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배구조 ‘핵’으로 무럭 무럭 크거라
▲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 입법예고로 재벌들이 공익법인을 지배구조 유지·승계에 악용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사진은 이건희 삼성 회장. | ||
삼성그룹은 그동안 정·관계와 시민단체 등으로부터 지배구조 개선에 대한 요구를 수없이 받아왔다. 금융산업의 구조개선에 관한 법률(금산법) 개정안과 금융지주사법 등도 삼성의 지배구조를 압박해왔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공익법인의 동일 기업 주식 출연·취득 제한을 현행 5%에서 20%로 완화하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일부 개정안을 입법예고하면서 삼성이 기존의 지배구조 고수를 모색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증여세가 필요 없는 공익법인을 활용해 현재의 환상형 출자구조를 유지할 수 있는 방안이 거론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칫국은커녕 배추도 절이기 전’부터 이 방안에 대한 비판론이 제기되고 있다. 때문에 앞으로 재벌가의 공익법인을 둘러싼 논란은 재계의 뜨거운 감자로 자리 잡을 전망이다.
삼성그룹의 지배구조 관련 최대 고민거리는 금산법 개정안과 금융지주사법 적용 여부일 것이다. ‘금융 계열사와 비금융 계열사 간 상호 지분 5% 초과 보유 금지’를 골자로 한 금산법 개정안이 시행되면 삼성생명이 가진 삼성전자 지분(7.26%) 중 일부 매각이 불가피하다. 삼성생명이 상장되면 삼성에버랜드가 보유한 삼성생명 주식 가치가 폭등해 삼성에버랜드의 금융 계열사 지분 가치가 자산 총액 절반을 넘어 금융지주사로 지정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에버랜드가 비금융 자회사와 손자회사를 거느릴 수 없게 된다. 이런 까닭에서 삼성그룹의 지배구조에 대한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끊임없이 제기되는 것이다.
현재로선 이건희 회장 일가가 1% 지분 매입에 1조 원 가까이 드는 삼성전자 지분 추가 매집에 쌈짓돈을 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차 채권단이 보유한 삼성생명 지분 가치 상승이 필요하므로 삼성생명 상장을 마냥 미룰 수도 없다. 결국 개인 돈을 들이지 않고 현재 지배구조를 유지하려면 대체 수단이 필요한데 마땅한 카드로 공익법인 활용이 거론되는 것이다. 공익법인으로의 증여는 5% 이하 지분일 경우 별도의 세금을 물지 않는다. 때마침 정부가 공익법인의 특정 법인 지분율 상한선, 즉 세금을 물지 않고도 지분을 건네줄 수 있는 한도를 기존의 5%에서 20%로 확대하는 입법예고를 한 터라 삼성 같은 환상형 출자 재벌이 눈독을 들일 만하다.
실제 삼성그룹은 1970년대 삼성문화재단을 지주회사로 하는 지배구조를 검토한 바 있다. 삼성그룹 계열사 사장을 두루 거친 이대원 삼성중공업 고문은 최근 저서에서 “(당시 내부 건의서엔) 삼성문화재단을 지주회사로 하여 각 계열회사의 주식을 문화재단의 기본 재산으로 출연하여 문화재단이 대주주가 되고 그 과실(배당금)로 문화재단의 목적사업인 사회복지 사업을 전개한다는 것이다. 이를 통해 증여나 출자는 비과세 혜택을 받고 그룹의 지배구조도 문화재단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식 지배형태를 갖출 수 있는 이중 효과가 있었다”고 회고했다. 하지만 이 방안은 당시 탈세를 우려한 정부에 의해 무산됐고 법령 개정으로 공익법인의 주식 취득이 현행 기준으로 강화됐다. 그 기준이 다시 완화될 가능성이 열린 것이다.
이를 두고 여러 재계 인사들은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외부 공익 활동을 늘리기 위해 삼성문화재단 같은 그룹 내 다른 공익법인들보다 더 많은 돈을 수혈받는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의 사회활동이 대외적으로 많이 노출돼 지명도를 높이면 이 재단이 계열사 지분을 보유하는 정당성을 강화할 수 있다는 지적이다. 지분 보유를 통한 배당금액이 사회활동에 쓰일 것이란 기대감을 높이려는 포석으로 풀이되는 것이다. 아울러 삼성 지배구조의 중심이지만 금산법 개정안과 금융지주사법 등으로 불투명해진 삼성생명의 자리를 삼성생명공익재단이 물려받기 위한 전초작업이 진행되는 것으로 보는 시각도 고개를 들고 있다.
계열사 지분 보유 현황 때문인지 그동안 삼성생명공익재단보다는 삼성문화재단이 그룹 지배구조에 미칠 변수가 많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삼성문화재단은 삼성생명(4.68%) 삼성화재(3.16%) 삼성물산(0.08%) 삼성에버랜드(0.88%) 삼성전자(0.03%) 삼성증권(0.29%) 등 6개사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증여액에서는 삼성생명공익재단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삼성전자는 올해 삼성생명공익재단에 준 금액의 14%에 불과한 70억 원을 삼성문화재단에 기증했다. 최근 그룹 차원에서 어느 공익법인을 밀어주고 있는지 비교되는 대목이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은 삼성문화재단과 마찬가지로 삼성생명 지분 4.68%를 보유하고 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사위인 이종기 전 삼성화재 회장이 지난해 10월 작고하면서 생전에 보유했던 지분 4.68% 전체를 증여받은 것이다. 당시 가치로 5000억 원에 이르는 거액이 유족의 몫 없이 모두 증여되자 일각에선 ‘삼성가의 돈이 세금 출혈 없이 삼성생명공익재단에 고스란히 흡수됐다’는 평이 나돌기도 했다. 지분이 전혀 없던 삼성생명공익재단은 고 이종기 회장 지분 증여를 통해 이건희 회장(4.54%)보다 높은 지분율을 기록하며 삼성에버랜드(13.34%)에 이은 2대 주주가 됐다.
만약 공익법인의 5% 지분율 규제가 풀린다면 삼성생명의 삼성전자 지분을 삼성생명공익재단에 증여하는 것도 가능해진다. 삼성생명공익재단이 삼성에버랜드가 지닌 삼성생명 지분을 물려받는다면 삼성생명 상장 이후 금융지주사법에 저촉될 소지도 사라진다.
이럴 경우 이건희 회장은 에버랜드가 아닌 삼성생명공익재단과 삼성문화재단을 통해 삼성생명을 지배할 수 있다. 그러나 공익법인이 재벌 지배구조 유지 승계를 위해 활용될 수 있다는 비판론이 거세지는 점이 부담으로 작용할 듯하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