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마나가 사이영상 모의 투표에서 3위…개막전 흔들렸던 야마모토도 안정권
가까운 시일 내에 MLB 마운드에서 한국인 투수를 볼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아직은 희박하다. 현재 KBO리그에서 뛰는 투수들 중엔 향후 1~2년 안에 빅리그에 도전할 만한 선수가 보이지 않는다. KBO리그를 거치지 않고 미국으로 직행한 강속구 유망주 심준석(20·피츠버그 파이어리츠)과 장현석(20·LA 다저스)도 이제 막 마이너리그에서 육성을 시작한 단계라 시간이 더 필요하다.
#일본인 투수들의 약진
반면 일본인 투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MLB에서 양적, 질적으로 풍부한 성과를 올리고 있다. 12년째 MLB 마운드를 지키고 있는 다르빗슈 유(38·샌디에이고 파드리스)를 필두로 마에다 겐타(36·디트로이트 타이거스), 기쿠치 유세이(33·토론토 블루제이스), 야마모토 요시노부(26·다저스), 이마나가 쇼타(31·시카고 컵스), 마쓰이 유키(29·샌디에이고), 우와사와 나오유키(30·보스턴 레드삭스)까지 총 7명이 빅리그에서 뛰고 있다. 투타를 겸업하는 오타니 쇼헤이(30·다저스)가 올해는 팔꿈치 수술 여파로 투수를 쉬고 타자로만 나서고 있는데도 일본인 투수들의 존재감이 엄청나다.
MLB닷컴이 5월 14일(한국시간) 공개한 올해 사이영상 모의 투표 결과만 봐도 그렇다. 사이영상은 매년 양대 리그 최고 투수 한 명씩에게만 주어지는 영예다. MLB닷컴은 시즌 전체 일정의 25%가 지난 시점에 전문가 41명에게 모의 투표를 진행한 뒤 1~5위 표에 각각 5점·4점·3점·2점·1점을 매기고 총점을 계산해 최종 후보들을 가려냈다. 내셔널리그에선 이마나가와 야마모토, 아메리칸리그에선 기쿠치 등 세 명의 일본인 투수가 그 안에 포함됐다.
특히 이마나가는 1위표 9장을 얻어내면서 잭 휠러(필라델피아 필리스)와 타일러 글래스노우(다저스)에 이어 내셔널리그 사이영상 후보 3위에 이름을 올렸다. 이마나가는 개막 전까지만 해도 역대 MLB 투수 최고액 계약(12년 3억 2500만 달러)을 해낸 야마모토에 밀려 상대적으로 덜 주목 받았지만, 시즌의 막이 오르자 압도적인 활약을 펼치며 올 시즌의 진정한 주인공으로 거듭나는 모양새다.
MLB닷컴은 "이마나가가 메이저리그에 '순조롭게 적응했다'고 말하는 건 너무 약소한 평가일 수 있다"며 "오프시즌에 컵스와 4년 5300만 달러에 계약한 이마나가는 역사적일 만큼 훌륭한 성적으로 MLB 데뷔시즌 커리어를 시작하고 있다"고 썼다. 또 "이마나가는 첫 8번의 선발 등판에서 평균자책점 0.96을 기록했다"며 "양대 리그가 평균자책점을 공식 기록으로 집계하기 시작한 1913년 이후, 역대 모든 투수의 빅리그 첫 8경기 선발 등판(40이닝 이상 투구 기준) 기록 중 4번째로 좋다"고 짚었다.
미국 스포츠 전문 매체 블리처리포트도 5월 17일 '2024시즌을 정의하는 선수 10명' 리스트에 이마나가를 포함하면서 "그가 기대를 안고 MLB에 입성하긴 했지만, 이렇게 빨리 실력을 발휘할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평균자책점은 0.96으로 MLB 전체 1위고, 컵스의 선발진을 이끌고 있다. 올 시즌 이마나가보다 가치 있는 투수는 거의 없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 매체는 또 "이마나가는 탈삼진 아티스트라고 할 수 없지만, 타자들의 방망이가 따라 나오게 만드는 능력은 리그 최고 수준"이라며 "컵스는 다저스, 애틀란타 브레이브스, 필라델피아 필리스와 포스트시즌에 대결할 수 있다. 이때 가장 믿을 만한 선발투수를 앞세워 시리즈를 시작할 수 있는 건 큰 도움이 된다. 이마나가의 존재는 내셔널리그에서 컵스의 입지에 극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내다봤다.
#'마운드의 철학자'가 왔다
왼손 강속구 투수인 이마나가는 야구 국가대표팀 맞대결을 통해 한국 야구팬에게도 잘 알려진 선수다. 그는 2015년 일본 프로야구 신인 드래프트 1순위로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에 지명된 뒤 2016년 1군에 데뷔했다. 지난해까지 8시즌 통산 165경기에서 1002⅔이닝을 던져 64승 50패 평균자책점 3.18 탈삼진 1021개로 활약했다. 2017년(11승)·2019년(13승)·2022년(11승)에 세 차례 두 자릿수 승리를 올렸고, 2022년 6월 7일 니혼햄 파이터스전에서 노히트노런도 달성했다. 지난 시즌에는 22경기(148이닝)에 나와 7승 4패 평균자책점 2.80 탈삼진 173개로 퍼시픽리그 탈삼진 1위에 올랐다.
