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액주주 표심 얻었지만 경영능력 입증과 상속세 마련 과제…임종윤·종훈 형제 “가족간 협력할 것”
#반전에 반전 거듭
지난 3월 28일 경기도 화성시 신텍스 라비돌호텔에서 열린 한미약품 지주사 한미사이언스 제51기 정기주주총회는 ‘지연’의 연속이었다. 9시에 개회가 예정됐던 주총은 12시 30분이 돼서야 개최됐다. 의결권 위임장 집계와 확인 과정이 길어졌기 때문이다. 그만큼 표 대결이 치열하다는 것을 짐작케 했다. 주총 사회자는 “새벽 5시부터 의결권을 확인하는 과정을 거쳐 9시에 진행하려고 했지만 위임장 확인이 지연되고 있다”며 “공정한 총회 진행을 위한 작업이니 양해해 달라”고 거듭 사과했다.
이번 주총은 한미약품그룹 오너 일가 경영권 분쟁의 최대 분수령으로 꼽혔다. 주총 전까지 반전에 반전이 거듭됐다. 당초 모녀 측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은 35%, 형제 측이 보유한 지분은 28.42%였다. 그런데 ‘키맨’으로 꼽힌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지분율 12.15%)이 형제 측을 지지하면서 형제 측의 우호 지분율이 40.57%로 높아졌다. 하지만 이내 모녀 측으로 판세가 기울었다. 지분 7.66%를 보유한 국민연금은 모녀 측 안건에 찬성한다고 밝히면서다. 지분 0.33%를 보유한 한미그룹 임직원 모임 한미사우회도 모녀 측 지지를 선언하며 모녀 측은 약 43% 지분을 확보하게 됐다.
이날 표 대결 결과는 오후 3시쯤에서야 나왔다. 결과는 형제의 완승이었다. 임종윤·임종훈 형제가 주주 제안한 이사진 5명 전원의 선임 안건이 통과됐다. 두 형제는 9명으로 구성된 한미사이언스 이사회에서 과반수를 차지하게 됐다. 임주현 한미사이언스 부회장과 이우현 OCI그룹 대표이사 등 한미사이언스 측 이사 후보 6명은 모두 이사회 진입에 실패했다. 형제 측이 제안한 이사 선임 건은 출석 주주 51~52%의 찬성표를 얻었다. 반면 모녀 측 후보는 약 48%의 지지를 얻는 데 그쳤다.
모녀와 형제의 희비는 사실상 소액주주들이 갈랐다. 이날 주총에는 본인 및 위임장 대리를 맡긴 2160명의 주주가 참여했다. 이들의 소유 주식 수(5962만 4506주)는 전체 발행주식 수(6995만 6940주)의 88%였다. 양측이 확보한 주요 주주를 제외하면 이날 주총 의결에 참여한 소액주주 등 지분은 4.5% 정도로 파악된다. 산술적으로 소액주주들이 형제 측에 대부분 찬성표를 던졌다는 계산이 나온다.
소액주주 표심에는 한미사이언스의 주가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2021년 초 8만 원대까지 올라갔던 한미사이언스 주가는 현재 3만 원대로 주저앉았다. 소액주주들은 종목토론방을 통해 모녀 측이 추진하는 소재·에너지 전문 기업 OCI그룹과의 통합 시너지 효과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형제 측은 의결권 대리행사 권유업무 대리인으로 케이디엠메가홀딩스 컨두잇을 선정하고 소액주주 연대 플랫폼 ‘액트’를 통해 의결권을 모았다. 주총 전날인 27일 자정까지 액트에서는 2.09%의 의결권이 확보된 것으로 알려졌다.
모녀 측은 신동국 회장의 마음도 돌리지 못했다. 지난 3월 25일 서울 송파구 한미약품 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임주현 부회장은 “신동국 회장과도 남은 이틀 동안 대화를 잘해볼 것”이라며 “저희의 입장을 설득할 수 있는 제안을 준비 중”이라고 말한 바 있다. 신 회장은 임성기 회장의 고향 후배다. 이날 주총에 모녀는 참석하지 않았다. 이우현 OCI그룹 회장은 참석했지만 표결 결과가 나오기 전에 자리를 떠났다.
