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먹는 용광로에 회장님 부글부글
▲ 정몽구 현대차 회장 | ||
현대제철은 지난해 매출 5조 4812억 원으로 현대·기아자동차 그룹에서 현대모비스 다음가는 매출을 올리고 있는 그룹 내 ‘넘버 4’ 기업. 게다가 현대제철은 포스코에 이어 국내 두 번째로 고로(용광로) 건설을 추진 중이다. 지난해 10월 착공해 오는 2010년 완공 예정인 이 고로가 완성되면 철강시장에서 포스코의 오랜 독점이 깨지게 되고, 현대·기아차는 그동안 포스코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던 강판공급선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고로건설은 비단 현대제철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룹 전체를 위해서도 중요한 의미가 있는 공사인 셈이다.
그런 현대제철이 갑자기 ‘장수’들을 전원 교체했다. 더구나 이번 인사는 현대제철 내부에서도 당황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현대제철에서는 2005년 11월 김무일 전 부회장이 퇴진한 이후로 1년여 동안 별다른 인사가 없었다. 고로건설이라는 막중한 임무가 진행 중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당연한 조치인 셈. 그러다 지난 연말 양승석 당시 사장이 갑자기 사임했다. 그는 박승하 당시 다이모스 사장과 서로 자리를 맞바꿨다.
더 이상의 경영진 물갈이가 없었다면 양 사장의 교체는 그럴 수도 있는 일로 치부됐겠지만 두 달도 지나지 않은 시점인 지난 16일 현대제철의 핵심 경영진 두 명이 추가로 퇴진했다. 이용도 부회장이 고문으로 물러앉는가 하면 강학서 재무총괄(CFO) 부사장도 현대차 계열인 로템으로 자리를 옮긴 것. 이로 인해 현대제철은 몇 달 사이에 정몽구 회장을 제외한 사내 등기임원 3명이 모두 물러나게 됐다.
공석이 된 등기임원 자리에는 박승하 사장이 대표이사로 등재되고, 김태영 제철사업단장(부사장)과 김영곤 재경담당 전무가 새로운 등기이사로 선임될 예정이다. 강학서 재경본부장이 자리를 옮긴 것은 흑자로 전환한 로템에 힘을 실어주는 차원이며 후임인 김영곤 전무는 강 본부장과 손발을 맞춰온 관계여서 무난할 것이라는 데 의견이 일치한다.
그러나 이용도 부회장의 갑작스런 고문 위촉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표정이다. 이 부회장은 4년간 최고경영자(CEO)를 맡아 일관제철소 사업을 전반적으로 추진해왔기 때문이다.
특히 이 부회장과 함께 물러난 양승석 사장과 강학서 재경본부장도 고로사업을 진두지휘해왔던 트로이카라는 점에서 무성한 소문이 나돌고 있다. 고로건설과 관련해 무언가 심각한 문제가 발생한 것 아니냐는 것.
이와 관련해 현대제철 주변에서는 이번 인사가 고로건설 사업비를 축소보고한 데 대한 정몽구 회장의 진노와 관련이 있다는 얘기가 나돌아 주목을 끌고 있다.
▲ 이용도 고문 | ||
현대제철이 추진 중인 일관제철소 고로건설 사업은 800만 톤 규모로, 오는 2011년까지 모두 5조 2400억 원을 투자한다는 게 당초 회사 측이 밝힌 청사진이었다. 현대제철은 지난해 9월 충남 당진에서 고로 기공식을 거행하면서 이런 계획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공사가 진행되면서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많은 돈이 들기 시작했다는 게 현대제철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각종 플랜트 설비 입찰이 진행되면서 애초 설정했던 사업비보다 많게는 절반 가까이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해졌다는 것이다.
통상 철강업계에서는 고로 1톤을 짓는 데 100만 원 정도가 필요한 것으로 추정한다. 800만 톤 규모인 현대제철의 고로를 짓는 데는 산술적으로 8조 원은 소요된다는 얘기다. 이런 점에서 현대제철의 고로 건설 사업은 계획단계부터 ‘계산착오’가 있었던 셈이다.
이로 인해 현대제철 경영진들은 모자라는 사업비를 조달하기 위해 외부에 손을 벌리는 상황까지 일어났다는 얘기까지 있다. 이렇게 되자 현대제철 내부에서는 사업비가 5조 원은커녕 8조 원에 이를지도 모른다는 수군거림이 일기 시작했다. 현대제철의 자체 점검결과도 최소 7조 원대의 사업비가 필요하다는 진단이 나왔다는 얘기도 들린다. 이런 소문은 결국 정몽구 회장의 귀에까지 들어갔고 결국 그룹 감사팀이 투입돼 진상파악에 나서는 상황까지 벌어졌다.
그룹 감사팀은 지난 연말 인사를 앞두고 정 회장에게 감사결과를 보고 했는데 그 결과가 자못 충격적이었다는 게 현대제철 관계자들의 귀띔이다. 감사팀은 정 회장에게 이대로 간다면 당초 사업비로는 공사 진행이 불가능하다는 의견을 냈다고 한다.
정 회장은 당연히 불같이 화를 냈고 그의 진노가 결국 문책성 인사로 이어졌다는 게 이번 경영진 경질을 바라보는 재계의 시각이다.
하지만 현대제철은 이런 얘기들에 관해 손사래를 치고 있다. 철강업계를 중심으로 떠도는 갖가지 얘기들은 전혀 근거 없는 소문에 불과하다는 게 현대제철의 입장이다.
현대제철 관계자는 “양승석 사장은 해외영업통으로 철광석 원료 구매를 끝내놓고 설비구매 단계에 접어들자 구매통인 박승하 사장이 바통 터치를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용도 전 부회장의 2선 퇴진 역시 “이 부회장은 그동안 일관제철소 건설사업을 무리 없이 추진해 왔으며, 최근 실적도 좋았다”면서 “후배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한 차원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게 현대제철의 공식적인 설명이다. 사장 교체는 일관제철소 사업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면서 실무통으로 자리바꿈한 것이고, 부회장의 2선 퇴진은 세대교체 차원에서 이뤄진 자연스러운 인사라는 것이다.
하지만 재계에서는 고로사업비 축소 의혹 외에 다른 악성 루머들도 나돌고 있다. 임원 간 갈등에 따른 경질설, 타 계열사 관계자의 영입설 등이 끊임없이 현대제철 주변을 떠돌고 있다.
이런 소문들은 현대제철의 주가에도 악영향을 미치고 있다. 3만 7000원을 넘보던 현대제철의 주가는 이용도 전 부회장의 2선 퇴진이 알려진 지난 21일 3%가 넘게 떨어졌고, 주가가 사상최고치를 돌파한 22일에도 하락세를 면치 못하며 3만 4700원까지 내렸다.
한 증권사 중견 간부는 “증권가에서 현대제철의 고로 투자에 대해 불확실성에 대한 논란이 일고 있다”며 “인사발령으로 인한 경영공백 우려감이 주요원인으로 꼽히고 있다”고 업계의 분위기를 전했다.
이영복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