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아닌 경찰의 첫 공개 사례, 계획범죄 조사 중…“요건 충족 범죄 모두 신상 공개해야” 형평성 지적도
#강남 모녀 살해범 박학선
서울경찰청은 6월 4일 오후 열린 신상정보공개심의위원회 심의 결과에 따라 박학선(65)의 머그샷과 이름, 나이 등을 공개했다. ‘머그샷 공개법’이 시행된 뒤 검찰이 아닌 경찰이 신상을 공개한 첫 사례다. 수사기관이 중대 범죄 피의자의 얼굴을 강제로 촬영해 공개할 수 있도록 한 머그샷 공개법(중대범죄신상공개법)은 2023년 10월 국회 본회의를 통과해 2024년 1월 25일부터 시행됐다.
이날 심의위원회는 “심의 결과 범행의 잔인성 및 피해의 중대성이 인정되고 범행의 증거가 충분하며 범죄발생으로 인한 국민불안, 유사범행에 대한 예방효과 등 공공의 이익이 있다고 판단돼 피의자 신상정보를 공개하는 것으로 의결했다”고 밝혔다. 경찰 관계자는 신상공개 결정에 박학선이 서면으로 이의 없음을 표시해 오는 7월 3일까지 서울경찰청 홈페이지에 박학선의 신상정보를 공개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박학선은 5월 30일 오후 강남구 대치동의 한 오피스텔 6층 사무실에서 60대 여성 A 씨와 A 씨의 30대 딸 B 씨를 흉기로 살해한 혐의를 받는다. 박학선은 A 씨와 약 6개월 정도 교제하던 사이로, A 씨는 그에게 그만 만나자는 뜻을 전하기 위해 자신의 사무실에서 B 씨와 함께 박학선을 만났다가 변을 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흉기에 찔린 모녀는 심정지 상태로 병원에 이송됐으나 끝내 숨을 거뒀다.
박학선은 범행 뒤 도주했다가 13시간 만인 5월 31일 오전 7시 45분쯤 서초구 남태령역 인근 길가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그는 경찰 추적을 피하기 위해 휴대전화를 끄고, 신용카드 대신 현금을 사용해 대중교통을 갈아타면서 이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전날 사건 현장에서 약 2km 떨어진 한 아파트 공원에서 그가 도주 과정에서 버린 것으로 추정되는 흉기를 발견했다. 박학선은 이번 살인이 현장에 있던 흉기를 휘두른 우발적 범행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대해 오윤성 순천향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박학선이) 우발적 범행이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현장에 있던 흉기를 사용했다고 말했는데, 그 흉기가 사전에 준비된 것인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또한 범행 이후 증거 인멸을 시도했으며, 자수하지 않고 계속 도주했다는 점이 의문스럽다. 계획 범행 여부는 수사기관 조사 이후 밝혀질 사안”이라고 말했다.
서울중앙지법 최민혜 판사는 6월 2일 오후 2시부터 박학선에 대한 구속 전 피의자 심문(영장실질심사)을 한 뒤 “도망할 염려가 있다”며 구속 영장을 발부했다. 박학선은 이날 오후 1시 26분쯤 영장실질심사를 받기 전 호송차에서 내려 ‘이별 통보를 받고 화가 나 범행한 것이 맞느냐’는 취재진 질문에 “(피해자 모녀 가운데 딸이) 신랑에게 전화하는 바람에 범행이 이뤄졌다”고 답했다. 이후 ‘범행 당일 피해자와 어떤 대화를 했느냐’ 등의 질문에는 답을 하지 않고 법원으로 들어섰다.