국제대회에도 자주 나갔다. 2017년 아시아프로야구챔피언십(APBC), 2019년 WBSC 프리미어12, 2023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에서 일본 야구대표팀인 '사무라이 재팬' 유니폼을 입었다. 특히 WBC에서 존재감이 돋보였다. 3경기(선발 1경기)에서 1승 평균자책점 3.00 탈삼진 7개로 호투해 일본의 7전 전승 우승에 기여했다. 조별리그 한국전에선 4회 두 번째 투수로 등판해 박건우(NC 다이노스)에게 홈런 하나를 맞았지만, 3이닝 3피안타 무사사구 3탈삼진 1실점으로 잘 던져 확실한 눈도장을 받았다. 키 178cm·몸무게 79kg으로 투수 치고는 작은 체격인데도 최고 시속 155km의 강력한 직구와 슬라이더, 스플리터로 한국 타자들의 헛스윙을 9번이나 이끌어 내 추격 의지를 꺾었다
이마나가는 지난 시즌이 끝난 뒤 포스팅시스템(비공개 경쟁입찰)을 통해 MLB 문을 두드렸다. 컵스는 자유계약선수(FA)로 풀린 선발 투수 마커스 스트로먼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이마나가를 붙잡았고, 4년 총액 5300만 달러에 사인했다. 2027년 시즌 후 컵스가 구단 옵션을 행사하면 계약은 2028년까지 5년 총액 8000만 달러로 늘어나게 된다. 반면 컵스가 옵션 행사를 포기하면 이마나가는 자유계약선수(FA)가 된다. 이 소식이 알려지는 과정에서 이마나가가 더 많은 돈을 뿌리치고 컵스를 택했다는 뒷얘기가 전해지기도 했다. 뉴욕포스트의 존 헤이먼 기자는 "보스턴 레드삭스가 컵스보다 두 배 더 좋은 조건을 제시했지만, 이마나가는 컵스를 택했다"고 전했다.
실제로 보스턴은 이마나가의 포스팅이 시작하자마자 가장 적극적으로 꾸준히 구애했던 팀 중 하나였다. 그러나 이마나가는 한 달 가까이 고민한 끝에 컵스의 손을 잡았다. 이마나가는 "컵스의 사장, 단장과 대화하면서 좋은 말을 많이 들었다. 특히 '너의 잠재력을 믿고 과감하게 던져라'는 말이 와닿았다"며 "나 자신의 가능성이 무한대로 커지는 팀을 원했고, 컵스에 입단하는 것이 나의 성장으로 이어질 것 같아 계약을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는 또 "아직 나는 완성품이 아니다. 컵스에서 투수코치님의 이야기를 듣고, 동료들의 투구를 보면서 컵스와 함께 성장해 완성품이 되고 싶다"는 각오를 밝혀 많은 이의 박수를 받았다.
일본 프로야구 시절 이마나가의 별명은 '마운드의 철학자'였다. 그는 과거 인터뷰에서 "이기고 지는 것을 '운'으로 여긴다면 더 이상 성장은 없다", "팀의 득점 지원이 없다고 불평하는 것은 0점대 평균자책점 투수나 할 수 있는 말이다"와 같은 명언을 남긴 것으로 유명하다. 이마나가는 이와 관련해 "나를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매일 공부한다. 야구뿐만 아니라 외적인 부분, 미국에서의 생활도 매일 공부하고 있다"고 "항상 향상심을 가지려고 노력한 것이 그런 별명으로 이어진 것 같다"고 했다.
#일본도 들뜬 이마나가의 활약
이마나가는 개막 전까지 걱정을 사기도 했다. 시범경기에 네 차례 출격해 2승 2패 평균자책점 5.68로 다소 부진했다. 그러나 정규시즌 첫 경기에서 누구보다 화려한 빅리그 데뷔전을 치렀다. 4월 2일 콜로라도 로키스와의 홈 경기에 선발 등판해 6이닝 2피안타 무사사구 9탈삼진 무실점으로 호투하며 팀의 5-0 승리를 이끌었다. MLB 첫 경기라고 믿어지지 않을 만큼 완벽한 투구였다. 그는 6회 2사까지 단 한 개의 안타와 볼넷도 내주지 않고 콜로라토 타선을 막았다. 유일한 출루는 2회 크리스 브라이언트에게 한 차례 허용했는데, 내야수 실책이 원인이었다. 0-0으로 맞선 6회 2사 후 연속 안타를 허용해 1·2루 위기에 놓였지만, 놀런 존스를 삼진 처리하면서 무실점으로 임무를 완수했다. 컵스 타선은 6회 말 3점을 뽑아 이마나가의 호투에 보답했다.
