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란 내부선 “경제 제재 미국 간접적 책임” 비난…하메네이 아들·모사드 배후설 등 암살 주장도 솔솔
‘이란의 2인자’로 불렸던 라이시는 현 최고 권력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85)의 유력한 후계자로 꼽혔던 인물로, 이란 내 강경파와 보수파로부터 널리 지지를 받았다. 1988년 반체제 인사 수천 명을 처형하는 데 일조한 사형위원회의 일원으로 활동한 경력이 있으며, 2021년 대통령직에 오른 후에도 줄곧 강경한 입장을 보이면서 탄압과 무차별 학살을 일삼았다. 이런 까닭에 서방 언론에 의해서는 ‘테헤란의 도살자’라는 악명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란 내부에서의 평가는 극과 극으로 엇갈렸다. 보수적인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서방 세계에 대항하는 그의 강경한 행보를 적극 지지하면서 무한한 신뢰를 보냈다. 가령 우라늄 농축을 강화하고 국제기구의 사찰을 방해하는 등 핵프로그램을 적극적으로 추진해온 점, 그리고 이스라엘 본토에 미사일 및 드론 공격을 감행한 점 모두 지지를 받았다.
반면, 반정부 성향의 이란 시민들 사이에서는 최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무엇보다 2022년 벌어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무력으로 탄압하면서 민심은 더욱 곤두박질쳤다. 히잡을 제대로 착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도덕경찰에 끌려갔다가 3일 만에 돌연사한 마흐사 아미니의 죽음에 대한 진상규명을 요구했던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폭력을 가했고, 이로 인해 사망한 시민들은 무려 500명이 넘었다. 체포된 사람만 1500명 이상이었다.
당시 시위가 벌어진 이유는 비단 아미니의 억울한 죽음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간 미국의 제재로 인해 이란 경제가 피폐해진 까닭도 있었다. 높은 실업률과 경기 침체로 억눌린 민심이 결국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라이시의 갑작스런 죽음을 둘러싼 다양한 음모론들이 나오는 것도 결코 무리는 아닌 셈이다.
이에 반해 현재 이란 정부는 사고의 원인이 헬기의 기술적 결함 때문이었다고 공식 발표한 상태다. 이와 관련, 이란 국영 IRNA 통신은 라이시가 탑승했던 헬기가 이란 정부가 2000년대 초반 구입한 미국산 ‘벨-212’이었다고 보도했으며, CNN은 이 사고 헬기가 45년 된 노후 기종이었다고 전했다.
이란 정부는 헬기를 구입한 후 제대로 된 정비가 이뤄지지 않은 탓에 사고가 발생했다며 비난의 화살을 미국 측으로 돌리고 있다.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전 이란 외무장관은 “이번 사고의 원인 가운데 하나는 미국”이라고 지칭하면서 “미국이 저지른 범죄는 이란 국민의 마음과 역사에 기록될 것”이라고 맹비난했다. 요컨대 미국의 제재로 인해 헬기 부품 조달에 어려움을 겪은 탓에 제대로 된 정비가 이뤄지지 않았다면서 이번 비극을 초래한 간접적인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실제 이란은 국제사회의 제재 때문에 부품을 밀수하거나 역설계(내부를 뜯어서 분해한 후 설계)를 통해 자국 항공기를 수리해왔다.
사고 당일 편대 비행 중이었던 세 대 가운데 라이시가 탑승했던 헬기만 유일하게 추락했다는 점 역시 이런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나머지 두 대는 악천후에도 불구하고 안전하게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이런 주장에 대해 미국 측은 “완전히 터무니 없는 소리”라고 일축하고 있는 상태다.
단순 사고가 아닌 암살에 무게를 싣는 사람들 가운데는 이란 내부의 권력 투쟁이 부른 비극이 아닐까 의심하는 이도 있다. 라이시가 하메네이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만큼 차기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하는 파벌들이 저지른 암살 아니냐는 의미다. 이와 관련, ‘카네기 평화기금’의 카림 사드자드푸르는 라이시의 사망이 확인되기 몇 시간 전 X(옛 트위터)에 “이란의 음모적인 정치 문화에서 라이시의 죽음이 우연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라는 글을 올렸다.
