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장 번복·소속팀 뒤로 한 선택·무너진 프로세스 복합 작용…국내 감독 선임에도 부정적 여론
#지지부진한 선임 과정
지난 6일 대한축구협회는 홍명보 감독의 국가대표 사령탑 '내정' 소식을 알렸다. 내정은 곧 '선임'이 됐다. 막판 감독 선임 작업을 주도했던 이임생 협회 기술총괄이사가 브리핑을 하면서다.
지난 2월 위르겐 클린스만 감독 경질 이후 감독 공백이 길었던 대표팀이다. 그사이 A매치 4경기를 치르는 동안에도 협회는 감독을 찾지 못했다. 두 명(황선홍·김도훈)의 임시감독이 팀을 이끌었다.
협회는 그동안 감독 선임에 어려움을 겪어왔다. 클린스만 감독 경질 이후 정해성 위원장이 새 감독 선임 임무를 맡았다. 10명으로 구성된 위원회도 새롭게 꾸려져 새 감독을 찾았다.
이전의 감독 선임 작업이 그랬듯 숱한 국내외 감독들의 이름이 언급됐다. 미국 출신으로 프리미어리그 리즈 유나이티드 감독을 역임한 제시 마시 선임이 유력해 보였으나 곧 캐나다 국가대표팀 감독이 됐다는 발표가 났다.
지지부진하던 감독 선임 작업은 6개월 차에 들어서야 마무리됐다. 당초 또 다른 해외 감독이 유력 후보로 지목됐다. 이임생 이사가 협상을 위해 유럽 출장을 떠난다는 소식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의 발표는 홍명보 감독이었다.
#반발 나오는 이유
홍명보 감독은 2021년부터 울산 HD 구단을 이끌고 있는 현직 감독이다. 축구협회가 홍 감독을 국가대표 사령탑으로 지목하고 본인이 이를 받아들이면서 구단은 날벼락을 맞게 됐다.
울산은 지난 2시즌 연속 K리그1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리고 3연패에 도전하고 있다. 유독 상위권 경쟁이 치열한 시즌을 치르고 있다. 하반기부터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에도 참가한다. 2025년 6월에는 전 세계 32개 구단이 참가하는 국제축구연맹(FIFA) 클럽월드컵에도 나선다. 시즌을 한창 치르는 시점이며 중요한 대회들을 앞두고 있다. 팀을 이끄는 사령탑의 이탈은 구단으로서 예상치 못한 악재다.
울산은 유독 홍명복 감독의 색채가 짙은 팀이다. 3년 반이라는 적지 않은 기간 팀을 이끌어왔다. 이 기간 동안 자신의 입맛에 맞는 선수들을 팀에 데려왔다. 10여 년 전 연령별 대표팀과 A대표팀 감독 재직 당시 인연이 깊은 '홍명보의 아이들'로 불리는 선수 다수가 울산 유니폼을 입고 있다. 홍 감독의 존재감이 이들의 선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보니 홍 감독 이탈 이후 팀이 흔들릴 수도 있는 상황에 놓이고 말았다.
울산 팬들의 반응은 뜨거웠다. 선임 소식 직후 울산 서포터는 자신들의 채널을 통해 "팬들에게 큰 상처를 입힌 이 결정을 강력히 규탄한다"며 "축구협회 선택의 결말은 실패할 것임이 자명한 사실이며 결과를 거둔다 해도 그것은 구단과 팬들의 일방적인 희생의 대가로 만들어낸 결과임을 잊지 않길 바란다"는 저주에 가까운 입장을 냈다.
울산 팬들은 홈경기에서도 적극적으로 부정적인 목소리를 냈다. 경기장에는 홍 감독을 비판하는 수많은 걸개가 나부꼈다. 경기 중은 물론이고 종료 이후에는 '홍명보 나가'라는 외침이 울려 퍼지기도 했다.
반발이 유독 큰 이유는 홍명보 감독의 태도 변화 때문이다. 홍 감독은 감독 선임 과정에서 자신의 이름이 거론될 때마다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7월 5일 울산 경기를 마치고서도 "팬들은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틀 뒤 팬들은 내정 소식을 접했다.
국내 감독 선임이라는 면에서도 반발의 목소리가 나온다. 이전까지 숱한 해외 감독들의 이름이 거론됐고 실제 선임이 유력해 보이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나라 대표팀 감독직에 먼저 관심을 보인 감독도 여럿이었다.
한 축구인은 해외 감독 선임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바람직한 현상인지는 모르겠지만 현재 국가대표팀에 국내 감독이 어울리는 것 같지 않다"며 "유럽 톱클래스 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이 많아졌다. 선수도 전술, 훈련 등을 두고 감독을 평가하는 시대다. 국내 감독으로 이들을 만족시키기 어렵다. 과거 선수들이 협회에 '좋은 외국인 감독을 선임해 달라'는 요청을 했다고 하지 않나"라고 말했다.
2022 카타르 월드컵에서 16강 진출을 이끌었던 파울루 벤투 감독은 선수단 내 만족도가 높았던 지도자였다. 벤투 감독이 지향하는 축구의 방향, 훈련 프로그램에 대해 선수들의 긍정적 평가가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외부에서 나오는 전술적 비판에도 선수들은 벤투 감독의 전술을 비호했다.
