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설사 때릴 1000억대 폭탄도 준비
▲ 권오승 위원장 | ||
공정위의 담합 판정에 이은 거액의 과징금 부과 조치에 해당 업계가 강력 반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최근 들어선 공정위와 함께 국가의 녹을 먹는 국가기관들이 공정위의 활동 폭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금융당국과 수사당국 안팎에서 공정위를 향한 ‘영역 침범’ 논란이 제기되는 것이다. 그러나 공정위는 위축되기는커녕 위상 강화를 위한 행보에 더욱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 2월 공정위는 SK와 GS칼텍스 현대오일뱅크 에쓰-오일 등 4개 정유사에 대해 가격 인상 담합 행위를 근거로 과징금 526억 원을 부과하고 이를 검찰에 고발했다. 최근엔 삼성화재 현대해상 동부화재 LIG손해보험 메리츠화재 제일화재 흥국쌍용화재 한화손해보험 그린화재 대한화재 등 10개 손해보험사들에 대해 주요 상품 보험료 기준을 담합했다며 508억 원의 과징금 추징을 결정하고 해당 업체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공정위는 제약업계 공동마케팅의 문제점을 손보기 위한 작업에 착수하는 한편 레미콘 업계 가격 물량 조작 의혹도 파헤치고 있다. 경제분야 어느 곳에든 공정위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셈이다. 게다가 공정위 조사가 지나가고 나면 검찰의 압수수색이나 세무조사가 세트메뉴처럼 따라 나오는 경우가 많아 기업 입장에선 공정위의 ‘출현’ 자체가 두려움의 대상이 되고 있다.
얼마 전엔 한나라당 진수희 의원이 담합행위 근절을 위해 과징금 부과기준을 현재의 3배까지 높일 수 있도록 하는 공정거래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발의하기로 했다. 공정위가 휘두를 수 있는 칼날이 더 날카로워질 계기가 마련된 셈이다.
공정위 내부에서도 조사권한 확대를 통한 위상 강화 필요성을 외치고 나섰다. 얼마 전 권오승 공정거래위원장은 언론사 부장들과의 조찬 자리에서 “공정위의 업무가 중요해지고 있는 만큼 공정거래위원장 자리가 부총리급으로 격상돼야 한다”고 말해 다른 정부부처 인사들의 따가운 눈총을 사기도 했다.
권 위원장을 필두로 한 공정위의 위상 강화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곳은 바로 금융감독 당국이다. 공정위의 최근 손해보험사들에 대한 담합 판정에 대해 금감위는 공식 반응을 삼가고 있지만 내부에선 ‘공정위의 금감위 영역 침범’이라며 불만을 터뜨리는 것으로 알려진다. 양측의 미묘한 갈등 구도가 비단 어제오늘 일은 아니다. 지난 2000년에도 공정위의 손해보험사 자동차보험료 담합 판정 당시 금감위가 언짢은 반응을 보였으며 지난해 국민은행과 씨티은행에 대한 과징금 부과 때도 마찬가지였다. 금융당국에선 ‘공정위가 보험사 징계를 해대면 금융당국이 할 일이 없다’며 업무 영역 중첩에 대한 불만 여론이 고조되고 있다. 이에 대한 공정위의 논리는 ‘담합 조사에 관해서는 산업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공정위의 행보를 불편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금융당국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공정위는 지난 2월 4개 정유사에 대해 휘발유 등유 경유 등 제품에 대한 가격 담합 인상을 적발해 508억 원의 과징금을 부과하고 해당 업체들을 검찰에 고발했다.
그런데 이 사건을 담당한 서울중앙지검 형사6부는 경유 가격 인상을 담합한 혐의만 인정해 SK에 대해 1억 5000만 원, GS칼텍스와 현대오일뱅크에 대해 각각 1억 원의 벌금을 부과하는 내용으로 약식기소했다. 이를 두고 정관계 인사들은 공정위의 광폭 행보에 대한 검찰의 불편한 심기가 표출된 것으로 보고 있다. 검찰은 공정위가 담합 행위로 규정하고 고발한 휘발유 등유 경유 건에 대해 경유에 대한 담합 만을 범죄사실로 인정하고 에쓰-오일에 대해선 아예 담합행위와 무관하다고 결론내린 것이다.
정유업계는 공정위가 검찰 고발과 별도로 부과한 총 526억 원의 과징금이 너무 많다며 이의신청 및 행정소송을 진행 중이다. 이번 검찰의 결정이 과징금 재산정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셈이다.
최근 정관재계 인사들은 금융당국과 수사당국의 불편한 심기 표출에도 공정위가 위상 강화를 통해 압수수색까지 가능한 강제조사권까지 확보하려는 데 주목하고 있다. 공정위 인사들은 금융당국이 영역 침범을 운운하는 것에 대해서 무척이나 불쾌해 하는 것으로 알려진다. 과징금 부과 조치를 해도 검찰 기소 내용에 따라 명암이 엇갈릴 수 있는 현재 구도 또한 공정위 측이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최근 공정위 담합 조사결과가 계속해서 보도되는 것 또한 공정위 활동에 대한 우호적 여론 조성을 기대하는 것으로 풀이된다.
공정위가 준비한 다음 카드는 정유 업체 담합이나 손보사 과징금 건보다 더 무게감이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공정위는 지난 1년여 간 국내 6개 건설사들의 지하철 공사 수주 담합 의혹을 파헤쳐 온 것으로 알려진다. 타깃이 된 6개 사는 국내를 대표하는 대기업들의 건설 계열사들이다. 이 중 한 건설사엔 1000억 원의 과징금 부과가 예상되며 나머지 5개 건설사들도 수백 억 원의 과징금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알려진다. 국내 굴지의 재벌들이 줄줄이 공정위의 과징금 폭탄을 맞게 될 경우 이 또한 작지 않은 반향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몇몇 정치권 인사들은 “임기 말을 맞이한 현 정부는 검찰에 대한 통제력이 없는 상태에서 권력누수를 막기 위해 수사당국에 준하는 영향력을 지닌 정부부처 활동을 활용할 것으로 보이는데 그 중 하나가 공정위일 것”이라 입을 모으기도 한다. 권오승 위원장의 ‘부총리급 격상’ 발언이나 최근 공정위-금감위-검찰 간의 갈등구도 형성에 대해 ‘청와대가 공정위를 밀어주는 것 아니냐’는 호사가들의 관측이 조심스레 고개를 들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