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개조·공무원 개조…밀어붙여!
▲ 청계천 복개구조물을 점검하고 있는 당시 이명박 서울시장. |
<2> 서울시장 시절
우려는 현실이 됐다. 이명박은 당선이 확정된 2002년 6월 13일 밤, 알고 지내던 기자들과 만난다. 승리를 만끽할 새도 없이 예의 그 일사불란함으로 움직였다. 그 자리에서 그는 “서민촌인 개포동 재건축 단지의 용적률을 재검토하겠다” “지하철을 연장 운행하겠다” “종로 을지로 등 도심 주요 도로의 일방통행화를 추진하겠다”는 등의 공약 외 시정 방침을 설명하며 지도 ‘편달’ 협조를 당부한다. “주사는 맞는 순간 잠시 아플 뿐”이라며. 서울시장 재직 내내 그를 따라 다녔던 ‘불도저 시장’이라는 별칭이 붙여진 순간이었다(뒷얘기지만 이명박은 ‘불도저 리더십’이란 말을 굉장히 싫어한다. 개발 독재 시대의 밀어붙이기식 리더십을 연상시킨다는 이유에서).
이명박은 취임 4개월 만인 그해 10월, 서울시정 관련 계획을 마구 쏟아낸다. ‘비전 서울 2006’이라는 이름으로 마곡지구 개발, 강북 뉴타운 개발 등 ‘서울시정 4개년 계획’을 한꺼번에 내놓는다. 서울을 개조하겠다는 불도저 시장의 야심찬 계획. 그는 비판이 일자 직접 기고문을 써 일간지에 게재하기도 한다. ‘개발이 아니라 균형발전’이란 제목의 글에는 “지역균형발전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원래 변화는 고통스럽다. 희생이 따르게 마련이다. 그러나 시민의 성원이 있는 한 서울시는 전진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라고 썼다. 대선이 있던 그 해(2002년), 이명박의 ‘비전’은 행정 절차를 무시한, 인기를 의식한 선심성 발언이라며 당시 여당으로부터 뭇매를 맞는다. 하지만 그는 의지를 꺾지 않았다.
▲ 히딩크 전 감독이 서울시로부터 명예시민증을 받는 공적인 자리에 반바지 차림의 아들 시형 씨를 불러 기념촬영을 하게 해 논란이 일었다.사진제공=오마이뉴스 |
정치적 사고도 부족했다. 각종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이명박 시장의 말이 길어지면 공보 담당자가 “다른 일정이 있으니 이쯤에서 그만…”이라고 말을 잘랐다. 이명박은 “내가 실수라도 할까봐 그러냐?”면서, 할 말은 다 했다.
하지만 이명박의 장점도 많았다. 복지나 환경, 문화에 대한 식견이 부족하다, 행정은 아마추어다라는 수군거림에도 그는 ‘청계천 복원’이라는 분명한 화두를 던졌고, 해냈다. 직접 동분서주하며 “청계천만 복원하면 우리가 투자하겠다”는 세계 각지 투자자로부터 확답을 받아냈다. 서울시 개발 과정에 외국 자본을 끌어들여 청계천 주변을 국제 금융기관과 다국적 기업을 위한 인텔리전트 인프라로 만들겠다고 했다. 관료형이었다면 상상하기 어려운 상상력이다.
“개발시대 공사판으로 만들거냐?”는 세간의 비판에서도 뚝심 있게 밀고 나갔다. 이명박 스스로 그런 비판에 대해선 “개발시대 최고 경영자로서 자신에게 각인된 강렬한 이미지가 편견을 낳고 있을 뿐”이라고 여겼다 한다.
이명박은 취임 초기부터 공무원 행태에 대해 적잖은 불만을 제기한 바 있는데 종합하자면 이런 투였다. “민간 기업에서는 돈을 스스로 벌어서 쓰는데 공무원은 시민이 낸 세금도 제대로 써야 할 데 쓰지 못하냐? 왜 책임경영 정신이 없느냐? 공공 분야에서도 경영 마인드가 필요하다. 내가 개조하겠다.”
그는 시청 간부회의를 오전 8시로 앞당겼고, 간부회의 때는 6, 7급 직원까지 불러 자유토론을 시켰다. 현대건설 회장 때 일과도 고스란히 지켰는데, 새벽 4시 45분쯤 기계적으로 일어나 그날 회의록을 검토하고, 운동을 한 뒤 7시에 출근준비, 지하철을 타고 시장실에 도착한 7시 30분부터는 ‘30분 단위’로 업무를 하는 식이었다. 모든 저녁 약속에 참석했고, 특히 국제행사에는 호스트로서 빠지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는 시간은 밤 11시나 12시쯤. 서너 시간 자는 것이 고작이었다.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직 때 자신의 재산에 대해서도 허심탄회하게 밝혔는데 당시 서울시 공직자윤리위원회에 공개된 재산은 186억 원이었다. 이에 재산 형성 과정을 묻는 인터뷰가 많았다. 그의 답변은 이랬다.
“못 밝힐 이유가 없습니다. 현대 입사 이후 떠날 때까지 재산 관리를 회사에서 해줬습니다. 현대그룹 1년 매출이 8억 원일 때 입사해 50조 원으로 키웠습니다. 종업원이 100명 남짓에서 16만 명으로 늘어나는 것을 보고 나왔으니 재산 186억 원이 너무 많다고는 할 수 없지 않습니까? YS가 집권해 재산 많은 공직자를 막 몰아낼 때 제가 SBS에 나가 이렇게 얘기한 적도 있습니다. ‘나는 깨끗하게 돈을 벌어 부자 되기를 희망하고, 남도 그렇게 되기를 바란다. 부정한 돈은 받지 않았다. 가난하고 깨끗하게 살겠다는 것이 어떻게 인생의 목표가 될 수 있는가? 깨끗한 돈으로 부자가 되는 것이 젊은 사람들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그게 자본주의다’.”