라이시의 죽음으로 가장 이득을 볼 것으로 예상되는 사람은 하메네이의 아들인 모즈타바 하메네이다. 지난 수년 동안 하메네이의 뒤를 이을 후계자로 라이시와 함께 거론되어 왔던 모즈타바는 라이시가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현재 유력한 후보로 급부상한 상태다. 실제 모즈타바는 아버지의 후광을 등에 업고 그간 막후에서 비공식적으로 상당한 권력을 행사해왔으며, 혁명수비대와도 깊은 관계를 구축해왔다.
이에 몇몇 사람들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그간의 경쟁 관계를 지적하면서 모즈타바가 어떻게든 추락 사고의 배후에 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전 미 국무부의 이란 담당 고문인 가브리엘 노론하는 X에 올린 글에서 “중요한 건 차기 최고지도자가 하메네이의 아들인 모즈타바가 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사실이다”라고 분석했다. ‘지리의 힘’의 저자인 팀 마샬은 “라이시는 이란을 통치하진 않았지만, 그렇게 하고 싶어했다. 그는 차기 최고 지도자 물망에 오른 인물들 가운데 선두주자였다. 이제 모즈타바에게는 최고위직 자리를 두고 경쟁하던 한 명이 줄은 셈이다”라고 언급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모즈타바가 차기 지도자로서 과연 합당한지 끊임없이 의심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지도자 경험이 부족한 데다 세습 지도자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이란 내 비난 여론 때문에 과연 그가 아버지의 뒤를 이을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 밖에 분리주의 무장세력의 소행이라고 의심하는 사람들도 있다. 가령 수니파 분리주의 무장단체인 ‘자이시 알아들’이 벌인 암살작전이라는 의심이다. 실제 수니파 분리주의는 이란 보안 요원들을 상대로 지난 수년간 꾸준히 공격을 감행해 왔다. 지난 4월, 이란 동남부에서는 이란 보안요원 수십 명이 공격을 받아 사망하기도 했다. 다만 분리주의자들이 대통령 전용 헬기를 격추할 수 있는 수단이나 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는 증거는 없기 때문에 이런 주장은 단지 의혹에 그치고 있는 게 현실이다.
외부 세력이 개입됐다는 음모론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지목하는 국가는 이란의 오랜 적국인 이스라엘이다. 그간의 이스라엘과 이란 간의 마찰을 고려하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의심이다. 더욱이 라이시가 이끄는 이란 정부가 지난 4월 처음으로 이스라엘에 대한 직접적인 공중공격을 감행했다는 점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이에 이란 내부에서 비밀리에 작전을 수행해온 것으로 의심받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가 추락의 배후에 있다고 추측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와 관련, ‘이코노믹타임스’는 “라이시의 죽음은 마치 넷플릭스 시리즈 속에 등장하는 이야기 같다. 모사드가 그간 이란에서 자유롭게 벌여온 작전에 대한 이야기를 상기시킨다”고 지적했다. 교육자이자 전문가인 포아드 이자디는 이란 관영 TV에서 “이번 헬기 사고는 기술적인 문제나 기상 상황 때문일 수 있지만 다른 시나리오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이스라엘과 모사드의 개입 가능성을 시사한 그는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서 사고가 발생했는데 그 지역은 시온주의자들과 모사드가 활동하는 곳이기도 하다”며 의혹의 눈길을 보냈다.
