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 가는 한국의 미 알리기 <58>
▲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신선로는 열구자탕(悅口子湯)이라고도 불렸다. ‘입을 즐겁게 하는 탕’이다. 예로부터 가장 고급스러운 음식의 대명사로 불렸다. 고급스런 재료를 썼고, 정성을 많이 들여야 했던 까닭이다. 그래서 귀한 손님을 대접하는 데는 으뜸으로 여겼다.
그래서인지 신선로는 우리나라의 대표 음식으로 받아들여졌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국빈이 와서 식사 대접을 하게 되면 마지막에 1인 신선로가 등장한다. 해외에 소개하는 대표 음식으로 김치, 불고기와 더불어 신선로가 빠지지 않는다. 국내에 체류하고 있는 외국 대사의 부인들은 한국에 대해 많이 이해하고 있다는 증표로 ‘신선로’ 요리를 한다.
▲ 해물신선로 |
혹자는 신선로가 우리 음식이 아니라고 주장할지 모른다. 대통령 의전을 담당하는 한 의전관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을 순방하면서 거기서도 신선로가 들어오는 것을 보고 놀랐다고 한다. 명나라나 청나라의 영향을 받은 곳에서는 모두 신선로를 먹는다고 한다.
실제로 최남선은 <조선상식문답>에서 신선로는 중국 음식 훠궈르(火鍋兒)에서 왔다고 썼다. 신선로와 똑같이 그릇 한 가운데 숯불을 피우고 그 둘레에 국을 끓여 고기, 생선, 채소를 익혀먹는 풍속이 있었다고 적었다.
하지만 우리의 신선로는 이름부터 다르다. 신선로가 왜 그런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소대기년(昭代紀年, 조선 건국 초부터 숙종까지의 사실(史實)을 수록한 사서(史書). 영조와 정조대에 편찬된 것으로 추측)을 근거로 쫓아가 보자. 여기에는 신선로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가 숨겨져 있다.
정희량은 연산군 때 사람이다. 시문(詩文)에 능하고 음양학(陰陽學)에 밝아 자기의 수명을 계산하고 속세를 피해 은둔할 생각을 가졌다. 무오사화에 의주로 귀양을 갔다가 풀려났지만 무오년보다 더 심한 화가 갑자년에 올 것이라 말하고 사라졌다. 단오날 집을 나갔는데 돌아오지 않았고, 물가에 짚신 한 켤레와 관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러나 희량은 죽은 것이 아니라 중이 되어 방랑했다. 이름은 이천년으로 바꿨다. 어느 날 퇴계 이황이 산중에 들어가 주역을 읽을 때 한 노승이 곁에서 구두법이 틀렸음을 정정해주었다. 이황은 그가 희량임을 알아보고 그에게 ‘어찌 세상에 다시 나가지 않는지’를 물었다. 희량은 그동안의 불효와 불충 때문에 세상에 다시 나갈 면목이 없다고 대답하고는 종적을 감췄다. 그의 행실에는 신선의 풍이 있었다. 그는 수화기제(水火旣濟, 주역에서 수(水)와 화(火)의 오행이 균형이 잡혀서 길한 상태를 조성하고 있는 것)의 이치로 노(爐)를 만들고 거기에 채소를 넣어 끓여 먹었다. 그가 죽은 뒤에 세상 사람들이 그 화로를 신선로라 일컬었다.
▲ 면신선로 |
1940년 서울 수표동에서 굴비·젓갈·장아찌 등의 반찬가게를 하면서 <조선요리학>이라는 책을 썼던 홍선표 선생은 신선로를 세계에 내놓을 만한 자랑스러운 우리 음식이라고 칭찬했다. 그릇도 이상적이고, 운반하기 편리하며, 음식의 배열이 미적 감각을 갖추어서 외국 사람에게 자랑할 만하다고 주장했다.
당시에는 신선로 요리법이 성행했다. 일반 가정에서도 사랑받았다는 증표다. 1931년 동아일보에는 ‘꼭 알아둘 이달의 요리법’으로 신선로 요리가 등장한다. 1932년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도 신선로 요리법이 등장했다.
우리의 삶과 음식문화와 이야기가 담겨 있는 신선로가 다시 보통사람의 음식문화로 자리잡을 수 있을까? 쉽지는 않다. 신선로를 구하기가 쉽지 않고, 음식 만드는 데 손이 많이 가기 때문이다. 서구식으로 바뀐 우리의 생활문화 속에서 신선로는 어울리지 못한다. 하지만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신선로가 세계에 내놓는 우리의 대표 음식이라면 우리의 삶과 문화 안에서 계속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