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면 깔수록 의혹투성이… ‘MB가 더 쉽다’ 여권 침묵 지원
▲ 이명박 당선인이 대선 다음날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참배한 후 방명록을 작성하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
2006년 7·11 전당대회는 이듬해 대선을 앞두고 그 어느 때보다 치열하게 치러졌다. 이명박과 박근혜의 ‘대리전’양상이었던 탓이다. 친이계에서는 이재오가, 친박계에서는 강재섭이 나섰다. 당이 깨질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일 정도로 과열됐다. 강재섭이 당 대표가 된다.
당시 일화다. 서울 잠실체육관에서 열린 전당대회에서 일곱 번째 연사였던 이재오가 연설을 시작하자 연단 건너편에 있던 박근혜 전 대표가 연단 오른편 기표소 옆으로 자리를 옮긴다. 카메라 플래시가 엉뚱한 곳에서 터지면서 이재오의 연설에 흐름이 끊겼다. 박근혜의 ‘자리 이동 사건’이다. 이재오는 낙선 뒤 배신 운운하며 “내가 원대대표를 할 때 그렇게 잘 모셨는데, 한마디로 배신행위 아니냐”고 성을 냈다. 하지만 박 전 대표는 이명박 전 서울시장과 손학규 전 경기도지사가 있는 연단 오른편으로 옮겨달라는 사진기자들의 요구에 응한 것이었다. 촌극으로 마무리됐지만 사소한 것 하나도 정치 공방으로 비화되던 때였다. 대립은 날카로웠다.
이런 첨예한 갈등과 반목은 이명박이 자초한 셈이었다. 전당대회가 있기 전 서울시장 퇴임 기자회견에서 이명박은 “개혁적이어야 할 것 같다. 보수당, 부자당, 영남당 등에서 벗어날 수 있는 이미지여야 한다. 지난 대선의 김대업 사건 같은 공작정치를 막을 수 있는 뱃심, 야성, 개혁성을 골고루 갖춰야 한다”며 당대표 감을 설파했다. 사실상 이재오 당 대표론에 힘을 실은 것이다. 박근혜가 발끈한 것은 당연했다.
지난 이야기지만, 이명박은 실상보다 많은 ‘특수’를 누렸다. ‘청계천 특수’, ‘버스중앙차로제 특수’에다 2006년 북한의 핵실험으로 ‘안보에 강한 것은 여성이 아닌 남성’이라는 ‘성별 특수’까지. 무엇보다 먹고살기 어렵다, 일자리가 없다, 집값이 너무 올랐다는 민생 하소연이 들끓으면서 ‘경제CEO 특수’를 가장 크게 누렸다. 그가 이뤄낸 성과이기도 했지만 포장이 잘됐고, 시류에 들어맞았으며, 당시의 시대정신이 그러했다. 대세는 ‘경제’였다.
사사건건 대립하던 이명박과 박근혜는 2007년으로 넘어가면서 “루비콘강을 건넜다”는 말로 남이 보기에 남보다 더한 남남이 된다. 박근혜 대세론을 뛰어넘은 이명박이 여론조사에서 박근혜를 압도하면서부터다. 이명박의 황제테니스 사건 등 박근혜 측의 네거티브와 검증이 본격화됐는데 지지율이 추락해 하방경직화한 박근혜 쪽에서는 벼랑 끝 전술을 쓸 수밖에 없었다. 둘의 후보 검증 갈등은 결국 이명박과 한나라당 지지도가 동반추락하는 사태를 빚었고, 잘 나가던 한나라당은 ‘환(患)나라당’으로 불리게 된다.
