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년째 묶인 낙찰하한율 비롯 표준품셈·단가 조정 시급…“장기계속공사 손실구조도 손봐야”
당시 서울시가 처음 책정한 공사비 약 1조 1300억 원은 기획재정부(기재부) 심의 과정에서 약 9930억 원으로 14% 감액돼 2023년 12월 시공사 입찰에 들어갔고, 두 번 연속 유찰됐다. 공사비를 최소 20%는 올려야 한다는 건설업계 목소리에 서울시는 기재부에 공사비 재심의를 신청, 다시 15% 인상해 지난 3월 세 번째 입찰에 나섰다. 다행히 1개 건설사 컨소시엄이 단독 응찰해 사업의 불씨를 되살렸지만 착공과 준공은 약 1년 밀리게 됐다.
이 일은 현재 건설업계에서 정부의 공공 공사비 ‘쥐어짜기’ 관행으로 국민 안전상 시급한 사회기반시설(SOC)마저 착공이 지연된 사례로 흔히 언급된다. 최근 공공이 발주한 공사가 건설사들의 ‘집단 반란’으로 줄줄이 유찰되면서 제대로 된 ‘적정 공사비’ 산정 체계를 수립하라는 건설업계 요구가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지자체)를 거세게 압박하고 있다.
서울대 건설환경종합연구소가 지난 5월 펴낸 ‘공공공사 가격산정 제도 및 주체 혁신방안’ 자료를 보면 공공공사 공사비는 ‘예비타당성조사’ 단계를 출발해 조달청, 기재부, 발주기관을 거쳐 입찰 예정가격(상한가격)이 정해지는 사이 평균 24.63% 감액되고 있다. 착공하기도 전 공사비가 크게 삭감되는 구조다.
공사가 시작되면 예상치 못한 변수를 만나거나 잦은 설계 변경으로 비용이 추가돼 실제 공사비가 입찰 당시 예정가격을 크게 웃도는 상황이 비일비재하다. 한 대형 건설사 임원 출신인 A 씨는 “건설사들이 보통 공공공사에 참여하면서 큰 수익을 기대하지도 않지만, 혹시 사업비에서 10~15% 수익을 낼 것을 기대했다가도 결국 공사비가 훨씬 많이 들어가 적자를 내는 일이 흔하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정부나 지자체의 ‘묻지마식’ 공사비 깎기 관행을 단시간에 끊어내긴 어려울 것으로 보면서도 공사 계획과 설계, 발주, 시공 과정에서 비용 산출에 과학성과 현실성을 보강할 대책을 적극 제시하고 있다.
지난 5월 30일 ‘제4회 건설혁신 정책포럼 서울’에서 ‘지자체 발주 건설사업의 적정공사비 확보방안’을 발표한 홍성호 대한건설정책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적정 공사비 산정 개선’의 3대 핵심 과제로 △직접공사비의 기준이 되는 표준품셈·표준시장단가 현실화 △간접공사비(간접노무비·기타경비) 공사원가 제비율 현실화 △24년째 고정된 낙찰하한율 상향 조정 등을 제시한다.
발주자가 공사비 예정가격을 결정하는 기초자료인 표준품셈(자재비·노무비·장비비·가설비 등을 산출한 정부고시가격)과 표준시장단가(대체 자제 개발에 따른 자재비 하락 등이 반영된 실제 거래 가격)는 실제 비용을 온전히 반영하고 있지 않아 정부의 한 해 공공 공사비가 수조 원씩 감액되고 있는 것으로 진단된다.
적격심사제 등 발주(입찰·낙찰) 단계에서 상향 조정이 요구되는 ‘낙찰하한율(공사 예정가격 대비 낙찰이 가능한 최저 입찰금액의 비율)’은 2000년부터 줄곧 80%대에 고정돼 있는 상태로, 건설사들이 제시하는 입찰가를 전반적으로 끌어내리는 장치가 되고 있다. 업계에서는 낙찰하한율이 현재보다 10%가량 상행돼야 맞다는 요구가 나온다.
