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검 실랑이에 미뤄지는 ‘숙제’
▲ 이건희 삼성 회장 | ||
검찰은 그동안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 수사와 관련해 최대 화두였던 이 회장 소환 문제를 두고 ‘소환은 하지만 시기가 문제’라는 식의 입장을 보여 왔다. 반면 법원은 이미 1심 재판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허태학·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들에 대한 항소심에서 ‘유죄를 입증할 추가 증거를 제출하라’고 요구하는 등 검찰을 다그쳐 왔다. 최근 벌어진 론스타 영장 기각 사태와 비슷한 맥락으로 풀이되는 상황이다.
검찰은 얼마 전 공판에서 ‘삼성그룹 비서실이 전환사채 편법증여에 관여한 정황이 있다’고 주장해 이 회장을 향한 압박에 속도를 붙였다. 검찰 고위관계자들은 “이 회장을 연내 소환할 것”이라 힘주어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검찰의 강경한 자세와는 달리 ‘이 회장의 소환이 연내에 불가능할 것’이란 관측이 조금씩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 회장 소환을 줄기차게 주장해온 검찰이 아닌 법원 안팎에서 ‘이 회장 소환 연내 불가론’이 불거지고 있는 것이다.
우선 허태학 박노빈 전·현직 에버랜드 사장들에 대한 재판이 신속하게 진행되지 못하는 점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1심 재판부는 지난해 10월 업무상 배임죄로 허 씨에게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 박 씨에게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그러나 지난 8월 항소심 공판에서 재판부가 검찰 측에 추가 증거 제시를 요구하면서 항소심 장기화가 예고된 바 있다.
허태학 박노빈 씨 두 사람에 대한 재판결과는 이 회장 소환과 기소 여부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검찰 입장에선 항소심 재판부가 허태학 박노빈 씨의 업무상 배임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지 않으면 이 회장을 공범으로 기소하는 데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검찰은 허·박 씨 두 사람에 대한 조사와 이 회장의 개입 여부 조사를 동시에 하고는 있지만 허·박 씨 처리 문제가 완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 회장에 대한 소환 혹은 영장 청구는 ‘제2의 론스타 영장 기각 사태’를 촉발시킬 수도 있다는 이야기마저 나오고 있다.
이렇다보니 이 회장 소환조사를 밀어붙여온 검찰 내부에선 불협화음마저 들려오기도 한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 회장과 삼성 총수일가의 전환사채 편법증여 개입 조사에 달라붙어온 수사인력이 허탈감을 느낄 법도 하다”며 “이 회장 소환 조사가 늦춰질수록 이 회장 기소에 적극적이던 소장파 검사들과 이 회장 처벌에 회의적이던 고위 간부급 검사들 간 감정의 골도 깊어질 것”이라 전망했다.
일각에선 검찰이 재판부에 제출한 것으로 알려진 ‘이 회장이 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에 개입했다’는 정황에 대한 내용이 법원의 마음을 사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이미 론스타 영장 기각 사태로 검찰과 일전을 치른 법원 내부에선 ‘검찰이 제출한 자료가 유죄 입증 증거로 불충분하다’는 내부 결론을 내렸다는 소문도 퍼지는 중이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이 회장 수사를 담당하는 검찰 내부의 균열이야말로 삼성과 이 회장 측이 가장 원하는 바일 것”이라 전망한다. 이러한 시각 때문인지 최근 번지는 이건희 회장 연내 소환 불가론의 숨겨진 시발점은 바로 삼성일 것이란 지적도 나오는 중이다. 검찰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법원의 정서를 적극 활용하는 한편 허·박 씨 재판과정을 최대한 연기하면서 이 회장의 글로벌 활동을 적극 홍보하는 것이 삼성 법무진의 주요 전략이라는 시각이다.
연말로 예상되는 현대차 정몽구 회장의 1심 판결 결과를 보고 나서 삼성이 형평성 전략을 구사할 것이란 관측도 제기된다. 에버랜드 항소심 결과와 정 회장 1심 결과가 연말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가운데 이들 재판의 결과를 잣대로 이 회장 소환에 대한 여론재판을 받으려 할 것이란 지적이다. 정 회장 구속에 따른 형평성 논란으로 여론의 뭇매를 맞았던 삼성이 이번엔 반대로 정 회장 재판결과를 기준으로 삼아 형평성 논란을 부추겨 이 회장에 대한 처벌의 수위를 낮추거나 아예 기소되는 일조차 없게끔 유도해보겠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재계 일각에선 ‘삼성의 한 핵심 임원의 건강이 악화됐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어차피 건강문제로 임원직에서 물러날 그 인사가 이 회장 대신 십자가를 짊어지고 기소됐다가 적당한 시기에 풀려나고 삼성이 이에 응분의 보상을 한다는 시나리오’마저 거론된다. 물론 미확인 소문을 근거로 한 관측일 뿐이지만 최근 삼성 내 이 회장 소환 연내 불가론이 확산돼 있음을 우회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