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 ‘사고’ 아닌 ‘명백한 범죄’로 보고 수사 속도 내…급발진 주장은 거짓 단정
경찰은 16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이번 사건을 '중대 범죄'로 규정했다. 그만큼 사회적 관심도 높아진 상황이라 여느 때보다 신속히 수사를 마무리짓겠다는 의지가 뚜렷하다. 이미 운전자 과실을 입증할 단서들도 확보한 상태다. 다만 피의자가 일관되게 내세우는 '급발진' 주장을 무너트릴 '한방'을 만들어야 한다는 과제는 남아 있다.
#경찰, 급발진 주장 거짓 단정 분위기
시청역 역주행 사고를 수사하는 서울 남대문경찰서는 7월 24일 운전자 차 아무개 씨(68)의 구속영장을 신청하면서 "범죄의 중대성과 그간 수사 내용을 종합한 결정"이라며 "곧 사건 송치 시점이 되면 자세한 결과를 발표하겠다"고 밝혔다.
앞서 경찰은 7월 3일에도 차 씨 체포영장을 신청했으나 하루 만에 기각된 바 있다. 당시 서울중앙지법은 "차 씨가 출석에 응하지 않을 이유가 확인되지 않아 체포의 필요성을 단정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경찰로선 한 차례 고배를 마셨던 셈인데 이번 구속영장 신청에선 자신감이 역력했다. 기존에 사용해온 ‘사고’ 표현을 ‘범죄’로 바꿨고, ‘송치 시점’까지 언급했다. 해당 사건을 명백한 범죄로 보고 검찰에 넘기겠단 방침을 사실상 공표했다는 의미다.
경찰은 차 씨의 '차량 급발진' 주장을 이미 거짓으로 단정한 분위기다. 차량에 결함이 없었다는 사실이 상당 부분 확인된 가운데, 그가 3차례 진행된 조사 내내 거짓 진술로 일관하며 과실을 인정하지 않아 구속 수사가 필요하단 시각이다. 법원은 증거인멸 혹은 도주 우려가 있을 때 구속영장을 발부한다.
경찰의 이 같은 판단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국과수)이 최근 통지한 감식 결과 영향이 컸다. 이에 따르면 차 씨는 사고 당시 가속페달(액셀)을 90% 이상 밟았다고 추정된다. 급발진이었더라면 당연히 밟았어야 할 브레이크는 밟은 흔적이 거의 발견되지 않았다.
국과수는 차량, 블랙박스, 사고기록장치(EDR) 3가지를 주로 들여다봤다. 3D 스캐너 등을 활용한 현장 채증도 진행했다. 통상 두 달 가까이 걸리는 조사지만 이번엔 불과 한 달 만에 결과가 나와 경찰 내부에서도 놀라는 분위기였다고 한다. 단, 국과수는 사고 당시 CC(폐쇄회로)TV에서 브레이크 전등이 켜진 듯 비친 장면은 확실치 않다며 판단을 보류했다. 가로등이나 건물의 빛이 반사돼 보이는 난반사나 플리커 현상일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조지호 서울경찰청장은 최근 기자들과 가진 정례간담회에서 "앞으로 추가 조사를 통해 운전자 진술을 더 확보해야겠지만, 사실관계에 한해선 수사할 게 없을 듯하다"고 말했다. 적어도 사고 원인이 급발진은 아닐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뜻이다.
#급발진 문제 아냐…'왜 액셀 밟았나' 미궁
물론 아직은 무엇도 확신할 수 없다. 조 청장 역시 이날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고 있다"며 여지는 남겼다. 1%의 가능성이나마 급발진 정황이 뒤늦게 파악될 수 있다는 의미다.
