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맛에 맞는 ‘법’ 짓기 위해 뜸 들이나
▲ 이건희 회장 | ||
그룹의 기대를 한몸에 받고 있는 삼성생명이지만 고민이 많다.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함에 따라 금융계열사의 비금융계열사 지분 5% 초과 보유를 피해야 한다.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26%를 보유, 2.26%(의결권 행사 가능한 보통주 기준)의 처분이 불가피한 셈이다.
그런데 아직 조치가 없다. 심지어 삼성생명의 지분 처리 방안에 대한 소문조차 나돌지 않는 것. 업계 사이에선 ‘이 회장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매각을 고려하지 않고 있다’는 관측마저 제기됐다.
만약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을 보유하는 데 자신감을 갖고 있다면 이는 금산법 개정안에 대한 모종의 조치 가능성을 엿보고 있다는 이야기. 정치권에선 삼성의 국회 담당 정보맨들이 ‘금산법 개정안 통과를 주도한 의원들이 대부분 비례대표라 내년 4월 총선에서 국회 재입성을 기약할 수 없다’는 점에 주목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일부 정파의 대선후보 선출 과정에서 반 삼성 의원이 낮은 순위로 처진 것에 대해 삼성 측이 표정관리를 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대기업 정보 담당자들 사이에선 ‘삼성전자 지분 처분보다는 금산법 개정안 폐지에 주력할 것’이란 관측이 대세다. ‘금산 분리에 반대하는 한나라당이 올 대선을 통해 집권하고 내년 총선에서 반 삼성 정치인들이 도태된다면 금산법 개정안 유예기간을 늘리거나 무효화까지도 도모해볼 수 있다는 자체 판단이 섰다’고 보는 것.
그러나 삼성생명이 금산법 을 피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삼성생명 상장 이후 주식 폭등으로 인해 삼성생명 지분 13.34%를 보유하고 있는 삼성에버랜드가 금융지주사로 선정될 가능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금융지주사법에 따라 에버랜드 자산에 포함된 금융계열사 지분의 가치가 에버랜드 자산총액의 절반을 넘을 경우 에버랜드는 금융지주사로 지정돼 비금융계열사 지분을 가질 수 없다. 업계 인사들은 삼성생명이 상장될 경우 현행 법규하에서 에버랜드가 금융지주사 선정을 피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렇다고 이 회장이 삼성생명 상장을 포기할 수도 없다. 이 회장 측이 삼성자동차 채권단에 보상 차원으로 넘겨준 삼성생명 주식의 가치는 상장이 돼야 채권단이 요구하는 수준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삼성생명 상장은 순리대로 진행하면서 에버랜드의 금융지주사 선정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은 금융지주사법을 손질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 삼성그룹은 그동안 정치권과 정부부처를 담당하는 직원들과 정보맨 그리고 내부 연구조직 등을 총동원해온 것으로 알려진다. 금산분리 완화와 이에 따른 금융지주사법 개정 여론 확대에 힘을 기울여 온 것이다.
지지율 1위를 달리고 있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금산 분리 완화를 외쳐온 점도 삼성 측의 여론 조성 작업과 함께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최근 분위기에 대해 정·관·재계의 몇몇 인사들은 “이 회장이 삼성생명을 유지하기 위해선 대선과 총선을 통한 정치세력의 교체, 그리고 이에 따른 관련 법규 개정밖엔 없다고 보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
이건희 회장이 삼성생명의 지분구조를 유지하려는 또 다른 이유는 자금조달에 있다는 이야기도 나돈다. 만약 금산법 개정안 시행에 따라 삼성생명이 지닌 삼성전자 지분 2.26%를 매각하게 되면 이 회장 측의 삼성전자 지배력도 그만큼 약해진다.
일부 삼성 비판론자들은 “이 회장 일가가 자신의 돈 대신 고객의 돈으로 지배구조를 유지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삼성의 순환지배구조에서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는 삼성생명의 자금동원력을 두고 하는 말이다. 금감원에 공시된 삼성생명의 지난해 영업수익은 23조 원을 상회하며 이 중 보험료수익만 15조 원이 넘는다.
이건희 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율은 1.86%에 불과하다.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율(7.26%)의 4분의 1 수준이다. 이 회장의 삼성전자 지분율을 높이지 않고 삼성생명이 삼성전자 지분율을 유지하는 이상 ‘남의 돈을 통한 지배구조 유지’라는 반 삼성 인사들의 비판을 잠재울 수는 없다.
그렇다고 이 회장 일가가 당장 삼성전자 지분을 추가 확보하기에도 부담스러울 듯하다. 삼성전자 보통주 총수(1억 4730만여 주)와 8월 30일 주가(57만 2000원)를 기준으로 환산해보면 삼성전자 지분 1% 확보하는 데 필요한 금액은 약 8400억 원에 이른다.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 5% 초과분인 2.26%를 사들이는 데 2조 원가량이 필요한 셈. 대기업 정보 담당자들은 “무엇보다도 돈 문제 때문에 이 회장이 삼성생명의 지분구조 유지를 위한 법 개정에 희망을 걸고 있을 것”이라 입을 모으기도 한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