#상속세 해법 못 찾으면서 분쟁 촉발
형제 측이 이사회 과반을 장악하면서 한미약품그룹과 OCI그룹의 통합도 무산됐다. OCI그룹은 “주주분들의 뜻을 겸허히 받아들이겠다”며 “통합 절차는 중단된다. 앞으로 통합 재추진 계획도 없다”고 밝혔다. 이우현 OCI그룹 회장은 3월 25일 한미약품 본사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 참석해 “(형제 측 이사가 한미사이언스 이사회에 다수 진입할 경우) 조건이 크게 바뀌면 통합을 그대로 진행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라고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OCI홀딩스는 약 7703억 원을 투입해 한미사이언스 지분 27.3%를 인수할 계획이었다. 앞서 1월 12일 한미사이언스는 OCI홀딩스를 상대로 2400억 원 규모의 제3자 유상증자를 실시하기로 했다고 공시했다. 같은 날 송영숙 회장과 가현문화재단이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지분 744만 674주를 OCI홀딩스에 매각하는 계약도 체결됐다. 송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은 한미사이언스 주식 677만 6305주를 OCI홀딩스에 현물출자하고 그 대가로 OCI홀딩스 주식 229만 1532주를 받기로 했다.
하지만 한미약품그룹·OCI그룹 통합 결정은 한미약품그룹 오너일가의 경영권 분쟁을 촉발하는 계기가 됐다. 형제 측은 이번 통합은 경영상 이유보다는 모녀가 상속세 납부 재원을 마련하고 임주현 부회장에게의 승계를 유리하게 만들려는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또 한미사이언스가 자율권을 잃고 OCI그룹의 중간지주사로 전락해 경영권을 상실할 것이라 지적했다. 모녀 측은 안정적인 R&D(연구개발) 재원을 확보해 글로벌 제약사로 도약하기 위한 결정이라고 맞섰다. 한미그룹 경영을 기존 경영진이 계속 맡는 게 통합의 대전제라고도 반박했다.
업계에서는 오너일가가 상속세 해법을 찾지 못하면서 분쟁이 발생했다고 분석한다. 임성기 회장이 2020년 타계하면서 송영숙 회장과 임종윤·임주현·임종훈 세 자녀는 약 1조 원에 달하는 주식을 상속받았다. 이로 인해 총 5400억 원 규모의 상속세가 발생했다. 이들은 ‘연부연납제도’를 통해 2025년까지 5년간 6번에 걸쳐 분할납부하기로 했다. 연부연납제도는 세금을 수년 동안 나눠 매년 1회 납부하는 제도다. 한미약품그룹 오너일가는 지난해까지 절반가량을 납부했다. 여전히 2000억 원이 넘는 상속세가 남은 상태다.
상속세 부담을 덜려는 모녀의 시도는 처음은 아니었다. 지난해 5월 2일 모녀는 사모펀드 운용사 라데팡스파트너스(라데팡스)와 코러스유한회사에 한미사이언스 주식 824만 2117주(11.8%)를 총 3132억 원에 매각하는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이 계약은 올해 1월 12일 해제됐다. 라데팡스의 출자자(LP)였던 새마을금고가 뱅크런(대규모 예금 인출)을 겪은 영향이 작용했다. 계약 무산 이후 라데팡스는 모녀 측에 OCI그룹을 소개해준 것으로 알려졌다.