이에 경찰로선 급발진 여부와 별개로 사고 핵심 원인이 운전자 과실임을 입증하는 게 우선 과제로 꼽힌다. 차 씨는 경찰 조사에서 "일방통행인 줄 몰랐다"고도 진술했다. 즉, 차 씨 주장대로라면 급발진한 차량을 몰고 실수로 역주행을 한 셈이다. 경찰은 이 같은 입장을 전부 받아들이더라도 왜 액셀을 90% 이상 밟았는지 추궁할 전망이다. 급발진이든 역주행이든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상황에 액셀을 밟았다는 사실이 상식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일각에선 버스기사인 차 씨가 사고를 낸 승용차 액셀·브레이크 모양이 평소 몰던 버스와 비슷해 이를 착각했을 가능성도 거론한다. 그렇지만 이는 신빙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일반적인 운전자들이 차량의 액셀 및 브레이크 등을 밟을 때 모양을 확인하진 않아서다. 특히 차 씨는 20년 경력의 베테랑 운전기사로서 큰 사고를 일으킨 적도 없다.
버스기사들 사이에서도 이 가능성은 낮게 보는 분위기다. 일요신문이 만난 버스기사들은 "애초에 버스와 승용차는 브레이크와 액셀 위치가 같기 때문에 모양이 다르다고 헷갈리진 않을 듯하다"고 입을 모았다(관련기사 '시청역 참사' 현직 버스 기사 분석 글에 대한 시내버스 기사들 반응).
일각에선 차 씨가 되레 자신의 운전 실력을 과신해 액셀을 밟았다는 분석을 내놓는다. 그가 실수로 진입했다는 웨스틴조선호텔 앞 4차선 도로는 직선 구간이 145m에 불과하다. 길지 않은 거리다 보니, 차라리 속력을 높여 빠르게 도로를 빠져나가려 시도했을 가능성이다. 실제 차 씨가 마주 오는 차량과 가드레일 등과 충돌한 지점은 큰 길을 코앞에 둔 끝 구간이었다.
차 씨는 수도권 한 요양병원에 입원해 있는 상태다. 그는 사고 충격으로 갈비뼈가 골절돼 수술 후 입원 중으로, 갈비뼈 일부가 폐를 찔러 피가 고여 있는 상태로 전치 8주 진단을 받았다. 사건을 수사하는 남대문서 관계자는 "피의자가 계속 통증을 호소하며 진술이 어렵다고 토로한다"며 "앞으로 더 조사해야 할 내용이 많아 호전 상태나 경과 등을 지켜보고 조사를 이어나갈 계획"이라고 전했다.
#재발 막을 '페달 블랙박스' 의무화 가능성
이번 사고로 발생한 사상자는 16명이다. 사망자는 9명으로 하나같이 평범한 시민이었다. 서울시 공무원(2명), 승진을 기념한 은행원(4명), 병원 용역업체 직원(3명)으로서 모두 30~50대 남성들이다.
차 씨가 가입한 DB손해보험은 사고대책본부를 꾸려 피해 보상 절차에 나섰다. 피해 보상금이 최대 100억 원에 달할 수 있다는 관측도 나왔으나, DB손보는 "사실무근"이라는 입장이다. DB손보 측은 "아직은 정확한 보험금 규모를 정하지 못했다"며 "최대한 피해자 보상에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한편 이번 사건을 계기로 제도 변화를 촉구하는 목소리도 강하게 일었다. 차량 급발진이나 페달 오조작 여부 등을 가려내는 데 도움이 될 '페달 블랙박스' 설치를 의무화해야 한다는 요구가 나왔다. 페달 블랙박스는 브레이크 페달, 가속 페달 등 부분을 녹화해 운전자가 언제 어떤 페달을 밟았는지 확인할 수 있도록 하는 영상기록장치다.
이에 정부는 자동차 제조사가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면 자발적 시정조치(리콜) 과징금을 최대 75% 감경하는 자동차관리법 시행령 개정안을 지난 7월 23일 국무회의에서 통과시켰다. 다만, 완성차 업계에서 "사고기록장치(EDR) 등으로 사고 원인을 분석할 수 있고, 페달 블랙박스를 설치하려면 자동차 설계를 변경해야 한다"는 등 이유로 부정적 분위기가 지배적이라 실현 가능성은 미지수다.
주현웅 기자 chescol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