▲ 2002년 9월 ‘다시보는 월드컵’ 사진전 개막식에 참석한 모습. 사진공동취재단 |
기업 목표(시정 목표)를 제시하고 그 과정에서 이윤을 추구(예산 절감)하며, 부하직원(시 공무원)과 함께 언제나 현장에 있되 세간(여론)의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 ‘20대 사원, 30대 임원, 40대 CEO’가 된 그가 체화한 것을 실행에 옮겼을 뿐이었다. 서울을 통치하거나 관리하는 것이 아닌 경영하는 모습, 그는 항상 “쓸 수 있는 예산을 다 쓰면서 하는 사업은 어떤 시장이든 할 수 있다”고 했다.
이명박의 ‘대권 길 닦기’는 취임 2년이 지난 2004년부터 본격화한다. 당시 이명박 시장과 이재오 한나라당 사무총장, 홍준표 전략기획위원장의 커넥션 의혹이 일었다. 실세 재선 의원이자 친분이 두터운 이 총장과 홍 위원장을 지렛대 삼아 당내 우군화 정치 작업에 나선 것 아니냐는 관측이 쏟아져 나왔다. 본인들은 부인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실이었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이명박은 박근혜 대세론을 의식해 ‘2등 전략’을 구사해 왔다. 2007년 대선까지는 시간이 많으니 경쟁에 일찍 나설수록 경쟁자들의 표적이 된다는 것을 의식한 것으로 보인다. 정치적 발언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박근혜 당시 대표를 조용히 따라 가는 전략을 세운 것이다. 하지만 노무현 정부의 세종시 행정수도 이전에 대해 이명박은 강경하게 치고 나갔다. 그래서 대권 야욕을 숨길 수 없었던 것이다. 당시 이명박은 “서울시민 70%가 반대하는데 서울시장이 가만있으란 얘기냐”는 논리를 폈고, 박 대표가 행정수도 이전에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는 것을 에둘러 지적하고 나선다.
이명박의 용인술은 한번 연을 맺은 사람은 치명적 결함이 없는 한 내치지 않는다는 것으로 요약된다. 그가 국회의원으로 있던 여의도 시절에는 정치 인사들에 대한 인맥지도를 그렸고, 서울시장 시절에는 경제, 사회, 문화, 환경 등 시정과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을 개척하는 데 공을 들였다. 당시 한나라당의 좌장이었던 친형 이상득 의원은 의원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항상 이명박이 거론될 수 있도록 분위기를 잡는다. 여의도 정가에 대한 풍향, 기류, 전망 등을 수시로 주고받았다. 정태근 정무부시장은 시 의회와 시청 출입기자들을, 조해진 정무보좌관은 이명박의 정치적 입장을 정치부 기자들에게 전달했으며, 박영준 정무 담당 국장도 가세한다. 당시에도 한나라당 소장파로 분류된 원희룡, 남경필 의원이 이끈 ‘새정치수요모임’도 이 시장 주변에서 세력 모으기에 나선다. 강만수 서울시정개발연구원장과 백용호 이화여대 정책대학원 교수는 브레인 그룹을 형성해 나간다. 유인촌 서울문화재단 대표는 문화계 창구 역할을 했다.
이명박은 2002년 12월 대선에서 당선되는 후보는 역사 속으로 사라지는 ‘3김 시대’와 새롭게 등장하는 세대를 잇는 징검다리 역할을 할 것으로 내다봤고, 2007년 대선에서는 국민이 분명 새로운 사람이 나올 것을 기대한다고 점쳤다. 실행에 옮긴 것이다.
최기서 언론인
정주영, 박정희와의 관계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직 때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사실 우리 두 사람의 관계는 (정 회장) 아들이나 형제들도 잘 모른다. 나만 (2002년) 민자당으로 가니까 기자들이 우리 둘의 관계를 취재하기 바빴지만 정 회장이나 내 입에서 둘의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다. 그때 나는 돈을 많이 가진 기업주가 권력까지 잡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굽히지 않을 건 굽히지 않았다. 1만 원짜리 내기 골프할 때다. 퍼팅에서 기브(컨시드)를 인심 좋게 주지 않았다. 정 회장이 기브를 달라고 하는데 내가 안 된다고 하니까 캐디들이 깜짝 놀란 적도 있다. 내기가 끝나봐야 10여만 원 왔다 갔다 하는 정도지만 정 회장이나 나나 지기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이명박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한다.
“박 전 대통령을 경제인 입장에서 평한다면 아주 뛰어난 지도자다. 학창시절에는 반 박정희를 외쳤는데, 재계에서 일하면서 ‘이 사람이 이 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최기서 언론인
이명박은 서울시장 재직 때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의 관계를 이렇게 말한다.
▲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과 함께. 사진제공=새누리당 |
이명박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대해서도 이런 말을 한다.
“박 전 대통령을 경제인 입장에서 평한다면 아주 뛰어난 지도자다. 학창시절에는 반 박정희를 외쳤는데, 재계에서 일하면서 ‘이 사람이 이 나라 경제발전에 크게 기여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최기서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