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사 아이돌 향한 원색 비난 ‘업계 동향’으로 보고…업계 “무슨 목적인지 의아해”
하이브 측은 온라인 커뮤니티 등에서 다양한 의견을 취합한 것으로 업계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내부 제작한 것이라는 취지로 주장했지만, 실제 업계 관계자들 사이에선 "자사 아이돌 평판을 확인하는 것이라면 몰라도 타사 아이돌에 대한 불필요한 비난과 모욕 악플을 굳이 취합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비판이 나온다. 2000년대 초반 광고계에서 돌았던 '연예인 X파일'과 비슷한 성격의 문건을 국내 최대 연예기획사가 자체 제작했다는 지적까지 나오는 만큼 명확한 제작 목적과 이를 토대로 진행한 업무 등에 대한 조사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높다.
10월 24일 문체위 국정감사에서 민형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위클리 음악산업 리포트'라는 이름의 하이브 내부 보고서를 공개했다. 이 보고서는 하이브의 플랫폼 부문을 담당하는 독립법인 위버스 컴퍼니에서 아티스트 관련 기사와 칼럼 등을 제공하는 위버스 매거진의 편집장 A 씨가 작성해 하이브와 산하 레이블 최고 책임자들인 C레벨 경영진에 매주 발송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당 문건에는 타 엔터사 소속 아티스트들에 대한 사실상 악플에 가까운 적나라한 평가가 포함돼 논란을 낳았다. "미안한 말이긴 한데 성형이 너무 심했음. 이렇게까지 얼굴을 바꿔서 가져 나온 콘셉트가 너무 시시하니 좀 더 안타깝긴 한데" "멤버들 평균 연령이 어리다는 걸 영업 포인트로 가져가는 팀인데 막상 무대를 보니까 어리면 다냐 싶음. 누구도 아이돌의 이목구비가 아님" "못생김의 시너지가 도저히 참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멘탈 방어가 거의 되기 어려운 환경에 장기간 노출된 흔적이 강하고 그게 특히 외모나 섹스어필에서 드러난 경향이 두드러짐" 등 비난이 '업계 동향 보고'라는 이름으로 공유되고 있었다. 더욱이 이 비난의 대상에는 현재 미성년자인 멤버들도 포함돼 있어 업계 최고 회사의 경영진이 미성년자에 대한 '품평'을 고스란히 받아들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국감에서는 이 점이 대중문화산업법의 아동·청소년 권익보호 가이드라인을 위반한 것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지난 3월 문화체육관광부가 배포한 이 가이드라인에는 아동·청소년 대중문화예술인에 대한 △폭언 및 욕설을 비롯한 폭력적인 언행 금지 △물리적·정신적 체벌 금지 △외모 등 평가 언행 금지 등이 포함돼 있다. 미성년 아이돌 멤버들에게 인격권 침해 발언을 직접 한 게 아니더라도 이를 취합해 문서화한 뒤 '돌려 본 것'에 문제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국감에 증인으로 출석한 김태호 하이브 최고운영책임자(COO) 겸 빌리프랩 대표는 이에 대해 "저희는 K-팝 산업에 종사하고 있고 하이브에 소속된 아티스트 및 전반에 대해 여러 가지 반응을 살피고 있다. 이 문서는 하이브의 공식 문서는 아니고 온라인상에 올라온 글을 종합한 것"이라며 해당 가이드라인을 위반한 사실 자체가 없다는 취지로 반박했다. 그러나 이 문건에는 단순 비난 발언 취합을 넘어서 하이브의 자체적인 의견도 첨가돼 있고, 이를 공개할 수도 있다는 민 의원의 추가 지적에 대해서는 답변하지 못했다.
