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장암 식도암 진단, 다행히 심각한 상태는 아냐”…동생 6세 때 일본 데려와 대성, 마음 한편으론 후회도

#동생 조치훈의 1호 후원자
올드팬이라면 이미 잘 아는 이야기겠지만, 조상연은 조치훈 9단의 친형으로서 바둑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일본기원 소속 7단 기사로 활동하면서, 동생 조치훈이 세계적인 바둑 기사로 성장하는 데 결정적인 공헌을 했다.
조상연은 어린 동생 조치훈을 일본으로 데려가 프로 기사로 키우는 데 모든 것을 쏟았다. 1962년, 당시 여섯 살에 불과했던 조치훈이 일본 유학길에 오를 때, 열다섯 살 위 형인 조상연은 동생의 보호자 역할을 자처하며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낯선 이국땅에서 그는 부모 같은 형이자, 뒤를 든든히 지켜주는 그림자와 같은 존재였다.
조상연은 자신의 기사 생활까지 접어가며 동생의 성공에 전념했고, 이는 조치훈이 일본 최연소 입단(11세), 최연소 9단(24세), 그리고 일본 7대 기전 그랜드슬램 석권 등 대기록을 세우는 데 튼튼한 기반이 되었다.

이어 “처음 소식을 듣고 깜짝 놀라 급히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런데 형수가 해준 밥을 세 그릇이나 먹는 모습을 보고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안심했다. 두 암 중에서 대장암 증세가 더 심했는데, 치료를 받으면서 식도암은 거의 사라진 것 같아 정말 다행”이라며 “치훈이의 바둑에 대한 열정은 여전하다. 몸 상태가 예전 같지는 않지만, 정기적으로 대국에도 참여하고 있고 컨디션도 점차 회복하고 있다”고 전했다.
#명인(名人) 획득이 가장 기억에 남아
동생의 수많은 활약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으로는 단연 ‘명인(名人) 타이틀 획득’을 꼽았다.
“명인은 당시 일본에서 가장 큰 타이틀이었다. 치훈이가 ‘명인을 따기 전에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항상 다짐하곤 했기에 더욱 기뻤다. 명인은 일본에서 상징성과 위상이 남다른 타이틀인데, 그 자리를 한국 기사인 조치훈이 차지했다는 것은 정말 큰 의미가 있었다”고 그는 회고했다.
조치훈 9단은 24세였던 1980년, 명인전 도전기에서 오다케 히데오 9단을 4승 1무 1패로 꺾고 우승컵을 거머쥐며 일본 바둑사에 큰 획을 그었다. 이는 한국 기사로서는 전례 없는 쾌거였으며, 이후 그가 세계적인 기사로 발돋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결과적으로는 성공했지. 뭐, 세계적인 기사가 됐으니까. 근데… 너무 어렸어.” 형은 동생 조치훈 9단 이야기를 꺼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지켜본 형으로서, 돌이켜보면 마음속 깊이 남은 아쉬움이 묻어나는 순간이었다.
“치훈이가 여섯 살 때 일본으로 데려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이른 나이였던 것 같다. 부모와 정을 쌓을 시간도 없이 떨어졌으니까.” 그는 덧붙여 어머니의 반응도 조심스레 전했다. “어머니는 생전에 나를 보고 ‘여섯 살짜리 애를 품에서 떼어간 나쁜 놈’이라고 하셨다. 농담처럼 말씀하셨지만, 당연히 서운한 진심도 섞여 있었으리라 생각한다.”

“왜 울지 않았느냐고 물으니, 나중에 치훈이가 ‘차라리 형이 세상을 떠났다면, 함께한 추억 때문에 많이 슬펐을 텐데… 아버지와는 그런 기억이 거의 없어서 눈물이 나지 않았다’고 하더라. 그때 내심 많이 씁쓸했다”고 말했다.
여든을 훌쩍 넘긴 나이지만, 바둑으로 이루고 싶은 꿈은 여전히 그의 가슴속에 남아 있었다.
“일본에 사둔 땅이 1500평 정도 된다. 딸 부부가 2년 정도 후에 은퇴할 수 있다고 해서, 그때가 되면 그곳에서 식당을 운영하면서 한국과 일본, 중국의 바둑 유망주들을 키워보고 싶다. 좋은 선생님들도 모시고 말이다. 수업료는 무료지만, 나중에 성공한 친구들이 상금을 따면 10% 정도만 기부해주면 고마울 것 같다(웃음). 어린 유망주들을 한 번 더 키워보는 것, 그것이 내 인생의 마지막 꿈이다.”
유경춘 객원기자 mast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