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진 상장폐지 추진에 유상증자 등 주주보다 기업 우선시…“코리아 디스카운트 되레 부추겨”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에 따르면 지난 18일 기준 자발적 상장폐지를 위해 공개매수를 신고한 기업은 9곳이다. 코스피 상장사 중 쌍용C&E(씨앤이)·락앤락·신성통상·신세계건설이 자발적 상장폐지를 추진했다. 코스닥 상장사 중에는 티엘아이·커넥트웨이브·제이시스메디칼·코엔텍‧SBI핀테크솔루션즈 등이다.
올해 자발적으로 상장폐지를 추진한 기업 수는 지난해와 2022년 각 4곳과 3곳을 더한 수보다 많다. 특히 금융당국이 지난 5월 ‘기업 밸류업 지원방안’의 주요 내용 중 하나인 ‘기업가치 제고 계획 가이드라인’을 발표한 이후 자발적 상장폐지 추진 기업이 5곳 더 늘어났다.
일각에서는 기업들이 금융당국의 정책을 회피하기 위해 상장폐지를 추진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왔다.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최근 사모펀드에 의한 상장폐지 원인과 시사점’을 통해 “주식시장 투자자의 요구와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경영진이 부담을 느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 경영진의 장기적인 경영전략 설정과 집행에 부담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신성통상은 경영 활동의 유연성과 의사결정의 신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상장폐지를 결정했다고 공시했다. 신성통상은 염태순 회장의 가족들이 경영진으로 포진해 있는 회사다. 호실적에도 최근 10년간 배당이 한 차례만 이뤄져 주주들의 불만이 있었다. 그사이 이익잉여금은 3000억 원까지 상승했다. 자진 상장폐지에 성공하면 이익 잉여금이 모두 오너 일가의 손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주주 환원보다 오너 일가의 이익을 먼저 생각한 것 아니냐는 오해가 나온 이유다.
두산그룹도 두산에너빌리티, 두산로보틱스, 두산밥캣 간 분할·합병 등을 통해 사업 개편을 추진했다. 여러 논란이 있었지만 자회사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 자회사로 이전한 후 두산밥캣을 상장 폐지하는 개편도 논란이 됐다. 세 기업 중 유일하게 배당금을 지급하는 두산밥캣이 상장폐지하면 두산밥캣의 배당금은 두산로보틱스만 독식하게 되는 구조가 된다.
유상증자도 활용 여부에 따라 주주보다 기업의 이익을 더 우선시하는 선택이 될 수 있다. 유상증자는 기업 입장에서는 가장 부담이 없는 자금 조달 방식 중 하나다. 신규로 자기 회사 주식을 발행해 그 주식을 불특정 다수에게 팔기만 하면 자금을 조달할 수 있다. 하지만 유상 증자는 전체 주식 수가 늘어나 기존 주주들의 지분율이 낮아지고, 이것이 악재로 작용해 주가가 떨어지기도 한다. 기존 주주로선 이익을 침해당할 수 있는 셈이다.
고려아연의 유상증자 시도는 기업이 주주들을 고려하지 않는 대표적인 사례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경영권 분쟁 중인 고려아연은 약 2조 원을 차입해 공개 매수를 통해 지분을 확보한 바 있다. 지난 10월 30일 유상증자를 공시한 고려아연의 자금 조달 목적에는 채무상환 자금 2조 3000억 원이 적혀 있었다. 증자 방식은 일반 공모다. 새로운 주주에게 투자를 받아 지분 경쟁에 사용한 돈을 갚겠단 것이다. 게다가 신주 발행가액(67만 원)이 공시 당시 주가(108만 1000원)보다 터무니없이 낮아 기존 주주들의 입장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었다.
이수페타시스는 지난 11월 8일 55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를 통해 이차전지 탄소나노튜브(CNT) 소재 전문 제조기업 제이오 인수에 나서고 나머지는 설비투자에 집행한다고 밝혔다. 이수페타시스는 설비투자 계획을 먼저 발표한 후 주식시장이 마감되자 유상증자 계획을 발표해 ‘올빼미 공시(주가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중요한 정보를 시장이 열리지 않는 시간에 공시하는 행위’ 비판을 받았다. 신주 발행가액(2만 7350원)이 유상증자 공시일 종가 기준 가격(3만 1750원)보다 낮은 점도 지적됐다.
현대차증권도 지난 11월 26일 2000억 원 규모의 유상증자 계획을 공시했다. 1000억 원은 차세대 IT 시스템 개발 등 시설 자금으로 사용하고 225억 원으로는 채무를 상환할 계획이다. 나머지 774억 원은 기타 자금으로 분류됐다. 한국기업평가는 “유상증자로 위험 투자 확대로 저하됐던 재무 건전성 지표가 회복돼 신용도 부담이 완화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러나 현대차증권의 유상 증자 규모는 공시일 종가 기준 시가총액(약 2790억 원)과 거의 같았다. 또 현대차증권의 신주 발행가액(6640원)도 공시일 기준 종가(8800원)보다 낮은 수준에 책정됐다.
장중에 유상증자 계획을 공시한 고려아연 주가는 하한가로 장을 마쳤다. 이수페타시스는 유상증자 공시 전 주식을 매수한 투자자는 지난 18일 종가 기준으로 약 16% 손해를 보고 있다. 현대차증권도 같은 기준으로 주가가 약 13% 하락했다.
더불어민주당은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주 이익 고려를 의무화하기 위해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 상법 개정안에는 기업 이사의 충실의무 적용 대상을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내용이 담겨 있다. 현행 상법상 이사의 충실의무는 이사와 회사 간 이해가 충돌할 때 회사의 이익을 우선해야 한다. 물적분할, 분할상장 등 지배주주에게는 이익이어도 일반 주주는 손해를 보는 행위들이 일반 주주 동의 없이 이뤄졌다. 상법이 개정되면 기업은 유상 증자 등을 결정할 때 주주의 이익도 고려해야 한다.
금융당국도 ‘주주 보호’에 무게를 싣는 분위기다. 금융당국은 3개 기업 모두에 정정신고서를 요청했다. 결국 고려아연은 유상 증자를 철회했다. 한국거래소는 지난 11일 유상증자를 철회한 고려아연을 불성실공시법인으로 지정하기도 했다. 고려아연은 1990년 상장 이후 단 한 번도 불성실공시법인에 지정된 적이 없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우리나라 오너 경영 체제는 지금 정부나 국회가 추진하고 있는 정책과 결이 맞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기업들이 오너십에 대한 불확실성과 리스크를 체감하고 이를 다양한 방식으로 회피하려는 것 같다. 이런 행위들은 오히려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더 부추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금융당국도 이를 모르지 않을 것이다. 금융당국이 최근 주주들을 의식한 듯한 판단을 내리는 것도 같은 맥락”이라고 분석했다.
박찬웅 기자 rooney@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