뚜렷하지 않았던 경영권 승계구도도 이번 분쟁에 영향을 끼쳤다는 분석이 나온다. 과거에는 임종윤 전 사장이 후계자로 굳어지는 분위기였다. 임 전 사장은 2000년 한미약품 전략팀 과장으로 입사해 2005년 북경한미약품 대표, 2009년 한미약품 사장을 맡았다. 2010년부터는 임성기 회장과 공동으로 한미사이언스 대표를, 2016년부터는 4년간 단독 대표를 지냈다. 2020년 임 회장 별세 후에는 송영숙 회장과 각자 대표이사 체제로 그룹을 이끌었다. 하지만 2022년 3월 한미사이언스 대표이사와 사내이사에서 물러났다. 비슷한 시기 임주현 부회장도 한미사이언스 사내이사에서 사임했다.
임종윤 전 사장은 2021년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을 영위하는 디엑스앤브이엑스(DxVx, 옛 캔서롭) 지분 20%를 확보하며 최대주주에 올랐다. 같은 해 임 전 사장은 디엑스앤브이엑스 사내이사에도 올랐다. 그 사이 임주현 부회장은 한미약품에서 글로벌전략 인재개발팀(HRD)을 이끌며 글로벌 전략을 수립하는 역할을 맡았다. 한미사이언스에서는 전략기획실장을 맡았다. 겉으로 도는 장남에 모녀가 불만을 가지면서 힘을 합쳤고, 장남이 차남을 끌어들이면서 경영권 분쟁으로 번졌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바이오업계 한 관계자는 “임종윤 전 사장은 임성기 회장이 살아있을 때 중국 사업을 잘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물론 성격이 독특하기는 했지만 그것은 개인적은 문제다. 임주현 부회장 역시 똑똑하고 야무지다는 평이 있었다. 임종훈 전 사장도 열심히 했던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한국의 론자’ 구상 현실성 있나
임종윤·임종훈 형제 측이 경영권을 차지하면서 한미약품그룹에는 변화가 불가피해졌다. 우선 형제 측은 대표이사와 임원 등 경영진 교체에 나설 것으로 보인다. 지난 2월 형제 측은 한미사이언스와 한미약품을 각자 대표이사로 직접 이끌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지난 3월 25일자로 형제는 한미사이언스 사장과 한미약품 사장직에서 각각 해임됐다. 임종윤 전 사장은 3월 27일자로 한미약품 이사회에서도 제외됐다.
형제 측은 회사를 떠난 주요 임원들을 다시 불러들이겠다는 계획도 갖고 있다. 형제 측은 2022년 8월 이후 현재까지 20년 가까이 선대 회장과 신약 개발을 함께한 주요 임원 23명이 회사를 떠났다고 주장했다. 형제 측은 모녀와 협력할 뜻도 내비쳤다. 임종윤 전 사장은 주총이 끝난 직후 기자들과 만나 “기쁠 줄 알았는데 기쁘지 않고 마음이 아프다. 어머니·여동생과 같이 가길 원한다”고 말했다.
다만 앞서의 바이오업계 한 관계자는 “서로 추구하는 목표가 다른 데다 한 번 앙금이 생겼기 때문에 봉합이 쉽지 않을 것 같다”라고 말했다. 박주근 리더스인덱스 대표도 “송영숙 회장이 임주현 부회장을 후계자로 지목했지만 경영권을 형제들이 장악하며 사실상 무의미해졌다”라며 “형제 측이 모녀와 협력한다고 밝혔지만 그렇게 전개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라고 했다.
형제 측은 경영 능력도 입증해야 한다. 형제 측은 지난 3월 21일 서울 여의도 한경협회관에서 기자간담회를 갖고 “한국의 론자가 되겠다”는 포부를 드러냈다. 론자는 세계 최대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업체다. 바이오의약품 위탁개발(CDO)과 임상수탁(CRO) 사업을 미래 성장동력으로 제시했다. 한미약품의 450개 케미컬(합성화학 의약품) 제조 경험을 토대로 100개 이상의 바이오의약품을 제조하겠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5년 안에 순이익 1조 원을 달성하겠다는 목표도 제시했다.
