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한마디가 천냥 빚 키웠다’
▲ 조석래 회장이 겨우 3억 원짜리 땅 때문에 소송을 제기한 이유를 두고 무수한 뒷말이 돌고 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이아무개 씨와 처삼촌 조석래 회장이 부동산을 공유하게 된 것은 지난 1989년 경기 이천시 모가면 두미리 산 39-15 임야 6만 8596㎡를 구입하면서부터다. 당시 매입대금(1억 4525만 원)은 조 회장이 부담했으나 명의는 이 씨의 이름으로 소유권이전등기를 마쳤다. 단 토지에 관한 등기필증은 조 회장이 보관했으며 토지세와 같은 각종 세금에 대해서도 직접 부담해왔다.
이후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별 탈 없이 지내던 두 사람은 지난 2004년부터 삐거덕대기 시작했다. 조 회장이 직원을 통해 수차례 자신의 재산을 돌려달라고 요청했으나 이 씨가 이를 거절한 것. 다만 2004년 해당 땅은 인근 골프장과 서로 필요한 부지를 교환하기로 하고 분할했는데 이땐 이 씨가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이처럼 몇 차례 소란은 있었지만 특별한 변동사항 없이 또 다시 5년이라는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러다 2009년 돌연 조 회장이 소송을 제기하면서 본격적인 다툼이 벌어졌다. 재판을 통해서라도 반드시 땅을 되찾아야겠다는 조 회장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이에 이 씨도 이때부터 직접 토지세를 납부하며 적극적으로 권리를 행사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조 회장의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재판부는 명의 신탁에 대한 부분은 인정하면서도 “부동산실명제법에서 정한 시행 유예기간(1996년 7월 1일)까지 실명등기를 하지 않았고 10년이 넘은 시점에서 소송을 제기해 소유권이전등기청구권 시효가 소멸했다”는 이유로 1심과 2심 모두 기각 판결을 내렸다.
두 번이나 원치 않는 결과를 받은 조 회장은 포기할 법도 했지만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법원에 상고했다. 당시 사건을 접한 법률 전문가들은 하나같이 원고 승소 가능성이 없다고 내다봤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오히려 변호인단을 강화해 승소에 대한 의지를 불태웠다. 마침내 열린 대법원 재판. 조 회장은 결국 원하던 결과를 손에 쥐었다.
대법원 1부(주심 양창수 대법관)는 “피고는 2004년까지 이 부동산이 자신이 아니라 원고 소유임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을 전제로 세금 부담 같은 재산적 지출을 원고에게 적극적으로 요청했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피고는 원고에게 소유권등기를 이전·회복해 줄 의무를 부담함을 알고 있다고 봄이 상당하다”며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등법원으로 돌려보냈다. 이 씨가 땅 반환 거부 의사를 드러낸 2004년 이전까지는 소유권이전등기의무를 승인한 것으로 그 무렵까지 원고의 청구권 소멸시효가 중단됐다는 설명도 덧붙였다.
이처럼 불꽃 튀는 소송전은 조 회장의 승리로 끝났지만 이 씨는 대법원의 판결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입장이다. 11월 28일 기자와 만난 이 씨는 “대법원의 판결이라 더 이상 어찌하지 못하는 것은 잘 안다. 하지만 대법원의 판결은 부동산실명제를 유명무실화하는 판결이라 생각한다. 법 제정 당시 유예기간을 정해놓고 충분히 명의를 되돌려 놓을 기회를 줬음에도 조 회장은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이후 벌써 10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는데 이제 와서 돌려주라는 것은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이 씨는 무엇보다 소멸시효 적용 시점이 왜 2004년 기준으로 계산되는지 모르겠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차명재산에 대한 세금 납부는 당연히 명의 신탁을 요구한 쪽에서 계산하는 것인데 이를 근거로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다고 판단하면 부동산실명제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는 설명이다.
이 씨는 “당시 재벌기업 총수가 차명재산을 소유하는 것은 특별한 일도 아니었다. 분명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차명재산을 가지고 있을 텐데 이번 대법원의 판결에 따르면 누구라도 언제든지 이를 되찾을 수 있다는 말이 되지 않는가”라며 “세금만 내주면 소멸시효가 영원하다는 말이 되는데 이는 합법적으로 재산 은닉을 눈감아주는 꼴이다. 이번 사건의 판례 때문에 앞으로 잘못된 판결이 계속 나올까 심히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법조계 관계자들은 대법원의 판결 자체로는 문제가 없다고 판단하면서도 이 씨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가 된다는 견해를 밝혔다. 부동산전문 정충진 변호사는 “1심과 2심은 정형화된 법률(부동산실명제)을 우선적으로 적용해 판결을 내렸다면 대법원은 상황을 실제적으로 판단해 어느 쪽을 먼저 보호해야 하나를 중점적으로 본 것 같다. 사실 대법원에서 피고의 손을 들어줬어도 할 말이 없는 재판이긴 하다”며 “부동산실명제 취지 자체를 놓고 보면 실제 소유자(피고)를 보호해야 함이 맞긴 하다”고 설명했다.
만약 피고가 해당 부동산에 대해 관리·감독을 했더라면 상황은 달라졌을 것이라는 게 정 변호사의 설명이다. 부동산실명제에 있어 소멸시효는 중요한 사안인데 신탁자가 등기권리증만 가지고 있고 수탁자가 실질적으로 관리를 했다면 이때는 소멸시효가 흘러갔을 것이란 얘기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 씨가 2004년 이전까지는 어떠한 형태로든 권리를 행사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원고승소 판결을 내렸다는 해석이다.
