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단체와 사측 총회꾼 “주총장서 짜고쳤다”
▲ 김병윤 씨가 지은 <고르디우스의 매듭>. | ||
지난 1월 이건희 삼성 회장은 ‘샌드위치 위기론’을 제기했고 삼성그룹은 곧바로 위기관리시스템을 가동했다.
문제는 이게 ‘삼성 위기론’으로 발전하고 있다는 점이다. 삼성의 간판인 반도체 사업 부분의 성과가 악화되자 삼성전자의 주가가 곤두박질치면서 ‘삼성 위기론’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고 이어 1·2분기 실적이 차례로 발표됐다. 이어 삼성그룹의 반도체 사업 부분에 대한 내부 감사와 전격적인 인사, 삼성전자에 대한 세무조사 사실이 이어지면서 이 회장이 주창한 샌드위치 위기론은 ‘삼성 위기론’으로 완벽하게 치환됐다. 그래서일까. 최근 삼성그룹은 이례적으로 반기실적 보고서를 발표하며 삼성위기론 진화에 나섰다.
삼성의 내부에 어떤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나는 것일까. 마침 이런 위기의 원인에 대해 삼성 내부에서 수십년씩 몸담았던 사람들의 문제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그중 하나는 삼성에 20년 가까이 몸담았던 전직 삼성맨 김병윤 씨가 삼성 등 재벌기업의 병폐를 지적한 책 <고르디우스의 매듭>. 책 내용 중 그가 직접 겪은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지금껏 일반에 잘 알려지지 않은 부분을 발췌했다.
#기업의 도덕성
1990년대 중반 삼성그룹에서는 수천만 달러의 거금을 들여 ‘드림21’이라고 불리는 거대한 유람선을 사들였다. 이 유람선은 삼성그룹 임직원 교육에 활용될 예정이었으나 두 번의 항해 후 거제도 앞바다에서 장기간 방치되고 있었다.
그룹에서는 ‘돈 먹는 하마’가 돼 버린 유람선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대두됐다. 가만히 서 있어도 고비용이 들어가는 골칫덩이를 누가 도입했느냐는 책임을 물을 경우 다수의 사람들이 영향을 받게 될 수 있었다. 결국 구조조정본부에서 2002년 무조건 처분하라는 지시를 내렸고 SK해운이 발 벗고 나서서 2003년 초에 시쳇말로 ‘똥값’에 처분해버렸다. 이로 인해 발생한 적잖은 손실을 계열사가 부담한 것은 물론이다.
거대 호화유람선이 대기업의 합동작전에 의해 이렇게 하루아침에 증발해 버렸다. 그리고 조용히 묻혀버렸다.
#시민단체와 ‘짝짜꿍이’?
필자가 삼성그룹에서 근무할 때 주주총회에 총회꾼으로 참석해서 경험한 일이다. 총회장에서 유명한 사회단체가 주주를 대변해 자신들의 입장을 밝히는 시위를 할 것이라는 정보를 미리 입수했던 터라 회사에서는 총회꾼들을 모아놓고 사전에 대본을 작성하는 등 대응방안을 강구했다.
필자도 그 일원으로 참석했는데 회사의 법률자문회사에서 참석한 변호사들은 이미 사회단체가 주장할 내용에 대해 거의 파악하고 있었다.
알고 보니 사회단체와 사전 조율을 통해서 그들이 어느 정도까지 자신들의 주장을 펼칠 것인지에 대해 의견 조정을 마친 상태였다. 세칭 ‘짜고 치는 고스톱’과 같은 사전 각본이 준비돼 있었던 것이다. 결국 당일 총회꾼으로 참석해보니 실제로 거의 대부분이 각본대로 진행되었고 한 부분 정도가 달랐는데 이것마저 흐지부지 지나가고 말았다.
▲ 이학수 윤종용 부회장 등 임원진(위 사진)과 유람선 ‘드림21’호. | ||
삼성의 인맥관리 방식은 철저하게 조직적이고 심층적이다.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구조조정본부(현 전략기획실)나 경영층에서 직접적으로 나서서 일을 처리하기보다는 인맥을 활용해서 개별적으로 접촉하도록 한다.
다시 말해서 해당 공무원을 매수할 필요가 있을 경우에는 내부적으로 파악된 인맥관리 계보에서 이 사람과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사람을 찾는다. 그리고 이 내부 직원을 통해 정치자금이나 떡값을 전달하게 한다. 추후 자금 전달이 문제가 되더라도 기업은 해당 인사와의 관계를 부인할 수 있고 임직원의 개인적인 친분으로 이뤄진 일이라고 변명할 수 있다. 기업은 원하는 효과를 챙기면서 법적 책임공방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
또한 삼성은 정·관·검·경을 막론하고 일단 자신들이 관리하는 인맥에 대해서는 그들의 인사 문제에까지 관여해서 원하는 방향으로 이뤄지게 한다. 관직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곧바로 계열사에 자리를 마련해주는 ‘자상한 배려’도 아끼지 않는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거대 재벌의 힘을 과시하고 해당 인물을 관리하는 것이다.