이명박 전 서울시장의 보좌관 출신이던 김유찬 씨의 폭로 기자회견은 파괴력이 컸다. 김유찬은 이명박이 자신에게 선거법 위반에 관한 위증을 교사하며 20여 차례에 걸쳐 1억 2000만 원을 주었고, 해외 도피 자금으로 거액의 달러도 주었다고 폭로했다. 이명박 측은 처음엔 “고소하겠다”고 했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상대하지 않겠다”는 쪽으로 입장을 바꾼다. 명예훼손과 무고로 고소하게 되면 위증 교사나 금전 제공 여부를 조사받아야 하는데 만에 하나 작은 것이라도 사실로 드러나면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될 분위기였다. 특히 김유찬은 1996년 총선 당시 “개인적으로 충당한 선거 비용 1억 원을 갚아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명박이 이를 거부하자 선거 자금 의혹 등을 폭로한 것으로 알려졌었다. 재산이 수백억 원대로 추정되는 이명박이 1억 원을 해결하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면서 그의 돈과 사람 관리가 입방아에 올랐다. 하지만 김유찬이 공개한 자료 중 일부는 진술에 일관성이 없거나, 기억에만 의존하면서 증거능력 여부 논란이 일기도 했다.
▲ 친박계 강재섭이 친이계 이재오를 누르고 당 대표에 당선됐다. 이종현 기자 |
▲ 이명박-박근혜 대리전 양상으로 치러진 2006년 7월 전당대회. 이종현 기자 |
당시 열린우리당 윤원호 의원은 “미국 전역 교포신문에서 이명박 후보와 관련된 ‘에리카 김’ 이야기가 신문마다 다 나왔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에리카 김은 이명박과 서울에서 사업을 같이하다 공금을 갖고 미국으로 달아난 김 모 씨와 남매였다. 열린우리당 김혁규 의원은 이명박의 부인 김윤옥 씨가 열다섯 차례나 주소를 이전했다고 폭로했다. 강남에서만 열네 차례였는데 이명박도 이 부분은 시인하고 사과했다.
BBK 주가 조작 사건은 다시 떠오를 가능성이 큰 진행형 사건이다. 이 사건은 김경준(미국명 크리스토퍼 김)이 1999년에 설립한 회사인 BBK를 통해 주가 조작으로 수백억 원의 부당이익을 남기고 이 돈을 횡령한 것으로 김경준은 “이명박이 BBK의 실제 소유주이며 나도 피해자”라고 주장했다. 이명박은 자신도 김경준에게 사기를 당했다고 주장했다. 검찰과 특검은 김경준을 기소하고, 이명박은 무혐의 처분했다. 하지만 김경준이 2001년 12월 미국으로 도피하기 전인 2001년 7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횡령한 옵셔널벤처스 회사 자금 384억 원 가운데 200억 원가량이 10개의 국내 계좌로 송금된 의혹이 있다. 수신자 중 국내 법인은 다스(이명박의 맏형 이상은 씨 회사), 심텍(이명박 고대 후배 회사), 오리엔스(이명박 대학 동문 회사) 등 BBK에 투자한 기업들이었다.
처남 김재정 씨와의 이상한 부동산 거래도 도마에 올랐다. 이명박이 서울 서초구 양재동 대지 64평과 지하 1층, 지상 5층 건물을 1994년 12월 대부기공㈜에 팔았다는 내용인데 이 회사는 이명박의 맏형인 이상은 씨와 처남이 공동으로 설립한 회사였다. BBK 금융 사기 사건과 관련해 이명박이 실제 소유자일지도 모른다는 의혹을 받는 회사이기도 했다. 시가로 땅과 건물이 32억 3000만 원 정도였다.
이명박이 1977년 옥천군 이원면 강청리 16일대 임야 37만여 평을 샀다가 1982년 7월 처남에게 팔았다는 의혹도 있었는데 이 땅은 1970년대 중반 박정희 전 대통령이 행정수도 이전을 추진할 때 후보지 가운데 하나였다. 당시 이명박은 현대건설 사장이었다. 당시 현대건설은 이 인근에서 대청댐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내부자 정보를 이용한 투기 의혹이 아니냐는 내용이 나왔다. 김재정 씨가 1982년부터 1991년까지 전국 47곳의 부동산을 사들였는데, 그 가운데는 부동산 매입 직후 개발계획이 발표되면서 땅값이 급등한 곳이 있다는 의혹도 있었다.
