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년 전에 거절한 작품, 가족 생기니까 공감 가”…“억 소리 나는 주연 몸값? 그만한 값어치 해야죠”
“‘화란’에 이어 ‘로기완’을 하게 된 건 제가 그 시기에 스산한 분위기의 작품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그런 건 아니었어요. 원래 ‘로기완’은 7년 전에 처음 봤고, 그 후 7년이 지나서 다시 제게 돌아온 작품이거든요. 이번엔 놓치지 않고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출연을 결정한 거지 이 작품의 (어두운) 정서에 꽂혀서 그랬던 건 아니에요. 다만 표현하고 싶었던 지점 자체는 있었죠. 드라마에선 현실적으로 이런 정서를 보여주기 쉽지 않으니까 영화로 한 번 해보고 싶다고 생각할 때쯤 운 좋게도 기회가 닿은 거예요.”
조해진 작가의 소설 ‘로기완을 만났다’를 원작으로 한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로기완’은 삶의 마지막 희망을 안고 벨기에에 도착한 탈북자 로기완(송중기 분)과 삶의 이유를 잃어버린 한국인 여성 마리(최성은 분)의 만남과 헤어짐, 사랑을 그린다. 작품 홍보 때만 해도 난민 지위를 받을 때까지 철저히 이방인이라는 꼬리표를 단 채 사회의 귀퉁이에 놓여있어야 하는 기완의 고단하고 처절한 삶이 주로 조명될 것으로 기대됐지만, 공개 후 기완과 악연으로 시작해 사랑이 돼 버리는 마리의 로맨스 기류가 전면에 등장하면서 시청자들 사이에선 심하게 호불호가 갈리기도 했다. 극 중에서 비치는 로기완의 처지가 ‘맘 편한 사랑놀이’와는 영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 송중기 역시 자신도 이 둘의 관계성을 쉬이 받아들이지 못했다며 솔직히 털어놨다.
“사실 7년 전 처음 제안을 받았을 때 이 작품이 좋다고 생각하면서도 뭔가 제 생각과 맞지 않는 부분이 있었던 것 같아요. 극 중에서 기완은 어머니의 시신을 팔아서까지 탈북하게 되고, 그러면서도 ‘내가 어머니를 마중 나가지 않았다면 어머니가 돌아가실 일이 없었을 텐데’라는 죄책감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에요. 그런데 그런 인물이 왜 거기까지 가서 사랑놀이를 하고 있어요(웃음). 이 인물이 살아남는 그런 이야기로 가야 하는데 (로맨스가 있으니) 제가 공감이 안 된 거예요. 그래서 고민 끝에 최종적으로 하지 않겠다고 말씀드렸었죠.”
그런데도 7년이란 시간을 넘어서 ‘로기완’은 다시 송중기의 앞에 섰다. 똑같은 대본, 똑같은 캐릭터, 똑같은 설정이었지만 이를 받아들일 ‘사람’이 달라져 있었다. 7년 뒤의 송중기는 7년 전의 송중기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로기완을 바라보게 됐다. 자신의 앞에 성큼 다가온 기완의 삶 속에서 송중기는 기완이 사랑해야만 하는 이유를 그제야 찾아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로기완은 난민 지위를 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고, 잘살고 싶어 하는데 이 ‘잘사는 게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이 잘사는 건 다른 사람들이랑 부대끼면서 사는 것이 잘사는 게 아닐까요? 그래서 7년 전과는 달리 로기완의 로맨스에 공감이 됐던 것 같아요. 아무래도 7년 뒤의 제게는 가족이 생겼고, 그 가족이 제게 스며들어서 이렇게 생각이 바뀐 게 아닌가 싶기도 하고요. 불호평 중에 ‘왜 (어울리지 않는) 멜로가 나오느냐’고 하시는데 저도 그 말씀을 누구보다 자신 있게 이해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게 저도 그런 이유로 이 작품을 한 번 거절했잖아요(웃음). 한편으론 바람이 있죠. 그분도 다시 이 작품을 보신다면, 저도 공감됐던 것처럼 그렇게 변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데 그때도 공감이 안 되시면 그건 또 제가 어떻게 할 수 없는 거고요(웃음).”
