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 근육이 춤추고 몸 움직임에 공간 밀도 변화…좋은 사진은 춤이 표현하는 침묵의 언어를 완성
#Episode1. 등이 춤춘다
영상은 초당 몇 프레임으로 촬영하느냐에 따라 같은 장면이라 하더라도 부드러움과 디테일이 다르다. 1초에 24프레임으로 촬영한 영상과 120프레임으로 촬영한 영상의 차이는 굳이 설명을 하지 않아도 보는 사람이 먼저 느낀다. 영상과 마찬가지로 같은 동작을 24개의 구분동작으로 춤추는 사람과 120개의 구분동작으로 춤추는 사람의 움직임은 확연히 다르다. 24개의 구분동작을 120개로 세분화하여 움직이려면 얼마나 많은 연습과 노력을 해야 할까?
운동으로 단련된 몸이 아닌 춤으로 단련된 몸은 근육의 디테일이 다르다. 24개의 구분동작을 120개의 구분동작으로 만들기 위해 단련된 근육이다. 그러한 근육의 디테일이 120프레임으로 촬영한 영상같이 움직임을 부드럽고 정교하게 만든다. 세분화된 구분동작들 사이에 무용수들이 하고 싶은 이야기가 들어간다. 이야기가 있는 움직임, 그것이 춤이다. 무용수라 불리는 사람들은 자신의 움직임으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 팔 한번 움직이고 발 한걸음 내딛는 것도 그냥 하지 않는다. 호흡으로 온몸을 사용한다. 동작 하나에 미세한 구분동작들이 첨가돼 움직임으로 감정을 전달한다.
사진 속 무용수가 뒤 돌아 앉아 팔을 들고 움직인다. 얼굴 표정으로 감정을 전달하지 않고 뒷모습과 팔의 움직임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한다. 양팔을 올리고 내리며 다양한 선과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팔을 올리고 내릴 때마다 등이 요동친다. 팔 동작의 작은 변화 하나하나에 등 모양이 달라진다. 움직이는 등의 모양을 보고 있자니 등 근육으로 팔의 움직임을 조정하고 있다는 느낌마저 든다.
등이 춤춘다.
Episode2. 찬란한 별빛, 작은 우주를 만나다
텅 빈 무대 위 검은색 정장에 선글라스를 쓴 멋진 남자 무용수가 있다. 볼레로 음악이 나온다. 음악이 고조되고 커진다. 무용수는 혼자 음악에 맞춰 정말 가벼운 움직임으로 정말 힘겹게 춤을 춘다. 점점 격렬해진다. 윗도리를 벗어던진다. 움직임으로 땀이 사방에 튄다. 기존의 모든 문법과 격식이 사라지고 지금의 시공간을 대하는 진솔한 움직임만이 보인다.
춤은 몸의 움직임으로 공간의 밀도를 변화시키는 행위다. 춤을 보는 관객들은 그 밀도의 변화를 느끼고 그 변화로 인해 무대 위 춤추는 사람들의 모습에서 삶의 숭고함, 내가 살아가는 이유를 발견한다. 멋진 포즈가 찍힌 것도, 얼굴이 잘 생기게 나온 것도 아니지만 사방으로 튀는 땀방울이 모든 아름다움을 말해준다.
초탈의 경지에 도달했을 때 볼 수 있는 아름다움을 넘어선 경외감. 마치 우주 속 수많은 별빛이 모여 이루고 있는 은하계를 보는 것 같은,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한 사람이 무대에서 만들 수 있는 작은 우주.
나는 그 날, 무대 위 찬란한 별빛, 작은 우주를 만났다.
Episode3. 배정혜가 배정혜를 안다
이 사진은 배정혜 선생님의 80세 기념 공연 마지막 날에 찍은 풍류장고 사진이다. 기존 작품에서 마지막 부분을 새롭게 구성하여 이번 공연에 선보였는데 작품의 마지막 모습을 담으면서 선생님의 춤을 대하는 자세와 마음가짐을 보았다.
‘아! 이 분은 평생 춤을 이렇게 대하셨구나.’ 80세의 나이에도 여전히 무대에서 춤을 추고 소녀처럼 장구를 안고 있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고 카메라를 잠시 내려놓고 기립박수를 쳤다. 저 장면의 잔상이 깊은 여운으로 남아 한동안 촬영한 사진을 계속 봤는데 어느 순간 사진 속 배정혜 선생님 모습이 장구를 안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춤을, 아니 자기 자신을 안고 있는 것만 같았다. 장구가 춤이고 춤이 배정혜인 것처럼. 그래서 사진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배정혜가 배정혜를 안다.’
침묵은 말을 하지 않거나 표현하지 않는 것이 아닌, 모습 그 자체가 모든 것인 온전한 상태다. 몸으로 표현하는 무용수들의 모습이야 말로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진정한 침묵이 아닐까? 춤은 침묵을 바탕으로 하는 언어이다. 그래서 순수하고 아름답다. 좋은 사진은 춤이 표현하는 침묵의 언어를 완성시켜준다. 앞에 쓴 장황한 글보다 사진 속 장면이 전해주는 수많은 이야기들. 그것을 사진으로 담는 나에게 무용수들은 침묵을 사용할 줄 아는 매력적인 피사체다. 그들에게 경의를 표한다.
옥상훈 공연예술사진작가, 스튜디오 야긴 대표, 온더고필름 디렉터. 국악반주에 맞춰 추는 승무에 반해 춤 사진을 찍은 지 20년이 됐다. 서울무용제(SDF), 창작산실, 대한민국장애인국제무용제(KIADA) 등 다수의 공연예술페스티벌과 안은미컴퍼니, 정동극장, 경기아트센터 등 여러 예술가 및 기관, 단체들과 지속적인 공연 작업을 하고 있다.
옥상훈 스튜디오 야긴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