이번 범행이 예고된 범죄일 가능성도 제기된다. SBS 보도에 따르면 유족은 “헤어지자고 하니까 (박학선이) ‘너 나 그냥 둘이 죽자’, ‘내가 뭐 진짜 못 죽일 것 같냐’고 했다”며 “(A 씨가) 엄청나게 불안을 느껴서 집에도 잘 못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유족은 “(박학선이) 집착이 심했다. 혼인신고와 관련해 B 씨와 트러블이 생겨 B 씨가 박학선을 엄청 싫어했다. 그래서 A 씨는 끙끙 앓으면서도 (박학선의 행동을) 가족들한테 알리지 않았다”고 밝혔다.
#같은 교제살인, 다른 결정?
2024년 강력범죄 피의자의 신상이 공개된 건 박학선의 사례가 세 번째다. 경기북부경찰청은 머그샷 공개법 시행 이전인 1월 경기 고양·양주에서 여성 다방 업주를 잇따라 살해한 혐의를 받는 이영복(57)의 신상을 공개했으며 수원지방검찰청은 4월 이별을 통보한 연인에게 흉기 휘둘러 숨지게 하고 연인의 어머니에게도 중상을 입힌 김레아(26)의 신상을 공개했다.
일각에서는 의대생 살인사건의 피의자 최 아무개 씨(25)와 강남 모녀 살해사건의 피의자 박학선의 신상공개 심의 결과가 다르다는 데 의문을 품는다. 두 사건 모두 이별을 통보한 연인을 상대로 벌인 ‘교제살인’이라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이다. 한 누리꾼은 “의대생이 특권인가”라면서 “똑같은 살인자인데 누구는 신상공개하고 사람 죽인 의대생은 신상공개 안 하는 건 형평에 어긋난 잣대”라고 지적했다.
두 사건에 다른 판단이 나온 이유에는 당시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경로로 피해자 정보가 확산하고 있었던 점, 피의자 신상공개 시 2차 가해를 우려해 피해자 유가족이 신상공개를 거부한 점 등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오윤성 교수는 “두 사건은 피해자의 수만 다르지 거의 모든 게 비슷하다”라면서 “피해자 유족의 요청이 신상공개 심의 요건에 해당하지는 않는다. 향후 심의 결과가 주관적이거나 형평성에 어긋난다는 논란을 피하기 위해 정해진 요건을 충족한 모든 살인 범죄자의 신상을 공개하는 것이 옳다고 본다”고 말했다.
SBS 보도에 따르면 A 씨 유가족은 강력 처벌을 원한다며 울분을 토했다. 박학선이 직접적인 범행동기로 언급한 ‘신랑’이자 최초 신고자인 B 씨의 남편은 박학선의 살해 현장을 직접 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 B 씨의 남편은 “나는 그 사람(박학선)이 변호사를 누구 쓰든 두 명이나 죽였는데 그냥 쉽게 풀려나는 걸 별로 원치 않는다. 뉴스에서 좀 크게 얘기해달라”고 강조했다.
한편 교제폭력이 살인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잇따라 발생하면서 교제폭력 예방 대책이 시급하다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A 씨 유가족에 따르면 박학선이 평소 화가 나면 A 씨에게 욕설이나 폭언을 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한국데이트폭력연구소는 언어폭력도 교제 폭력으로 분류하고 있다.
국회입법조사처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6월 4일 보고서를 통해 폭력 행위 전에 ‘통제 행위’가 일어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교제폭력’ 등 친밀한 관계에서의 폭력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신체적 폭력이 없어도 통제 행위를 금지하는 입법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통제 행위는 상대방의 일상생활을 감시·비난하고 명령과 지시에 따르게 하는 것,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것 등 행동과 생각을 통제하려는 행위를 말한다.
교제폭력을 막기 위한 법제화 노력은 번번이 국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 21대 국회에서는 권인숙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가정폭력의 정의에 교제 관계를 포함하여 교제폭력 범죄에도 임시조치 등의 피해자보호제도를 적용하게 하는 ‘가정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특례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했지만 법제사법위원회 심사단계에서 3년 동안 계류하다 회기가 종료됐다.
손우현 기자 woohyeon1996@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