그 후 이마나가는 승승장구했다. 4월 8일 다저스전에서는 4이닝 2피안타 3탈삼진 무실점을 기록했고, 14일 시애틀 매리너스 전에서 5⅓이닝 5피안타 4탈삼진 1실점(비자책)으로 시즌 2승째를 챙겼다. 다음 등판인 21일 마이애미전에서 6이닝 5피안타(1피홈런) 5탈삼진 3실점(2자책)으로 3번째 승리를 따낸 뒤 27일 보스턴전에서는 6⅓이닝 5피안타(1피홈런) 7탈삼진 1실점으로 4승 달성에 성공했다.
이마나가는 이어 5월 2일 뉴욕 메츠를 상대로 7이닝 3피안타 1볼넷 7탈삼진 무실점 역투를 펼치면서 일사천리로 5번째 승리를 챙겼다. 그러나 8일 샌디에이고전에서는 7이닝 7피안타(1피홈런) 8탈삼진 2실점으로 호투하고도 승패 없이 물러났다. 14일 애틀랜타전에서도 다시 5이닝 7피안타 8탈삼진 무실점으로 역투하고도 시즌 6승은 따내지 못했다. 대신 평균자책점을 다시 0점대로 끌어내리며 MLB 전체 1위 자리를 사수했다. 일본 도쿄스포츠는 "이마나가의 평균자책점이 다시 0점대로 돌입했다. 이대로라면 일본인 투수 최초의 사이영상을 수상할 가능성도 있다"며 "직전 등판에선 비록 볼넷을 3개 내주며 어려운 상황도 맞았지만, 탈삼진 8개를 곁들이며 무실점 투구를 해냈다. 이런 이마나가의 호투에 팬들도 크게 흥분하고 있다"고 썼다. 이마나가의 현재 성적은 8경기 46⅔이닝 5승 무패 평균자책점 0.96 탈삼진 51개. 리그를 지배하는 수준의 활약이다. 벌써부터 미국의 여러 매체가 가장 유력한 신인왕 후보로 이마나가를 꼽고 있다. 아직까지는 신인왕 레이스에서 이마나가의 적수도 없어 보인다.
#최대 기대주 야마모토도 순항 중
천문학적인 대우를 받고 MLB에 입성한 다저스의 야마모토도 순항 중이다. 5월 17일까지 9경기에서 47⅔이닝을 던져 4승 1패 평균자책점 3.21 탈삼진 53개 이닝당 출루허용(WHIP) 1.03으로 연착륙하고 있다. 야마모토는 지난 3월 21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MLB 월드투어 서울시리즈 샌디에이고와의 첫 경기에서 1이닝 5실점으로 무너져 호된 신고식을 치렀다. 그러나 이후 8경기에선 4승 평균자책점 2.31로 위력을 찾았다. 아직 일본 프로야구 시절처럼 압도적인 투구는 하지 못했지만, 안정감을 보이고 있다.
빅리그 6년 차가 된 왼손 기쿠치도 커리어 하이 시즌을 보내고 있다. 그의 성적은 8경기 47⅔이닝 2승 3패 평균자책점 2.64 탈삼진 46개 WHIP 1.05. 빅리그 선발 투수로서 충분히 수준급이다. 왼손 파이어볼러인 그는 약점이었던 제구가 눈에 띄게 개선되면서 이제는 '계산이 서는 투수'로 자리매김했다. 올해 9이닝당 볼넷이 1.7개밖에 안 된다.
베테랑이자 '맏형'인 다르빗슈도 8경기에서 40⅔이닝을 던져 3승 1패 평균자책점 2.43 탈삼진 37개 WHIP 0.98를 기록 중이다. 여전히 에이스급 투구를 펼치며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올해 같은 팀에 입단한 왼손 불펜 마쓰이도 빅리그 첫 해 20경기(18⅔이닝)에 나서면서 2승 4홀드 평균자책점 3.86 탈삼진 13개 WHIP 1.34로 무난하게 적응 과정을 밟고 있다.
부진한 선수도 있다. 마에다가 7경기(30⅔이닝) 1승1패 평균자책점 6.75의 성적에 머물고 있고, 우와사와가 2경기(4이닝 1실점) 만에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갔다. 그러나 데뷔 첫해인 지난해 올스타까지 선정되면서 NL 신인상 2위에 오른 센가 고다이(31·뉴욕 메츠)도 MLB 복귀를 준비하고 있다. 어깨 통증으로 부상자 명단에서 시즌을 맞이한 센가는 재활이 길어지면서 6월 중 복귀를 목표로 하고 있다.
심지어 내년에는 올해보다 더 많은 일본인 투수를 볼 수도 있다. 올해는 지명타자로만 출전하는 오타니가 내년에는 다시 투수로 복귀한다. 시속 169km 강속구를 던지는 일본 프로야구의 파이어볼러 사사키 로키(23·지바 롯데 마린스)도 호시탐탐 MLB 조기 진출을 노리고 있다. 그를 향한 메이저리그 스카우트들의 관심도 대단하다. 일본 프로야구 출신 투수에 대한 MLB의 신뢰도가 충분히 쌓였기에 더 그렇다. 올해의 '발견'으로 떠오른 이마나가의 성공이 향후 더 많은 일본인 투수에게 MLB로 향하는 길을 열어줄 가능성도 크다.
배영은 중앙일보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