하지만 형제 측의 구상은 현실성이 떨어진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다. 해외 기업이 국내 업체에 의약품 제품 초기 개발을 의뢰할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이유에서다. 국내 시장으로만 한정해도 사실상 독점 수주를 해야 100개 제품 생산이 가능하다는 지적이 나온다. 모녀 측은 다품종 소량 생산의 CDO와 CRO 사업을 하려면 현재의 평택 바이오 플랜트가 아닌 새로운 공장이 필요하다고도 지적하기도 했다.
바이오업계 다른 관계자는 “삼성바이오로직스도 바이오의약품 CMO(위탁생산) 사업을 위해 인도에서 굉장히 많은 인력을 데려왔다. 바이오 분야에서 인력을 구하는 게 쉽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약품 측은 100여 종의 바이오의약품을 생산하려면 기술이전·연구·생산 분야에서 약 1000명의 인력을 모집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 형제 측은 1조 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하겠다는 계획도 제시했다. 하지만 구체적인 투자 계획을 밝히지는 않은 상태다.
상속세 역시 해결해야 할 과제로 남았다. 형제 측은 “세금 문제는 개인적으로 알아서 잘 해결하고 있다”며 “상속세를 낼 재원이 있다”고 강조해왔다. 하지만 임주현 부회장은 입장문을 통해 “오빠와 동생은 상속세 잔여분 납부에 관한 실질적, 구체적인 대안과 자금의 출처를 밝혀 주기 바란다”고 지적한 바 있다. 현재 임종윤 전 사장은 보유한 한미사이언스 주식 대부분을 담보로 대출받은 상태다. 공동상속인 중 각자가 납부할 상속세를 납부하지 못하면 관세관청은 다른 상속인의 재산도 압류할 수 있다.
‘한국의 바이엘 꿈꿨는데…’ 일단 무산된 이우현 회장의 꿈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은 OCI그룹을 독일 ‘바이엘’처럼 키우고 싶다는 구상을 드러냈었다. 바이엘은 석유·화학에서 제약·바이오로 사업 분야를 확장한 기업이다. 지난해 기준 OCI그룹 지주사인 OCI홀딩스의 매출 중 55%가 베이직케미칼과 카본케미칼 등 화학 사업에서 발생했다. 화학 사업은 시장 상황의 영향을 많이 받아 불확실성이 높다.
실제 이우현 회장이 이끄는 OCI그룹은 제약·바이오 사업에 꾸준히 관심을 가져왔다. 2018년 5월 OCI는 부광약품과 50 대 50 비율로 합작사 비앤오바이오를 설립했다. 2022년 2월 OCI홀딩스는 부광약품 지분 10.9%를 인수하며 부광약품을 자회사로 편입했다. 다만 아직은 성과가 부진하다. 부광약품은 2022년과 지난해 각각 약 2억 원, 375억 원의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이우현 OCI홀딩스 회장은 지난 3월 25일 한미약품 본사에서 열린 간담회에서 “부광약품이 연구개발(R&D)에 집중하다보니 영업이나 관리가 부실해진 면이 있다”며 “한미약품은 비만과 당뇨 치료제 등 좋은 아이템이 있다. 우리가 서포트하면 궁극적으로 주주 가치 증대가 될 것이라고 봤다”고 말했다.
증권가에서도 한미약품그룹과의 통합은 OCI그룹 입장에서 ‘굿딜’이라는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양형모 DS투자증권 연구원은 보고서를 통해 “부침이 많은 태양광 업종의 특성을 안정적인 제약 비즈니스로 일부 상쇄 가능하다”고 분석했다. OCI그룹의 주력 사업 부문인 베이직케미컬 사업 부문은 폴리실리콘 등 태양광 핵심 소재를 만든다.
하지만 한미약품그룹과 통합이 무산되면서 제약·바이오 사업을 확장하려던 이우현 회장의 계획에는 제동이 걸렸다. 이 회장은 3월 29일 서울 중구 OCI 본사에서 열린 주주총회에서 다른 제약·바이오 기업과의 사업 협력 기회를 발굴하겠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국내 회사뿐 아니라 해외에도 좋은 기회가 많다”고 말했다.
김명선 기자 se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