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옮길 땐 세 수 앞은 봐야…
▲ 왼쪽부터 ㈜LG로 간 감쌍수 전 LG전자 부회장, 구본무 회장, LG상사로 간 구본준 전 LG필립스LCD 부회장. | ||
구본무 회장은 올 초 재계 3위 자리마저 SK에 빼앗겨 버린 이후 현장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을 독려하는 등 절치부심해왔지만 올 한 해 주력 계열사들이 하나같이 죽을 쑤는 것을 지켜봐야 했다. 그 결과 구 회장이 그동안 ‘인화’로 대변돼 온 LG그룹의 인사 형태를 실적 위주로 바꾸는 ‘칼’을 빼든 것이라는 지적이다.
그러나 실적 저조에 따른 인사조치로 단정하긴 어렵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LG를 대표해온 스타 CEO들의 자리 이동을 통한 구 회장만의 노림수가 있을 것이란 관측이 대두되는 것이다.
지난 12월 18일 LG그룹 임원 인사발표에서 가장 눈에 띈 것은 LG전자 CEO 교체였다. LG그룹의 대표적인 스타 CEO인 김쌍수 LG전자 부회장이 그룹의 지주회사인 ㈜LG로 발령받으면서 사실상 LG전자 경영일선에서 물러나게 된 것이다. ‘불도저’로 불리며 3년간 LG전자를 추진력 있게 이끌어온 김 부회장이 LG전자를 떠나게 된 배경엔 실적 부진에 따른 문책성 경질이라는 해석이 뒤따르고 있다. LG전자의 2004년 순이익은 1조 5500억 원이었는데 이듬해인 2005년 7030억 원으로 반토막났다. 올해 또한 지난해 이익의 절반 수준으로 급감할 것이란 전망이 흘러나오고 있다.
김쌍수 부회장과 더불어 LG그룹을 대표해온 스타 CEO 노기호 전 사장이 지난해 말 LG화학 사장직에서 물러나게 된 것도 실적 저조 때문이었다. 이번에 CEO가 교체된 LG전자와 더불어 LG화학은 LG그룹에서 가장 덩치가 큰 ‘핵심 계열사’다. LG전자와 LG화학의 매출을 합하면 31조 2000억 원이다. LG그룹 전체 매출액이 58조 7000억 원임을 감안하면 이 두 계열사가 그룹 전체 매출의 절반 이상을 담당해온 것이다.
LG의 주력 계열사 중 하나인 LG필립스LCD 또한 물갈이 대상에 오르게 됐다. 박기선 사장이 실적 부진 이유로 물러나게 됐으며 구본무 회장 친동생인 구본준 LG필립스LCD (LPL) 부회장이 LG상사로 자리를 옮기게 됐다. LPL은 올해 들어 지난 3분기까지 약 8000억 원의 영업적자를 기록했다.
LPL은 LG가 반도체 매각 이후 최대 규모의 투자를 감행한 그룹의 미래 수익원이었다. 하지만 파트너인 필립스가 지분 매각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매출 부진과 더불어 새로운 파트너 확보라는 점에서 LG에게 큰 부담이 되고 있다. 삼성의 경우 S-LCD의 공동출자자인 소니가 안정적인 빅바이어 노릇을 하고 있다. LPL은 공동 투자자이자 바이어인 필립스가 빠져나가겠다고 선언을 해버리는 바람에 LG가 난처한 입장에 빠진 것이다.
LG그룹의 이번 인사 배경을 두고 몇몇 재계 호사가들은 그룹의 근간을 이루는 핵심 계열사들의 실적 부진 문책과 분위기 쇄신 목적에만 그치지 않는 것으로 보고 있다. LG그룹 내 구본무 회장의 친정체제를 강화하기 위한 수순이란 시각이 퍼지고 있는 것이다.
김쌍수 부회장 인사는 구자경 LG 명예회장과 아들인 구본무 LG 회장, 그리고 김쌍수 부회장과 이번에 새로 LG전자 경영을 맡게 된 남용 부회장이 모인 자리에서 결정됐다는 후문이다. 김 부회장은 지난 2003년 10월 LG전자 부회장직에 오르면서 그동안 LG그룹의 얼굴마담과도 같은 대표적인 CEO였다. 재계 인사들은 삼성그룹을 두고 “삼성 총수일가도 함부로 못할 만큼 이학수 부회장의 권력이 비대해졌다”는 이야기를 곧잘 한다. 이와 같은 맥락으로 재계에선 “김쌍수 부회장의 입지가 더 커지기 전에 교체될 가능성이 있다”는 소문이 꾸준히 나돌아왔으며 그 후임으로 종종 거론돼온 인사가 이번에 LG전자를 맡은 남용 부회장이다.
▲ LG전자를 맡은 남용 부회장. | ||
구본준 부회장이 LG필립스LCD에서 LG상사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도 재계 인사들은 실적부진에 따른 문책 이상의 의미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친동생이라도 손댈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 전달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구본준 부회장은 구 회장의 다른 동생들과는 그룹 내 위상에서 차이가 난다. 구 회장 바로 아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은 이미 LG에서 분가된 상태다. LG는 구인회 창업주 때부터 철저하게 장자 승계 원칙을 고수해왔으며 걸림돌이 될 우려가 있는 형제들은 일정 지분과 법인을 떼어 줘서 분가시켜왔다.
구본준 부회장은 LG그룹 지배구조에서 그 위상을 가늠케 하는 ㈜LG 지분을 7.56% 확보하고 있다. 구본무 회장(10.51%)에 이은 2대 주주이며 친형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4.90%)이나 구 회장 부인 김영식 씨(4.30%) 그리고 LG가의 장손인 구광모 씨(2.83%)보다 앞선다.
구 부회장은 올해에만 ㈜LG 지분 9만 9000주를 늘려 그룹 내 입지를 과시하기도 했다. 이런 구 부회장이 주력계열사인 LG필립스LCD에서 얼마 전 계열분리를 통해 규모가 축소된 LG상사로 옮기는 것을 두고 말이 많을 수밖에 없다.
구본무 회장 바로 아래 동생인 구본능 희성그룹 회장이 LG에서 떨어져 나간 사실과 연관시키는 분석도 있다. 구본무 회장은 동생인 구본능 회장의 맏아들인 광모 씨를 호적에 올려 장자로서 대를 잇게 한 바 있다. 따라서 그룹 내 입지가 강화된 구본준 부회장의 LG상사행을 ‘LG그룹 내 구본무 회장 친정체제 강화 포석’으로 해석하는 동시에 장자에 대한 ‘안정적 그룹 경영권 승계를 위한 수순 밟기’라고 보는 것이다.
기러기떼가 날아오를 때 V자 편대를 짓는 것을 안항(雁行)이라고 한다. 남자 자손이 많은 LG그룹은 세대별로 기러기떼처럼 편대비행을 했다. LG가의 규칙은 세대별로 편대를 꾸린다는 점, 그리고 편대의 정점에 선 선장 자리를 돌려가며 맡지 않는다는 점이다. 형제끼리 돌아가며 좌장(그룹 총수)자리를 맡는 금호나 두산가와는 다르다.
구자경 명예회장이 회장으로 편대의 정점에 섰을 때 ‘자(滋)’자 돌림 형제는 외곽을 함께 날다가 구자경 명예회장의 경영일선 퇴진과 함께 분가했다. 때문에 이번 구본준 부회장의 인사를 두고 3세대 편대비행의 좌장 자리를 더욱 뾰족하게 해주는 ‘3세대 체제의 완성-4세대 체제의 준비’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