법조계에서도 이번 사건을 이례적이고 예외적인 사례인 것으로 진단했지만 이 같은 결과가 또다시 뒤집어질 확률은 극히 낮다고 바라봤다. 정 변호사는 “1심과 2심에서 나온 판결이 대법원에서 뒤집어지는 것도 10% 남짓한 낮은 확률이다. 하지만 대법원에서 파기 환송된 판결이 또 다시 뒤집어질 확률은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증인 등 결정적인 새로운 반증이 나온다면 모를까 99% 확정된 사안이라고 봐도 무리가 없다”고 말했다.
이 씨는 소멸시효 말고도 십수 년 전 세무조사에서도 자신의 땅임을 분명히 밝혔고 효성에서도 이와 같은 내용을 알고 있다며 의문을 제기했다. 이 씨는 “땅을 매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강남세무서에서 조사를 나왔다. 땅 매입과정에서 불법사항은 없었는지 세금 납부는 제대로 이뤄졌는지 등에 대해 꽤 자세히 조사를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러자 회사에서 날 불러 땅 소유를 묻거든 절대 ‘내 땅’이라고 말하라고 지시했다. 그래서 난 이를 따랐고 세무조사에서도 내 땅으로 판단했었다”고 말했다. 다만 소송이 제기된 이후 그 때의 자료를 찾고자 했으나 세무서 측에서 “보관기간이 지나 자료가 없다”는 답변을 받아 증거자료로 제출하진 못했다고 한다.
2004년 땅 분할 당시에도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이 씨는 “재판부는 2004년 땅 분할 당시 내가 아무런 의견을 제시하지 않아 소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말하는데 이는 사실이 아니다. 나는 당시 어떠한 동의서도 작성해 준 적 없으며 땅을 분할한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았다”며 “아무리 차명재산이라지만 땅을 분할하는 작업에는 등기부에 기재된 명의자의 승낙이 필요한데 어떻게 서류를 조작한 것인지 나도 모르는 사이에 분할이 끝나 있었다”고 말했다.
앞서 언급한 사안뿐 아니라 이 씨는 대법원 판결에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가 몇 가지 더 있다는 의견을 밝혔으나 이는 심증일 뿐이라며 구체적인 말은 아꼈다. 이 씨는 “우리나라에서는 대법원 판결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이를 바로잡으려 하는 사람이 없다. 변호사도 대법원의 판결에 대놓고 반박을 하면 눈 밖에 나기 십상이라 적극적으로 항변하지 못한다”며 “이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더 이상의 법률적 다툼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이 씨는 소송에 이르게 된 계기에 대해 상당히 조심스럽게 말문을 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인 데다 집안 사정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밝힐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특히 조 회장에 대해서도 ‘집안 어른’이라며 말을 아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몇 가지 사건으로 인해 거리를 둘 수밖에 없었다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 씨는 지난 1977년 효성에 입사해 1997년 5월 상무이사직을 끝으로 퇴사할 때까지 오랜 시간 조 회장과 인연을 맺어왔기에 서로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 씨가 효성에 재직할 당시 두 사람은 번번이 부딪쳤다고 한다. 이 씨는 “회사를 다닐 때 주제 넘는 행동을 했었다. 인척이니 회장의 뜻에만 따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반대의견을 내야만 내게로 정보가 모이고 또 이를 알아야 올바른 판단을 할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회사에서 조 회장 앞에서 큰 소리칠 수 있었던 인물은 나뿐이었다. 조 회장도 이런 부분에 대해서는 이해를 해줘 고마운 마음이 남아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씨가 진행하던 대형 프로젝트에 차질이 생기면서 두 사람의 갈등은 한계점에 도달했다. 이 씨는 “4000억 원짜리 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100억 원가량의 손실만 보고 중단했다. 회사 사정 때문에 중단한 것인데 책임은 내가 져야 했다. 정년은 보장받을 줄 알고 있었는데 황당했다. 청춘을 바친 회사인데 그렇게 쫓겨나니 허무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나 조 회장이 말하는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소송을 벌인 것은 아니라고 단언했다. 풍족한 삶은 아니지만 지금도 경제적으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얘기다. 다만 한 가지 사건이 이 씨를 여기까지 끌고 왔다고 고백했다.
이 씨는 “사실 퇴직 후 조그마한 사업을 해보려했다. 그런데 조 회장이 중간에 나서 일이 뜻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날 불러 그 사업을 하지 말라고 했으면 이처럼 마음이 상하지 않았을 텐데 내겐 아무 설명도 없이 사업을 망쳐버렸다”며 “당시 너무 화가 나 조 회장을 찾아가 따졌더니 ‘넌 회사(효성) 다닐 때도 손실만 끼치지 않았느냐’며 화를 내더라. 20년이란 세월을 효성에 바쳤는데 조 회장의 말에 심한 충격을 받았다. 이런 말까지 들었는데 어느 누가 쉽게 땅을 내주고 싶겠는가”라고 말했다.
즉 두 사람의 감정 싸움이 결국 법정다툼으로까지 이어졌다는 얘기다. 이미 감정의 골은 깊어졌지만 이 씨는 “중간에 조정 기회가 있었는데 조 회장 쪽에서 모두 거절했다. 이제 사건이 파기 환송됐기에 한 차례 조정 가능성이 남아있다고 들었는데 잘 마무리되길 바랄 뿐이다”는 바람을 전했다.
박민정 기자 mmjj@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