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 둔화 우려 속 ‘주요 변수’ 이란 반응 제한적…사우디 주도 ‘OPEC+’ 증산 결정도 영향
이스라엘은 레바논까지 전쟁을 확대하고 있지만 산유국 이란이 참전을 주저하면서 국제유가는 영향을 받지 않고 있다. 오히려 사우디가 주도하는 석유수출국기구 플러스(OPEC+)는 12월부터 원유 생산을 늘리기로 했다. 시장에서도 중동전쟁이 이란으로 확대돼 유가가 배럴당 100달러에 달할 것이란 관측보다 수요둔화 속 시장점유율을 높이기 위한 산유국들의 증산경쟁으로 유가가 배럴당 50달러까지 하락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좀 더 힘을 얻는 모습이다.
지난 10월 1일 이란은 이스라엘에 미사일 공격을 가했다. 하지만 국제유가는 1%가량 움직이는 데에 그쳤다. 지난 4월 이란이 처음으로 이스라엘 본토를 공격했을 때에는 배럴당 90달러가 넘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이스라엘-가자 전쟁 발발 당시 최대 관심사는 이란의 참전 여부였다. 이란은 주요 산유국이자 중동산 원유의 주요 국제 수송로인 호르무즈 해협을 통제할 수 있는 나라다. 이란이 하마스와 헤즈볼라 지원을 위해 이스라엘을 공격하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이스라엘이 이란의 핵 시설이나 원유생산시설을 공격하면 국제유가가 급등할 것이란 우려가 나왔다. 하지만 이란의 움직임은 소극적이었다.
자국 영사관이 공격받은 지난 4월에도 이스라엘 본토에 첫 공격을 가했지만 제한적이었고 피해를 거의 입히지 못했다. 최근에도 이스라엘의 헤즈볼라 지도자 폭격에 대한 보복으로 탄도미사일을 이스라엘로 발사했지만 대부분 요격됐다. 이란이 공격 수위를 조절하자 이스라엘의 행보는 더욱 과감해졌다. 가자에 이어 레바논에서도 민간인 피해까지 감수하는 고강도 군사작전을 거침없이 전개하고 있다. 특히 최근 이른바 ‘삐삐 폭탄’과 벙커 폭탄으로 헤즈볼라의 최고 핵심 지도부를 제거하면서 확실한 우위를 차지했다. 중간 간부 이상을 상당수 잃으면서 헤즈볼라 전력은 크게 약화됐다는 평가다.
폭격으로 사망한 헤즈볼라 하산 나스랄라는 이란의 전폭적 지지를 받던 인물이다. 그의 사망으로 이란의 헤즈볼라에 대한 지원도 애매해졌다. 신뢰할 만한 지도부가 없는 상황에서는 전폭적인 지원도 어렵기 때문이다.
이란 내부 사정도 그리 좋지 않다. 지난 7월 대통령 선거에서 온건파인 마수드 페제시키안이 당선되며 최고지도자 아야톨리 알리 하메네이의 지도력이 흔들리고 있다. 이스라엘과 정면으로 맞붙으면 미국의 제재가 더 강화돼 경제는 물론 정권까지 위태로워질 수 있다. 이란으로서는 이번 사태를 오히려 미국과의 관계 개선 계기로 활용할 필요가 더 크다.
이란이 이스라엘에 강하게 반격하지 않으면, 이스라엘도 이란의 원유시설이나 핵 시설을 겨냥할 명분이 약해진다. 유가가 불안해지지 않아야 이스라엘이 하마스, 헤즈폴라, 후티반군을 상대로 벌이는 군사작전도 국제적인 지지를 얻기 쉽다.
이스라엘과 국경을 맞대지 않은 이란은 가자의 하마스, 레바논의 헤즈볼라, 예멘의 후티 등 외부세력을 이른바 ‘저항의 축(Axis of Resistance)’으로 활용해왔다. 이스라엘이 이번에 저항의 축들을 무력화하면 이란의 중동 내 영향력은 급속히 약해지게 된다. 이렇게 되면 지정학적 이유로 중동산 원유의 수송과 공급이 차질을 빚을 가능성은 크게 낮아진다.