#가신의 문제
삼성에서는 오래 전부터 일정 기간 근무한 사람(주로 과·차장급)을 선발해서 유학을 보내는 제도가 있었는데 2003년 갑자기 근무 기간이나 직급에 상관없이 자격을 심사해서 선발하는 것으로 사규를 개정했다. 개정 이유는 유학을 받아주는 외국의 대학에서 오랜 회사 근무 경력자보다는 변화 수용력이 높은 20대를 선호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충분한 현장 경험이 없을 경우 사례 위주의 수업 형태와 수업 참여도를 중시하는 외국의 학습 현장에 적응하기 어렵고 당연히 학습효과도 떨어질 수 있다는 문제가 있다. 또한 경력이 일천한 사원의 경우 유학을 마친 후 다른 기회를 잡아 회사를 등질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아무튼 당시 유학자격 심사 기준이 개정된 데는 의심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제도 변경이 이뤄진 때는 공교롭게도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 실장의 아들이 신입사원으로 입사해서 바로 외국어 과정에 들어가 영어실력을 키운 시점과 일치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최고 경영자의 자제에게 회사 입사에 대한 특혜를 주는 것도 모자라 유학 특혜까지 베풀기 위해 규정을 고쳤다는 의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 삼성의 간판인 반도체사업부문의 실적이 악화되면서 ‘삼성 위기론’이 일고 있다. 삼성에서 수십년간 몸담았던 인사들의 문제 제기와 해법 제시도 잇따르고 있다. 이건희 회장은 과연 어떤 해결책을 구상하고 있을까. | ||
필자가 현장에서 경험한 것을 토대로 분석해 본다면 삼성의 생활가전 분야 경쟁력이 약화된 근본적인 이유는 임금구조의 왜곡에 있다고 생각한다. 삼성은 금융위기를 극복하고 원화가 과도하게 절하돼 있을 때 반도체를 중심으로 확보된 이익에 근거해 전반적인 임금 인상을 시행함으로써 생활 가전 부문의 경쟁력이 떨어지게 된 것이다. 즉 삼성전자 생활가전 부문이 지속적인 적자를 내고 있는 건 제품을 만드는 종업원들의 봉급 수준이 해외 경쟁사에 비해 높다는 점에 기인하는 것이다.
임금의 왜곡은 제품의 경쟁력을 떨어뜨리는 데 그치지 않는다. 이것은 유능한 인재의 업계 간 이동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삼성그룹의 경우 과거에는 계열사 간 사장과 임원의 이동이 자유스러웠는데 최근 들어 이런 현상을 찾아보기 어렵게 됐다. 삼성전자 사장이나 임원의 경우 다른 계열사 사장이나 임원에 비해 연봉에서 엄청난 차이가 날 만큼 많이 받기 때문에 타 계열사로의 이동이 당사자는 물론이고 이를 기획하고 집행해야 할 사람들마저 받아들이기 힘든 상황이 돼버린 것이다. 아마 인재 활용의 귀재였던 고 이병철 회장도 이런 상황에서는 묘수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순환 근무는 임직원의 재능을 활용하는 측면도 있고 대리인이 자신의 아성을 쌓아 권력이 집중되는 문제를 해결하는 등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이것이 어려워지다 보니 조직의 동맥경화 현상이 심해지고 있다.
<고르디우스의 매듭>에는 없는 내용이지만 최근 터져나온 병역특례 비리 의혹 중에 삼성전자가 투자한 회사에 재직 중인 삼성 출신 고위 임원이 삼성에 현역으로 몸담고 있는 임원의 아들을 병역특례자로 근무시켰다는 의혹도 있었다. 이 회사는 삼성전자와 거래관계에 있다.
이 사례에 대해 재계 일각에서는 ‘삼성 위기론’의 단적인 예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이 회사는 출범이 삼성그룹의 구조조정과 관계가 있다는 점, 구조본 임원들의 역학관계가 맞물려 있다는 점에서 삼성그룹의 딜레마가 총체적으로 드러난 사건이라고 볼 수도 있다. 즉 이미 권력화한 삼성그룹 주요 보직 인사들과 납품업체의 관계설정 문제가 적나라하게 드러난 셈이다.
삼성전자는 그간 납품업체에 대해 삼성 직원들이 개인비리를 저지르지 못하도록 엄격히 단속한다는 방침을 수차 발표했지만 이번 병역비리 사건에서 그동안의 ‘단속’이 정작 그룹 핵심 임원들 간에는 공염불이었음이 드러난 셈이다.
정리=이성로 기자 roile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