한편 총사업비 산정 시 물가상승분을 반영하기 위해 각종 지수를 적용하는 방식도 개선이 요구된다. 현재는 정부의 ‘총사업비 관리지침’상 물가상승분을 계산할 때 ‘건설공사비지수’와 ‘GDP 디플레이터 지수(가격 변동 영향을 제거하기 위한 지수)’ 중 증가율이 낮은 지수를 적용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건설물가 변동 폭이 현실 수준보다 낮게 반영되는 문제가 있어 두 지수를 동시에 복합 적용하는 체계를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업계에선 전체 공사에 수년이 걸리는 ‘장기계속계약’ 공사의 사업비 지급 방식도 유연성 보강이 필요하다. 장기계속계약은 사업비 총액으로 입찰한 뒤 그 한도 내에서 매년 계약을 체결하며 공사를 이행하는 형태로, 공사 기간 연장 시 발생하는 간접비용 등의 부담이 보통 시공사에 전가된다.
전영준 한국건설산업연구원 미래산업정책연구실장은 “현재 발주되는 대형 공사들이 대부분 장기계속계약으로 발주되고 있는데 이들 공사는 당초 계획보다 훨씬 길어질 가능성이 있음에도 시공사업자가 손실위험을 상당 부분 떠안아야 해 부담이 크다”고 지적했다. 홍록희 한양대 부동산융합대학원 겸임교수는 “연 단위 형태로 장기간 공사를 하거나 운영을 맡아야 하는 건에 대해서는 공사비나 유지비를 탄력적으로 올려주는 등 손실을 보전해주는 체계가 수립돼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3월 28일 발표한 ‘공공공사 적정공사비 반영 전략’에서 현재 일률 적용 중인 직접공사비 보정기준을 각 사업의 시공 여건에 맞게 세분화하겠다고 밝혔다. 또 유형별 공사비 분석 대상을 토목 분야로도 확대해 도로나 항만 등 주요 토목 구조물에 대한 적정 공사비를 책정할 계획도 밝혔다.
물가 상승분이 공사비에 적정하게 반영될 수 있도록 기준을 조정하고, 건설공사비지수와 GDP디플레이터 등 지수를 적용하는 방안도 마련할 계획이다. 공공공사를 계획했다가 발주(입찰)가 늦어지거나 응찰자가 없어 유찰될 경우 발주기관이 총사업비를 자율 조정할 수 있도록 관련 제도를 정비하기로 했다.
이를 위해 정부는 지난 5월 ‘공공공사 공사비 현실화 연구용역’을 발주해 최근 한국조달연구원·한국건설산업연구원·한국건설기술연구원 컨소시엄을 낙찰자로 선정했다. 연구용역에서는 직접·간접공사비에 현실 건설자재·인력 물가를 반영할 방안, 최근 유찰이 잇따른 기술형입찰의 물가 보정 시점을 조정하는 방안 등이 제시될 전망이다.
홍성호 선임연구위원은 “지금까지는 정부가 보통 공공공사와 관련해 직접공사비와 간접공사비, 낙찰하한율 등 세 요소 중 한 가지만 손을 대는 접근이었다”며 “이 세 가지 요소를 종합적으로 해결하지 않는 한 현재의 ‘적정 공사비’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했다.
홍록희 겸임교수는 “대형 공공 SOC 사업은 건설사가 단순히 건설만 해서 정부·지자체에 넘기는 형태가 아닌, 민간기업들과 SPC(특수목적법인), PFV(프로젝트금융투자회사) 등을 구성해 시공 뒤 일정 기간 운영까지 하다 넘겨주는 유형도 많아지고 있다”며 “정말 중요한 프로젝트사업이라면 최소한 건설사들이 손실을 보지 않도록 보장해 줘야 건설사들이 부족한 공공 예산분에 대해 민간투자자라도 끌어오는 등 역할을 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서울대 건설환경종합연구소는 “미국의 국가건설목표(NCG)와 같이 생산성 혁신의 기준이 될 값을 정부와 공공 발주기관, 기업체가 보유한 실적 데이터를 공유해 서로 공감할 수 있는 합의된 기준값을 설정해야 한다”며 “국가재정법과 국가계약법 개정, 총사업비관리지침 개정도 시급한 상태”라고 강조했다.
이강훈 기자 ygh@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