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천·청주 싸우다 중국으로 갈 뻔?
▲ 지난 1월 25일 이천·여주 지역구의 한나라당 이규택 의원과 조병돈 이천시장 등이 국회 앞에서 하이닉스반도체 이천공장 증설 불허에 대한 항의로 삭발시위를 했다. | ||
인허가권을 쥔 정부나 정치권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는 하이닉스나 모두 갈지자 행보를 보이고 있다. 기존 이천공장 라인 증설에 대해 미련을 버리지 못하면서 청주공장 신설 역시 시원스런 답변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급기야 일부 언론에 중국 이전설까지 나오면서 청주는 물론 이천 주민들이 발칵 뒤집혔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처럼 중요한 시기에 사장까지 사임하겠다고 해 하이닉스 이천공장 신설 문제가 시간이 갈수록 꼬이고 있다.
지난 2월 6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 열린 한나라당 대책회의는 하이닉스 이전 문제를 놓고 갑론을박하는 정치권의 현주소를 보여줬다. 여당의 집단탈당 등 각종 정치 현안이 산적했음에도 하이닉스가 의원들의 도마 위에 오른 것은 그날치 모 신문의 보도 때문이다.
한 신문이 ‘하이닉스가 청주로 갈 경우 도저히 기업의 경쟁력을 갖출 수 없어 중국에서 17만 평을 50년 무상임대해준다면 중국으로 갈 것’이라고 보도했다. 그러자 한나라당 의원들이 나서서 “국내에 13조를 투자하려는 기업이 만약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게 되면 국부 유출이자 첨단기술의 유출”이라며 “정부의 이천공장 증설 불허 결정은 대한민국 반도체의 엑소더스를 강요하는 정책”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결국 하이닉스의 본사 중국 이전 파문은 이미 사의를 표명했던 우의제 사장까지 나서서 ‘사실무근’이라고 해명하고 나선 후에야 가라앉았다.
‘중국 이전설’은 하이닉스의 한 임원이 경기도 이천공장을 방문한 김문수 경기지사와 한나라당 국회의원들에게 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 문제가 정치권의 정권 공격 ‘불쏘시개’로 쓰이면서 파문이 확대된 셈이다.
재미있는 점은 정부의 하이닉스 이천공장 신설 불가에 반대 입장을 보이고 있는 한나라당도 사실 이에 대한 공식적인 당론이 없다는 점이다. ‘재고하기 바란다’ ‘다시 한번 제대로 풀어 달라’ ‘정부가 다시 최선을 다해달라’는 알듯말듯한 말만 내놓고 있다.
그도 그럴 것이 청주공장 신설을 드러내 놓고 반대한다는 것은 ‘충청표’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행정수도 이전을 놓고 충청권 민심을 불편하게 했던 한나라당이 ‘입조심’에 들어간 셈이다.
실제로 하이닉스 이천공장 증설이 ‘불가’ 결론이 난 지난 1월 24일 한나라당은 그 흔한 논평 하나 내놓지 않았다. 이날 한나라당 소속 김문수 경기지사가 국회를 찾아 ‘하이닉스의 팔을 비틀지 말라’며 기자회견을 가졌고 다음날 이천·여주 출신 이규택 한나라당 의원이 이에 대한 항의 삭발식까지 가졌지만 한나라당 지도부는 이에 대해 침묵했다.
한나라당 내에서도 심재철 의원(안양 동안)과 김성조 의원(경북 구미)이 하이닉스 이천공장 증설을 놓고 같은 이름의 정반대 법안을 내놓았다. 그만큼 지역구에 따라 입장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다. 이는 여당인 열린우리당도 마찬가지. 경기도가 지역구인 김진표 안민석 윤호중 의원은 김문수 지사가 제안한 ‘하이닉스 공장 증설 허용 건의서’에 서명했다. 반면 지역구가 청주인 오제세 의원은 하이닉스반도체의 이천공장 증설 허용은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참여정부의 기본 원칙에 어긋난다며 강력히 반대, 결국 하이닉스의 청주공장 증설을 이끌어냈다.
하이닉스도 정치권의 갈지자 행보를 답습하고 있는 모습이다.
이천공장 불가 결정이 나기 직전 하이닉스는 이천과 청주에 공장을 분산·건설하겠다는 수정 계획안을 정부에 냈다. 하지만 이천공장 건설공정에 ‘구리’를 사용하는 것은 불가피하다고 재차 강조해 정부의 이천공장 불가에 빌미를 제공했다.
결국 이천공장 불가 결론이 났지만 최대주주가 정부인 만큼 대놓고 정부 방침에 반기를 들지 못하고 ‘벙어리 냉가슴’만 앓게 된 것. 이때부터 ‘해외 공장 이전설’이 나돌기 시작했다. 이처럼 하이닉스가 정부 방침에 눈을 흘기는 그때에 우의제 사장이 돌연 사의를 표명했다.
우 사장이 ‘하이닉스를 정상궤도에 오르도록 한 만큼 재도약을 위해 새 인물이 필요하다’며 사의를 표명했다고 하지만 정부 결정에 고분고분하지 않았던 것이 퇴진의 한 요인이 됐다는 의견도 있다. 또 하이닉스 지분을 블록세일하려는 채권단의 의지와 달리 우 사장이 포스코처럼 이사회를 중심으로 경영하는 ‘지배구조’ 변경을 시도했던 것도 이번 사태의 원인으로 작용했다는 분석도 있다.
우 사장은 중국 공장 이전설을 해명하는 자리에서 속내를 슬쩍 비췄다. 그는 “공장 증설문제는 비규제지역으로 가겠다는 것 외에 아무것도 결정된 것이 없다”면서 “인프라 등을 감안할 경우 아직도 이천지역을 희망하고 있다”고 밝혔다.
하이닉스 노조 역시 우 사장의 뒤를 이을 신임 사장으로 이천공장 증설을 밀어붙일 내부 임원을 원하고 있다. 이들은 공장 이전과 후임 사장 결정 문제를 맞물려놓고 있다.
정종철 이천사업장 노조 위원장은 최근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하이닉스가 14분기 연속흑자를 기록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임원 중 한 분이 사장이 돼야 한다”고 밝혔다.
정 위원장은 이천공장 증설 불허를 뒤집을 만한 인물이 신임 사장이 돼야 한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정 위원장은 “환경문제가 이유라면 기존 라인 역시 모두 다른 지역으로 옮겨야 하는데 이 경우 4조 원이 넘는 비용과 10년이 넘는 기간이 걸린다”면서 “이렇게 되면 하이닉스의 생존이 위협받게 된다”고 주장했다.
노조 쪽에선 최근 진대제 전 정통부 장관과 김종갑 전 산자부 장관 등이 하이닉스 신임 사장으로 거론되는 것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이들은 “만약 채권단을 통한 정부 인사가 내려올 경우 심각한 노사 갈등을 겪게 될 것”이라며 사장의 외부 영입을 반대하고 나섰다.
이와 관련, 진대제 전 장관은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외아들인 윤태영씨 결혼식에 참석, 기자들의 “하이닉스 사장 제안이 오면 어떻게 하겠냐”는 질문에 “생각해 보겠다”고 짧게 답했다. 진 전 장관은 “내가 어딜 가나 (후보에) 안 오르겠냐”며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공장 라인 증설이든 신임 사장 선임이든 시간을 다투는 회사 경영 현안이 ‘정치적 이슈화’되어 버린 것. 하이닉스 논란의 결과가 주목된다.
전용기 파이낸셜뉴스 기자 courage@fn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