송중기의 기완이 진창 속에서도 살아남으려 발버둥 치는 남자라면 상대역인 최성은의 마리는 온실 속에서 그대로 말라 죽어버리고 싶은 여자다. 삶의 의지를 놓아버린 속내를 보여주듯 치렁치렁 멋대로 긴 머리와 시커먼 눈화장을 한 채 비틀거리며 브뤼셀의 뒷골목을 누비는 마리의 모습은 최성은이 아니면 만들어내지 못했을 것이란 게 송중기의 자신감이었다. 2019년 영화 ‘시동’으로 데뷔해 올해 5년 차를 맞은, 아직 신인에 가까운 최성은에게서 자신이 갖추지 못한 배우의 마음가짐을 발견해 냈다며 엄지를 치켜 올리기도 했다.
“세탁소에서 기완이 마리에게 지갑을 털리는 장면이 (최)성은 씨의 첫 촬영이었어요. 그전엔 저 혼자 한 달 동안 찍다가 한 달 뒤에야 여주인공을 만나게 된 거죠. 그동안 진짜 너무 외로웠거든요, 혼자 찍느라(웃음). 화면으로 성은 씨가 들어오는 걸 보는데 정말 마리가 들어오는 것 같았어요. 성은 씨는 어떤 연기에서도 타협하지 않고 감독님, 제작진이 ‘오케이’를 내려주지 않으면 끝까지 밀고 들어가더라고요. 제가 가지지 못한 장점을 가진 배우죠. 한편으론 성은 씨 덕에 작품하면서 정말 오랜만에 제 파트너와 허물없이 모든 걸 이야기하며 부대낄 수 있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아요(웃음).”
그런가 하면 마리, 기완의 어머니와 함께 ‘로기완’ 속 기완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세 여성 중 한 명인 조선족 ‘선주’ 역의 배우 이상희의 연기도 소소하지 않은 이슈몰이를 해냈다. 기완의 벨기에 삶에서 마리 다음으로 크게 부딪치는 선주를 연기하며 “정말 중국 동포가 아니냐”는 시청자들의 놀라움을 이끌어 낸 그를 두고 송중기 역시 현장에서 감탄을 금치 못했다며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기완이와 선주의 서사가 잘 쌓였다고 판단해주시는 분이 계신다면 그건 (이)상희 누나 덕이에요. 누나는 ‘다 들어와, 중기야 아무거나 던져봐, 다 받아줄게’하는 애티튜드를 가졌거든요. 이번 작품에서 처음 호흡을 맞췄는데 정말 다양한 걸 생각해 오셔서 저나 성은 씨가 아무거나 던져도 다 받아주셨어요. 기완과 마리가 처음 밥을 먹을 때 기완이가 선주에게 온갖 물건을 빌려오는 그 신에서 둘의 대화는 아예 대본에 없는 100% 애드리브였을 정도로요. 또 촬영 없는 날에도 현장에 오셔서 엄마처럼 다 챙겨주셨어요. 작품의 주인공은 저와 성은 씨였지만 현장에서의 주인공은 이상희 배우님이었습니다. 이 이야기 하면 같이 출연한 (조)한철이 형이 삐질 텐데요, 어쩔 수 없어요(웃음).”
이처럼 ‘송중기의 이름값’이 가장 큰 메리트가 되는 작품에서도 그는 꾸준히 곁에서 함께 한 동료 배우들에게 공을 돌려왔다. 어느 때보다 ‘억 소리’ 나는 배우들의 이름값에 대중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더 매섭게 모이는 지금, 자연스럽게 이런 분위기를 체감할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는 그는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을까. 짧지만 단호한 대답, “결국 그만한 돈 값을 해야 한다”는 게 송중기의 이야기다.
“이전에도 제가 ‘(주연배우는) 돈 값 해야 한다’는 말을 드렸는데 농담이긴 해도 그게 맞는 말인 것 같아요. 특히 저희처럼 이렇게 공동 제작으로 들어갔다면 더 잘해야죠. 무늬만 공동 제작이라고 하고 수익 났을 때 셰어만 하면 되나요? 아마 제 성격이 그냥 그런 것 같아요. 주연 배우로서 책임감이 없으면 주인공을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그걸 ‘돈 값 해야지’라는 말로 정리한 거고요. 그러니 평소에도 작품에 해가 되는 행동을 하면 안 되고, 책임지는 행동을 해야겠죠. 그러라고 주연에게 돈을 많이 주는 거니까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