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아르 특화형’ 배우가 ‘로코킹’이 되기까지 “제 자신도 확신 없었던 연기, 사랑 받을 줄 몰랐죠”
“제가 그동안 어두운 것들을 너무 많이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밝은 작품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더라고요. 그런 작품들이 잘 들어오지 않았지만요(웃음). 그러다 딱 하나 들어온 게 ‘놀아주는 여자’ 대본이었어요. 보자마자 너무 무해하고 귀여운 거예요. 사실 감독님이 첫 미팅 때 제게 출연 제안을 주셨는데 저도 하루 이틀 정도 고민을 해야 했어요. ‘내가 이걸 할 수 있을까, 중간도 없이 갑자기 밝은 게 너무 훅하고 들어오는 거 아닌가’(웃음). 하지만 그만큼 도전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었죠.”
영화 ‘밀정’(2016)의 하시모토, ‘낙원의 밤’(2021)의 박태구, 드라마 ‘구해줘 2’의 김민철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저음과 쉽게 잊을 수 없는 인상으로 강렬한 색채의 캐릭터를 주로 맡아왔던 엄태구였다. 스스로도 ‘누아르 특화형 배우’였음을 인정했던 만큼 그가 선택한 엄태구 연기 인생 최초의 로코 드라마라는 점에서 JTBC 수목드라마 ‘놀아주는 여자’는 대중들의 호기심을 끌 수밖에 없었다.
호기심이 흥미로, 흥미가 기다림으로, 기다림이 설렘으로, 그리고 설렘이 만족으로 이어지기까지는 그렇게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런 대중들의 사랑을 발판으로 엄태구는 드라마/비드라마 전체 출연자 화제성 부문에서 5주 연속 1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여기에 더해 그의 연기 인생엔 결코(?) 없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수식어, ‘로코 킹’까지 안게 됐으니 이래저래 겹경사가 아닐 수 없었다.
“정말 감사한 마음이 한가득이에요. 사실 촬영하면서 제 자신도 시청자 분들께 어떻게 보일지 확신이 없었고 두렵기도 했는데 너무 좋게 봐주셔서 그 응원에 힘을 많이 얻었죠. 가족 중에선 저희 어머니가 많이 좋아해 주셔서 저도 기분이 좋습니다(웃음). 작품과 캐릭터가 밝기도 하고, 제가 TV에 많이 나오니까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저로서도 그 부분이 가장 뿌듯하고요(웃음).”
어두운 과거를 청산한 전직 조폭 큰 형님과 키즈 크리에이터의 반전 충만한 로맨스를 담은 ‘놀아주는 여자’에서 엄태구는 키즈 크리에이터 고은하(한선화 분)에게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드는 큰 형님 서지환 역을 맡았다. 전작에서 보여줬던 거친 모습을 벗고 사랑을 위해 직진하는 다정다감 로맨틱 가이로 변신한 그를 두고 많은 여성 시청자들이 “살아생전 엄태구에게 이런 모습을 볼 수 있을지 몰랐다”며 감탄 가득한 호평을 내놓기도 했다.
물론 이런 호평이 나오기까지 배우 본인이 흘린 피, 땀, 눈물도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역시 내향적인 본인 안에서 외향성을 바닥까지 박박 긁어모아 최대한 끌어올리는 데 있었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다른 작품을 촬영할 때보다 제 자신을 ‘업(Up‧끌어올리기)’ 시켜야 하는 게 있었어요. 제가 평소에 ‘업’돼 있는 사람이 아니다 보니 그 이상으로 ‘업’ 시켜야 하는데 정말 쉽지 않았죠(웃음). 그래도 그 상황에서 제가 맡은 인물의 모습을 만들어야 하니까 최대한 어떻게든 진심으로 하려고, 잘 안 돼도 노력하려 애썼던 기억이 나요. 유독 힘들었던 신을 하나 꼽자면 바람이 부는 장면에서 멋있는 척 하고 등장했던 것. 정말 쉽지 않더라고요(웃음). 그래도 걱정 많이 한 것치곤 잘 나와서 다행이었어요.”
첫 로코에서 합격점을 얻어낸 데엔 엄태구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그의 상대역인 한선화도 큰 몫을 해냈다. 자칫하면 엄태구의 장기인 누아르로 흐르기 쉬운 후반 서사를 한선화는 밝고 명랑한 에너지로 지탱하며 새로운 ‘로코 여신’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히 해냈다. 앞서 OCN 드라마 ‘구해줘 2’에서 한 번 호흡을 맞춰본 덕에 엄태구가 가진 ‘수줍음의 벽’도 한선화의 앞에선 아주 미세하게나마 낮아질 수 있었다는 후일담도 나왔다.
