 정원 문제를 꺼내기 어려웠다는 분석이 나오는데, 정작 2024년 1월 30일에는 "정부는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의대정원 정책을 즉각 논의하라"고 촉구한 바 있다.
의협 관계자는 "의료현안협의체에서 의대 증원 관련 논의를 진행한 것 자체가 부적절했다는 주장은 의협의 공식적인 입장이 아니"라며 "오히려 의대 정원 확대를 비롯한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유연성 있는 자세로 협의체에 임해왔다"고 설명했다. 이어 "의사 증원은 과학적이고 타당한 근거를 바탕으로 신중하게 추진해야 한다는 뜻은 여전하다"고 강조했다.
현재도 의료계는 대화 대신 투쟁을 선호하는 기조가 뚜렷하다. 박민수 복지부 제2차관이 2월 29일 서울 여의도 건강보험공단 대회의실에서 전공의들과 비공개로 대화하는 자리를 만들었지만 참석한 전공의는 10명 미만으로 알려졌다.
결국 정부와 의료계의 갈등은 강대강으로 치닫게 됐다. 아직도 의료 현장에 복귀하지 않은 전공의는 7000여 명에 달한다. 전국 33개 의대 교수협의회는 3월 5일 서울행정법원에 보건복지부 장관과 교육부 장관을 상대로 의대 증원 취소소송까지 제기했다. 정부는 미복귀자 등을 대상으로 의료법에 따른 행정처분 및 경찰 고발에 나설 방침이다.
경찰도 정부와 적극 호흡을 맞추고 있다. 서울경찰청 공공범죄수사대는 최근 노환규 전 회장 등 의협 관계자들에 대한 압수수색을 진행하고 출국금지 조치했다. 전공의 집단사직 공모 혐의를 받는 주수호 의협 비대위 언론홍보위원장도 3월 6일 불러 조사했다. 이 밖에 의협 및 전공의단체 관계자들의 소환 일정도 조율하고 있다.
정부가 고발을 본격화하면 수사가 급물살을 탈 전망이다. 경찰의 한 관계자는 "최근까지는 시민단체 등을 중심으로 한 고발장만 제출돼 왔는데, 관계당국이 혐의를 입증할 수 있는 증빙자료 등을 충분히 갖춰 고발하면 수사가 탄력을 받게 될 것"이라며 "경우에 따라 추가 압수수색 등이 이뤄질 수도 있어 보인다"고 바라봤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