그런데 당시의 범여권은 가만있었다. 까도 까도 끝이 없었지만 이명박을 거세게 공격하지 않았다. 왜일까. 여권은 한나라당 본선 후보로 이명박을 원했다. 제기할 의혹이 너무 많으니 “검증을 통해 한방이면 날릴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당시 박근혜는 한 인터뷰에서 “후보가 어떻게 살아왔느냐가 중요하다. 사람은 한꺼번에 바뀔 수 없다. 어떻게 살아왔는가를 보면 어떻게 나라를 이끌지 볼 수 있는데, 그것보다 정확한 것은 없다. 나는 당 대표를 지내면서 하루가 멀다 하고 흑색선전을 당했기 때문에 누구보다 검증돼 있다. 검증을 잘못해 대선에서 패배하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명박은 선거인단 투표에서는 졌지만 여론조사에서 앞서 한나라당 대선 후보로 확정된다.
이명박은 대선 후보 등록을 마친 2007년 11월 25일 “국민 여러분이 오는 12월 19일 유권자 혁명을 일으켜 달라. 국민성공시대가 열리고 이명박의 실용정치, 희망정치가 시작된다”고 목청을 높였다. 경선보다도 재미없는 밋밋한 대선을 치르고 나서 이명박 대통령이 탄생하게 된다.
최기서 언론인
MB의 재산
당시 이명박은 큰 재산가였다. 소유 재산의 주류는 부동산. 이명박은 근린생활시설 2건, 상가 1건, 대지 1건, 단독주택 등 모두 5건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부동산 신고가액 합계가 171억 원을 웃돌았다. 14, 15대 국회의원, 서울시장을 역임하는 동안 재산 신고 대상인 공직자 중에서는 늘 수위권이었던 그는 2006년 6월 30일 서울시보를 통해 공개된 재산등록 사항에 모두 179억 6750여만 원을 써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영포빌딩의 재산신고 가액은 62억 8700여만 원었는데 29년 전 구입원가는 4527만여 원으로 땅값이 무려 139배나 뛰었다. 이명박은 강남 요지 알짜 부동산 4건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특히 서초구 양재동 영일빌딩은 32년 사이에 1968배가 폭등해 218만 5000원에 산 것이 43억 원이 됐다. 이명박은 이 부동산의 경우 당시 “서울시 지하철 공채 체비지”라고 주장, 서울시가 지하철 건설자금 조달을 위해 공채를 발행했는데 이명박이 구매 요청을 받았고, 이후 정책이 바뀌어 공채 원리금 중 일부를 현금이 아닌 대지로 대신 돌려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전체 재산은 부동산 가격을 어떤 기준으로 매기느냐에 따라 달라졌고, 일부에서는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하면 100억 원이나 더 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차명 재산까지 8000억 원’이라는 이야기도 회자했지만 증명되지는 못했다.
당시 이명박은 큰 재산가였다. 소유 재산의 주류는 부동산. 이명박은 근린생활시설 2건, 상가 1건, 대지 1건, 단독주택 등 모두 5건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것으로 부동산 신고가액 합계가 171억 원을 웃돌았다. 14, 15대 국회의원, 서울시장을 역임하는 동안 재산 신고 대상인 공직자 중에서는 늘 수위권이었던 그는 2006년 6월 30일 서울시보를 통해 공개된 재산등록 사항에 모두 179억 6750여만 원을 써냈다. 서울 서초구 서초동 영포빌딩의 재산신고 가액은 62억 8700여만 원었는데 29년 전 구입원가는 4527만여 원으로 땅값이 무려 139배나 뛰었다. 이명박은 강남 요지 알짜 부동산 4건도 소유하고 있었는데 특히 서초구 양재동 영일빌딩은 32년 사이에 1968배가 폭등해 218만 5000원에 산 것이 43억 원이 됐다. 이명박은 이 부동산의 경우 당시 “서울시 지하철 공채 체비지”라고 주장, 서울시가 지하철 건설자금 조달을 위해 공채를 발행했는데 이명박이 구매 요청을 받았고, 이후 정책이 바뀌어 공채 원리금 중 일부를 현금이 아닌 대지로 대신 돌려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의 전체 재산은 부동산 가격을 어떤 기준으로 매기느냐에 따라 달라졌고, 일부에서는 공시지가를 기준으로 하면 100억 원이나 더 늘 수 있다고 주장했다. ‘가차명 재산까지 8000억 원’이라는 이야기도 회자했지만 증명되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