“한선화 씨는 이미 구면이어서 어색함 없이 함께 할 수 있었어요. ‘구해줘 2’때 기억이 너무 좋았기 때문에 ‘놀아주는 여자’ 첫 촬영 때도 그 설렘과 긴장감이 그대로 남아있었죠. 그런데 같이 있을 때 말을 많이 했냐고 하시면(웃음)…. 제가 아무래도 현장에서 말이 많은 편이 아니긴 한데, 그래도 선화 씨랑 같이 있을 땐 하긴 했던 것 같거든요. 그렇게까지 안하지는 않았어요, 문자 오면 답장도 다 꼬박꼬박 했고요(웃음).”
이처럼 배우 본인의 성격과 ‘놀아주는 여자’ 속 연기가 180도 다르다는 점은 작품에 쏟아진 호평의 큰 축이 됐다. 업계 사람들 사이에서 “평생 가야 말 열 마디는 하는지 모르겠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곤 하는 엄태구의 수줍음 많은 성격과 연기 사이의 간극이 수많은 여성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은 덕이다.
최근 tvN 예능 ‘유 퀴즈 온 더 블록’에서 이 같은 ‘샤이 가이’ 면모를 제대로 뽐낸 그를 두고 “연예계 대표 인프피(INFP·내향적인 성격 유형)인 신하균, 구교환, 엄태구 셋이 나오는 예능 프로그램도 한 번 보고 싶다”는 이야기가 대중들 사이에 퍼질 정도였다. 신하균과 구교환이 출연을 결정한다면 자신도 하고 싶다고 웃음을 터뜨리면서도 엄태구는 “제 이런 성격이 사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곤 생각도 못 했다”고 신기해 했다.
“제 성격은 일할 때 굉장히 답답하게 느껴지는 성격이에요. 사람들과 잘 어울릴 수 있으면 연기도 정말 편하게 나올 수 있는데 그러질 못하니까요. 제 스스로도 참 답답하게 여기는 부분이기도 하고요. 그런데 제가 예전에 ‘바퀴 달린 집’에 출연했을 때 많은 분들이 제가 생각한 이 단점을 너무 신기하게도 좋게 봐주시는 것 같아서 놀랐어요. 물론 그걸 전후로 제가 확 바뀌었다거나 이런 건 아닌지만 그 과정 중에 하나로 있는 것 같아요. 억지로 뭘 안 하고 있는 그대로의 모습이 좋은 것일수도 있겠다 라는 생각을 ‘바퀴 달린 집’을 통해 알게 된 거죠. 그렇게 용기 같은 것도 생긴 것 같고요.”
이렇게 용기를 발판으로 우리가 생각하는 ‘엄태구의 모습’을 한 꺼풀 벗어낸 그는 또 다른 ‘로코’를 향해 더더욱 뻔뻔한 연기를 보여줄 준비가 돼 있다며 전에 없던 자신감을 보였다. ‘로코 킹 엄태구’에서 더 나아가 ‘멜로 킹 엄태구’까지 받아들일 준비를, 대중들도 함께 해나가야 할 때가 되지 않았을까. 올 하반기 공개될 디즈니+(플러스) 오리지널 드라마 ‘조명가게’ 이후 2025년부터 엄태구가 새롭게 보여줄 변신에 벌써부터 기대가 모인다.
“제 목표는 촬영할 때 아무리 부끄러워도 진심으로, 진짜처럼 연기하는 거예요. ‘놀아주는 여자’에서도 어떤 장면을 찍을 땐 민망했지만 제 그런 감정은 사실 중요하지 않았어요. 그저 ‘어떻게 해야 진짜로 잘 해낼 수 있을까’만 고민했죠. 방송 볼 땐 처음에만 보기 불편할 뿐이고, 두 번째로 정신 차리고 보면 현장에선 좀 부끄러웠어도 연기에서 진심으로 해낸 것이 보일 때 안심하는 편이에요. 이제 저도 이전에 안 해봤던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 많이 해보고 싶은데…시켜주셔야 할 수 있겠죠(웃음). ‘놀아주는 여자’를 찍어봤으니 저도 다음번엔 더 뻔뻔하게 잘 연기 해볼게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