홍명보 감독의 선임이 확정된 뒤 그 과정에서 문제가 있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벤투 감독 선임 당시 '프로세스'를 강조했던 축구협회다. 이후 클린스만·홍명보 감독 선임에서는 이 같은 프로세스가 무너진 듯한 모습이다. 내부 평가 과정은 있었으나 홍 감독은 면접을 치르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함께 후보에 올랐던 외국인 감독은 수십 장의 프레젠테이션까지 준비했다고 한다. 막판 작업을 주도한 이임생 이사와 홍 감독의 만남은 면접이 아닌 '면담' 수준이었다.
#내부자 폭로
이임생 이사가 홍명보 감독의 선임을 발표한 7월 8일, 전력강화위원회에 참여했던 박주호 위원은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 영상 하나를 공개했다. 전력강화위에 참여한 소회 등을 밝히는 내용이었다.
51분의 영상에서 박주호 위원은 전력강화위원회 소집 초기부터 홍명보 감독 선임까지 과정을 비교적 자세히 공개했다. 지난 5월 제시 마시 감독 선임이 실현되는 줄 알았으나 결국 무산되며 좌절했고 이후로 혼란이 있었다고 전했다. 공교롭게도 녹화 도중 홍 감독 내정 소식이 발표됐고 적지 않게 놀라는 표정을 짓기도 했다. 자신은 홍 감독 선임을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일부 전력강화위원, 축구협회 등을 향한 불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홍명보 감독 선임이 의외라며 "결국은 협회가 정한 것이다. 이러면 전력강화위를 꾸릴 필요가 없다"고 지적했다. 또 전력강화위원 일부가 회의 내용을 유출하거나 공석이 된 연령별 대표팀 감독 자리를 노리는 등 '사심'을 채우려 했던 모습을 꼬집기도 했다.
박주호 위원의 이 같은 '폭로'는 홍명보 감독 선임에 부정적이던 여론에 기름을 부었다. 다시 한 번 축구협회와 수장 정몽규 협회장에 대한 비토가 쏟아졌다. 이후 전국 각지에서 열린 K리그 경기 중 일부 구장에서는 정 회장을 규탄하는 팬들의 외침이 있기도 했다. 서로 적으로 싸우는 양 팀 팬들이 한 목소리로 구호를 외치는 보기 드문 광경도 펼쳐졌다.
축구협회 정관이 문제로 지목됐다. 전력강화위에는 실질적 권한이 많지 않다. 2021년 협회는 정관을 개정해 전력강화위에서 새 감독 후보와 협상 권한도 빼앗았다. 이번 감독 선임 과정에서 전력강화위는 감독 후보군을 추리고 추천만 할 뿐 직접적인 협상은 협회 이사회가 나섰다. 유력 후보였던 제시 마시 감독과 인연을 맺지 못한 배경도 이 같은 문제가 있었던 것으로 해석된다. 김판곤 전 위원장이 주도했던 벤투 감독 선임 당시와 달랐다. 이에 '결국은 협회 고위층 입맛에 따라 감독이 결정되는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나를 버렸다" 홍명보 감독의 해명
이임생 이사가 브리핑을 열었던 8일, 이미 큰 줄기는 결정이 됐다. 곧 홍명보 감독 선임이 공식 발표됐다. 당일 울산 구단에서도 홍 감독의 퇴단이 결정됐음을 알렸다. 다만 내정 발표 이틀 전까지 단호한 모습을 보이던 홍 감독의 마음이 갑작스레 움직인 이유가 미스터리였다. 홍 감독의 입에 많은 눈길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10일 저녁, 울산은 홈경기가 예정돼 있었다. K리그 감독이라면 경기 전후로 미디어 앞에 서는 것이 의무이기에 어떤 형태로든 대표팀 관련 언급을 피하기 힘들었다. 경기 전 인터뷰에서 "경기에 집중하고 싶다"고 요청한 그는 광주 FC를 상대로 0-1로 패한 경기를 마치고 나서야 자신의 심경을 밝혔다.
그는 이전까지 부정적인 견해를 밝혔던 대로 "대표팀에 가고 싶지 않았다"고 말했다. 5일 밤 이임생 이사를 만나고도 마음은 변하지 않았으나 그의 이야기를 듣고 잠을 이루지 못하도록 고민이 많았다고 전했다.
그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대한축구협회의 계획이었다. 최근 협회는 이임생 이사를 필두로 '기술철학'을 발표한 바 있다. 한국 축구만의 스타일을 찾아야 한다는 필요성을 느끼고 '빠르고, 용맹하게, 주도하는'이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이는 A대표팀은 물론 연령별 대표와도 연계하겠다는 계획이었다. 이 이사는 이 같은 기술 철학에 대해 설명했고 홍 감독은 이를 실행하는 일에 마음이 움직였다고 말했다.
그는 "잠을 못 자면서 생각했는데 나는 나를 버렸다. 이제 나는 없다. 대한민국 축구밖에 없다"면서 결의를 표현했다. 그러면서 울산 구단과 팬들에 대해서는 "얼마 전까지 응원의 구호였는데 오늘은 야유가 나왔다. 너무 죄송하다. 드릴 말씀이 없다"고 말했다.
홍명보 감독과 개인적 인연이 있는 한 축구인은 "홍 감독이 과거 대표팀에서 상처가 있지 않나. 만회하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울산에서 만족하고 있었지만 한편에는 그런 마음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이번이 그 기회라고 판단한 것 같다"고 말했다.
김상래 기자 scourg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