가요계 내부에서도 하이브의 보고서에 대해 "당황스럽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익명을 원한 한 가요계 관계자는 "사실 연예기획사 직원들이라면 다들 웬만한 온라인 커뮤니티며 엑스(X, 트위터의 옛 이름) 등 소셜미디어(SNS)에서 나오는 자사 소속 아티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를 다 모니터링하고 있다. 이 반응을 토대로 향후 활동 방향을 어떻게 정할지 논의하기도 한다"면서도 "그런데 타사 소속 아티스트들에 대한 악플을 취합하는 것은 무슨 목적인지 굉장히 의아하다. 우리 아이돌 이미지 지키는 것만으로도 바쁜데 매주 다른 아이돌에 대한 모욕까지 확인하고 그걸 모아 경영진에 전달하는 게 좀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라고 짚었다.
또 다른 연예계 관계자는 "보고서 내용 중 가장 충격을 받았던 부분이 'XX(타사 아이돌)는 이런 방식으로 공격하면 된다'는 식의 커뮤니티 반응을 공유하고 있었다는 점"이라며 "타사 아이돌이 대중에 부당하게 비난당하는 방식을 왜 관계도 없는 하이브가 알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어느 아이돌이 이렇게 해서 잘됐더라' 하는 것은 당연히 사례를 취합해서 벤치마킹할 수 있지만, 그냥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하려고 '까는' 내용이 업계 동향이라고 경영진까지 보고받는다는 건 참 희한"이라고 짚었다.
일각에서는 하이브의 이 내부 문건이 2005년 연예계를 떠들썩하게 한 '연예인 X파일'과 비슷하다는 얘기도 나온다. 당시 국내 유수의 광고기획사였던 제일기획이 "과학적인 광고모델 전략을 광고주에게 제안하기 위해 리서치 업체를 통해 작성한 자료"라고 해명한 이 X파일에는 사실 여부가 확인되지 않은 루머나 인신공격에 가까운 문구가 '업계 소문'이라는 이름으로 올라와 수많은 연예인들이 피해를 입기도 했다. 하이브 측 역시 "업계 동향과 이슈를 내부 소수 인원들에게 참고용으로 공유하기 위해 커뮤니티나 소셜미디어 반응을 있는 그대로 발췌해 작성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어떤 목적'의 참고인지 불분명한 이 문건으로 인해 타사 아이돌들에게도 고스란히 피해를 끼치게 됐다.
하이브는 국감이 채 끝나기도 전인 10월 24일 저녁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보고서 중 일부 자극적인 내용들만 짜깁기해 마치 하이브가 아티스트를 비판한 자료를 만든 것처럼 외부에 유출한 세력에 대해서는 끝까지 책임을 물을 것"이라는 경고성 입장을 내놨다가 의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전재수 문체위 위원장(더불어민주당)은 "현재 헌법과 법률에 의해서 국정감사가 진행되고 있는데 국정감사 위원이 증인께 질의하고 답변한 내용에 대해 회사에서 저런 식으로 대응하는 것은 굉장히 부적절하다"며 "이렇게 국정감사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국회의 권위를 이런 식으로 해서야 되겠나. 대한민국의 K-컬처를 이끌어가는 대표기업이 어떻게 이렇게 무책임하게 대응하나, 국회가 그렇게 만만한가"라고 일갈했다. 결국 다른 증인들이 귀가하는 동안 김태호 대표만 남겨 오후 10시 이후까지 추가 질의를 진행했다.
김 대표는 "국감 진행 중 입장문을 낸 것은 당사의 명백한 불찰"이라면서 "결코 국회를 경시하고자 한 것이 아니다. 보고서에 관한 문제도 앞으로 바로잡도록 하겠다"고 고개를 숙였다. 박정하 국민의힘 의원이 외부 유출 세력에 책임을 묻겠다는 하이브 입장을 지적하자 이에 대해서도 "내부 건전한 비판을 하는 이들은 보호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부자를 색출할 생각은 전혀 없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답했다. 문제의 공식입장은 김 대표의 추가 질의응답 후 하이브 홈페이지에서 삭제됐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