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맨스릴러’의 새로운 장 그려내…“서현진 대사와 얼굴이 개연성이었다” 극찬
“이 작품을 하면서 제가 누군가에게 소유 당하는 걸 별로 안 좋아하는 사람이란 걸 다시 깨달았어요(웃음). 반대로 저 역시도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한다고 해서 마치 내 것인 양 소유욕을 가져본 적도 별로 없어요. 그러니 상대방도 저를 그렇게 봐줬으면 하고 기대하는 거죠. 제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연인 관계는 모든 걸 같이 할 필요 없이 책상에 마주 앉아서도 각자의 할 일을 할 수 있는, 그리고 같은 공간에 있어도 서로 다른 일을 할 수 있는 관계예요. 예컨대 저는 낚시를 엄청 좋아하지만 애인에게 제 취미를 강요할 마음은 전혀 없거든요(웃음).”
김려령 작가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트렁크’는 기간제 결혼 매칭 회사의 직원 인지(서현진 분)가 과거의 아픔을 간직한 음악 프로듀서 정원(공유 분)과 1년 동안 계약 결혼 생활을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담은 로맨스 스릴러 드라마다. 공유가 연기한 한정원은 과거의 아픈 기억 탓에 늘 불안과 외로움에 잠식된 채 자신의 전 아내인 서연(정윤하 분)의 애정을 갈구하지만, 동시에 인지에게서도 같은 아픔을 찾아내면서 그에게 서서히 끌리게 된다.
대중들이 ‘공유의 로맨스’하면 떠올리는 촉촉하고 따뜻한 분위기보다는 겨울에 걸맞은 건조하면서도 퍽퍽한 기류가 이 세 명의 사이를 채운다. 시청자 간에 작품의 호불호가 갈린 것도 이처럼 기대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로맨스의 ‘농도’ 탓이 컸다. 이에 대해 공유는 “호불호 반응이 있을 것이라고 작품에 들어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다”면서도 “어쩌면 이 건조함이야말로 자신에게서 찾을 수 있는 가장 짙은 부분일 것”이라고 짚었다.
“사람들이 바라보는 저와 제가 바라보는 저의 간극이 있거든요. 가끔 그게 숨 막히고 답답할 때도 있어요. 나는 이렇지 않은데, 다들 이렇게 봐주시는 경우가 더러 있거든요. 사실 제가 보는 저는 참 건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데(웃음)…. 화면상에서 보이는 캐릭터 때문에 그런 제 위로 입혀지는 것들이 많은 것 같아요. 보시는 분들 입장에선 그 기준에서 생각하시고 그게 때론 확대될 때도 있는 거죠. ‘트렁크’를 준비할 때는 아무래도 제 스스로가 건조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정원이라는 캐릭터를 받아들이는 데 이질감이나 불편함이 없었던 것 같아요.”
이런 물기 없는 로맨스를 앞장서서 이끈 인지라는 캐릭터도 ‘장르적인 신선함’을 시청자들에게 안겨줬다. 철저히 계약과 매뉴얼에 따라 기계적으로 정원의 두 번째 아내 역할을 수행하는 인지는 로맨스 작품의 여주인공이라기 보단 ‘트렁크’의 또 다른 장르인 ‘스릴러’의 색채가 더 걸맞아 보이는 인물이다. 정원은 처음엔 그런 그를 대놓고 거부하면서 소심하게나마 적의도 드러내지만, 인지의 과거를 알아가면서 그에게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며 조금씩 마음을 주게 된다.
“정원과 인지는 둘 다 상처받고 아픈 영혼들이죠. 정원이 인지를 바라볼 때, 분명 이 사람도 어딘가가 썩어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연민이 생겼을 거예요. 서로가 서로를 보며 ‘거울 치료’를 하고 있다는 생각도 들고요. 사실 이 작품은 구조적으로도 인지와 서연이라는 두 여성이 끌고 가는 거고, 정원이는 중간에서 그냥 찌질하게 있는 거거든요(웃음). 그런데 (서)현진 씨의 연기를 보면 대본에서 상세하게 설명되지 않는 것들을 연기로 정말 꽉꽉 채워준다는 걸 느꼈어요. 상대 배우의 그런 연기를 보고 있자면 정말 든든하죠. 같이 상승한다는 느낌도 들고요.”
서현진과 공유는 같은 소속사(매니지먼트 숲)에 적을 두고 있지만 호흡을 맞춰본 것은 ‘트렁크’가 처음이었다. “서현진의 대사와 얼굴이 개연성이었다”며 칭찬을 멈출 수 없다는 듯, 연기 질문이 나오면 무조건반사처럼 ‘기승전서현진’을 이어가던 공유는 무엇보다 서현진 덕에 자신의 연기 속 빈칸도 채울 수 있었음을 강조했다.
“정원의 대사 중에 ‘당신이랑 자고 싶은 것 같아’라는 게 있는데, 어떻게 연기하면 좋을지 너무 어렵더라고요. 이게 다른 작품에서 나오지 않았던 방식의 고백이라 혼자 엄청 고민하는데 아무도 답을 안 알려주는 거예요(웃음). 그런데 제가 먼저 촬영한 뒤에 현진 씨가 그 장면을 보며 리액션만 해야 하는 상황인데 저한테 와서 이래요. ‘오빠가 이렇게 연기할 줄 몰랐다’고, 예상을 못 했대요(웃음). 나중에 감독님까지 오셔서 다 같이 작전회의를 하는데 현진 씨가 ‘저도 이 장면이 어려웠는데, 정원이 이런 눈으로 이렇게 얘기하면 저도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라고 말했어요. 저 스스로는 아직도 그 신을 보면 여전히 좀 힘든데(웃음), 현진 씨의 그 말이 참 힘이 되더라고요.”
그간 남들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잠시 슬럼프도 겪어보고, 밑바닥의 우울감도 살짝 맛봤었다는 공유는 ‘트렁크’ 이후 조금씩 면역력을 갖춰가는 중이라고 한다. 정원의 아픈 과거와 지금의 상황을 깊이 이해할 순 없어도 공감에 가까운 감정을 느끼고, 인지와의 ‘쌍방 구원 서사’에 마음이 갔던 것도 그가 이전에 엷게나마 비슷한 경험을 거쳤기 때문이었다. 배우 데뷔 23년 차를 맞이한 지금, 불어오는 바람에는 그저 몸을 맡기고만 있어도 괜찮을 것이란 확신이 생겼다는 게 그의 이야기다.
“그때는 어리바리하게 고장 나 있다가도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생각해보면 이제야 명징해지는 것 같아요. 모든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다들 끊임없이 흔들리는 존재라는 걸 느꼈거든요. 제가 조금이라도 거쳐갔던 그런 감정들에서 굳은 살이 돋아나는 것 같기도 하고요. 여전히 상처받고 힘든 건 마찬가지지만 면역성이 생기나 봐요. 그리고 그렇게 다음을 맞이하는 거죠. 스스로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서 좀 더 단순해지려고 노력해요. 습관처럼 운동하고 몸을 쓰고 나면 좀 나아지죠. 취미인 낚시도 그래요. 어쩌면 현실도피일 수도 있지만요(웃음).”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