실제 이스라엘은 과거 이란 내 주요 인사들뿐 아니라 중요한 시설을 상대로 대담한 공격을 수행한 것으로 의심받아왔다. 가령 2020년, 이란의 핵 과학자인 모흐센 파크리자데의 사망을 둘러싸고 가장 의심을 받았던 나라 역시 이스라엘이었다. 당시 파크리자데는 운전을 하고 가던 중 도로변에 주차된 트럭에 장착되어 있던 자동 기관총을 맞고 사망했다. 저격수는 무려 1600km 이상 떨어진 비밀 장소에 앉아서 컴퓨터 화면으로 기관총을 조종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 ‘뉴욕타임스’는 첨단 로봇 장치가 부착된 벨기에산 FN MAG 기관총이 사용됐다고 보도하면서 무게만 약 1톤에 달하는 기관총, 로봇, 부품이 분해된 후 이란으로 밀반입됐다고 추측했다. 트럭에는 여러 방향을 가리키는 카메라가 장착되어 있었으며, 살인 작전 완료 후에는 폭발될 수 있도록 폭발물이 가득 탑재돼 있었다. 사정이 이러니 당시 이란 측은 파크리자데가 이스라엘 정부와 망명한 야당 집단이 벌인 새로운 유형의 ‘복합 작전’으로 살해됐다고 주장했다.
이 같은 모사드의 비밀 작전은 그간 여러 차례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뉴욕타임스’ 보도에 따르면, 2004년 이후 모사드는 이란의 핵연료 농축시설 파괴 작전과 사이버 공격을 수차례 감행해 왔다. 또한 이란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주도하는 전문가들도 조직적으로 제거해 왔다. ‘뉴욕타임스’는 “2007년 이후 모사드가 암살한 이란의 핵 과학자들은 다섯 명이다. 이들 과학자들 대부분은 장거리 미사일에 장착할 만큼 충분히 작은 핵탄두를 만드는 기술을 포함해 이란의 핵무기 비밀 프로그램을 이끌고 있었다”라고 보도했다.
하지만 이스라엘은 헬기 추락 사고에 연루된 사실을 부인하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이스라엘 관리는 ‘로이터통신’을 통해 “우리는 아니다”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중동지역 전문가들 역시 이스라엘의 연루 가능성을 낮게 보고 있다. 무엇보다 현직 대통령을 암살하는 무모한 행위는 직접적인 전쟁 행위로 간주될 수 있는 데다 자칫하다간 이란의 강력한 대응을 초래하는 역풍을 맞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간 이스라엘의 전략적 초점은 세간의 이목을 끄는 고위 정치인 암살보다는 군사 및 핵시설 파괴에 맞춰져 있었다는 점도 지적됐다. ‘이코노미스트’는 “이스라엘의 개입을 의심할 만한 충분한 이유는 있다. 다만 이스라엘은 이란의 강경한 대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명백한 전쟁 행위인 국가원수 암살까지는 간 적이 없었다”고 지적했다.
한편 사이버 공격으로 벌어진 암살이라는 주장도 제기됐다. 주로 X와 같은 소셜미디어 플랫폼에서 인기를 얻고 있는 음모론으로, 헬기의 항공전자시스템이 해킹을 당했다거나, 혹은 기내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현재로선 이런 주장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는 없기 때문에 단지 떠도는 소문에 그치고 있다.
현재 이란에 당장 닥친 문제는 차기 대통령 선거다. 이란인들은 50일 안에 치러질 예정인 선거에서 과연 누가 당선될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하지만 막강한 리더십을 갖춘 인물이 딱히 없다는 점이 숙제로 꼽히고 있다. 그간 이란의 억압적인 정권 아래서는 경쟁자들이 많이 배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979년 이슬람 혁명에서 승리했던 세대들은 고령화됐으며, 신정국가의 정치 엘리트 수 역시 꾸준히 줄어들었다. 점점 더 젊어지고 세속화되는 인구층에 종교적 정통주의를 강요할 의지와 능력이 있는 잠재적 후보자 역시 거의 없다. 무자비한 냉혈한에 정통주의자였던 라이시가 차기 후보자로 부상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안으로는 막강한 지배력을 유지하고, 밖으로는 적국들 사이에서 우위를 유지해야 한다는 점에서 누가 되든 이란의 차기 지도자는 엄중한 시험대에 오르게 될 전망이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