OPEC+는 지난 10월 3일(현지시간) 열린 장관급 공동감시위원회(JMMC) 회의에서 일부 공급 과잉 징후에도 불구하고 당초 계획대로 12월부터 1년간 하루 18만 배럴을 증산하기로 했다. 감산에서 증산으로의 전환은 2년 1개월 만이다. OPEC+의 입장 변화는 2014년부터 2019년까지 이뤄졌던 OPEC+와 셰일오일 간 가격 전쟁이 재현될 가능성을 높인다.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개발이 본격화된 북미 셰일오일은 원유시장 공급확대에 크게 기여했지만 생산원가가 높다. 유가가 생산원가 일정 수준 아래로 내려가면 채산성을 잃게 된다. 하지만 원유수요가 지속적으로 늘어나고 기술도 발달하면서 셰일오일은 수익성을 강화할 수 있었다.
반면 사우디 등 OPEC+ 산유국들은 재정난 때문에 유가를 떨어뜨려 셰일오일을 견제하기 어려워진다. OPEC+는 2022년부터는 감산으로 방향을 바꾼다. 그런데 이 틈에 셰일오일 등 OPEC+ 외 산유국들이 생산을 크게 늘렸다. 유가가 배럴당 70~80달러대에서 움직이면서 셰일오일은 채산성을 유지하면서도 시장점유율을 확대할 수 있었다. 감산에도 가격상승은 제한되면서 OPEC+는 수입만 감소한 처지가 됐다. OPEC+ 회원국 내에서 불만이 커지고 다시 증산으로 방향을 틀게 됐다. 관건은 증산으로 유가가 얼마나 하락할지다.
미국 댈러스 연방은행의 최근 조사를 보면 셰일오일 등 미국의 원유생산업자들이 수익성을 유지하기 위한 서부텍사스중질유(WTI) 가격은 배럴당 65달러였다. 지난 9월 25일, 사우디의 12월 증산 추진 소식이 알려지면서 배럴당 70달러를 넘던 WTI 가격은 67달러까지 떨어졌다. 2025년 글로벌 원유 수요 증가폭은 중국 경제의 성장 둔화로 전년 대비 부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수요증가가 제한되는 가운데 공급이 늘면 유가는 하락 압력이 커질 수 있다.
한편 11월 미국 대선도 국제유가에 큰 영향을 미칠 재료다. 에너지 사용이 많은 미국은 유가가 낮은 수준을 유지해야 물가가 안정된다.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후보는 유전개발에 적극적이다. 카멀라 해리스 민주당 후보도 셰일오일 개발에 긍정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민주당은 전통적으로 셰일오일의 환경오염 부작용을 우려하는 입장이었지만 박빙의 승부 앞에 태도를 바꾼 셈이다. 미국의 새 행정부가 셰일오일 등 원유생산에 적극적이면 이 역시 유가 하락 압력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국제유가 하락이 증시에 미칠 영향은?
국제유가 하락 가능성에 무게가 실리며 증시에 미칠 영향에도 관심이 모아진다. 통상 국제유가는 글로벌 경기 흐름과 동행한다. 경기가 좋으면 원유 수요가 늘어 유가가 상승하기 때문이다. 유가 약세를 전망하는 가장 큰 이유가 수요 증가 둔화인 만큼 증시에는 반갑지 않은 소식이 될 가능성이 크다. 2001년 이후 유가(WTI)와 한국·미국 증시 등락률을 봐도 대체로 방향성은 일치했다. 국제유가가 크게 하락한 해에는 주가가 하락하거나 상승폭이 미미한 보합에 그쳤다.
우리나라는 정유와 석유제품 수출이 많고, 관련 기업들이 증시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크다. 유가가 하락하면 정제유와 석유제품 판매가격도 하락해 마진이 줄어들게 된다. 가파른 유가 하락은 에너지 기업의 재고 평가 가격을 크게 낮추게 되고 장부상 평가 손실로 반영된다. 각별히 유의할 필요가 있다.
한편 에너지 가격은 물가 지표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유가가 하락하면 소비자 물가가 하락할 가능성도 크다. 물가가 하락하면 소비관련 기업들에게는 우호적인 환경이 될 수 있다. 최근 각국 중앙은행들은 경기부양을 위해 일제히 기준금리 인하에 나서고 있다. 유가가 하락해 물가지표가 안정되면 금리 인하에 따른 물가 불안 우려를 덜 수 있다. 중앙은행들의 기준금리 인하에는 탄력이 붙을 가능성이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