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권 교차점에서 누군가 낙마하나
▲ 노무현 대통령 방북을 수행한 윤종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악수하고 있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삼성의 인사 관련 소문은 단지 대표적 임원들의 자리변동 차원을 넘어 그룹 내 역학구도 변화 가능성 때문에 더 큰 주목을 받는다. 특히 이번 인사 전망이 이건희 회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의 경영권 승계 여부와 연관성을 지닐 것으로 평가받아 이래저래 ‘삼성 인사태풍설’에 대한 재계의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지난 7월 9일 수원에서 열린 ‘2007년 선진제품 비교전시회’에서 이건희 회장이 황창규 반도체총괄사장에게 “어떻게 했기에 하이닉스에 뒤졌느냐”고 질책했다는 내용의 보도가 화제에 오른 바 있다. 몇몇 언론은 삼성 고위 인사의 말을 인용해 ‘황창규 사장이 반도체 D램 생산성 지표에서 하이닉스에 일시적으로 뒤처졌다고 언급하자 이 회장이 버럭 화를 냈다’고 전했다.
이에 대해 삼성 측은 ‘관련 보도 내용이 사실과 다르다’고 밝혔다. 당시 이 회장과 황 사장 곁에 있던 고위인사가 ‘황 사장에 대한 그 같은 질타는 없었다’고 보도내용을 부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삼성전자 위기의 진원지로 꼽혀온 반도체총괄 부문이 지난 8월 중순부터 그룹 전략기획실 경영진단팀과 삼성전자 감사팀의 고강도 경영 진단을 받아오는 등 반도체 라인의 책임론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전망이다.
재계 인사들의 관심은 이 회장의 반도체 라인에 대한 ‘얼차려’가 질책으로 그칠 것인가에 쏠려있다. 인적 쇄신을 통한 반도체 라인 체질 개선 가능성에 주목하는 것이다. 아울러 대규모 인사를 통해 삼성전자를 비롯해 올해 다소 침체된 그룹의 분위기를 반전시키려는 포석으로 풀이되기도 한다.
삼성 인사 전망은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 여부와 맞물려 더 큰 소문을 낳기도 한다. 올 초 삼성 정기인사 결과를 접한 업계 인사들은 ‘이재용 시대’를 열기 위한 움직임이 그룹 내에서 본격화됐다는 평을 내린 바 있다.
삼성전자 홍보팀을 이끌어온 김 아무개 전무가 안식년을 받아 최전선에서 물러났으며 그 자리를 이 전무의 서울대 동양사학과 직속 선배인 이인용 전무가 꿰찼다. 삼성전자 디지털미디어총괄에서 요직인 정보통신총괄로 보직을 옮긴 최지성 사장은 이재용 전무와 유대관계가 돈독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포스트 이건희 시대를 대비한 이건희 회장 인맥의 퇴장과 ‘이재용 사단’의 전진 배치의 첫 단추로 평가받은 것이다.
삼성의 조기 대규모 인사 소문을 접한 업계 인사들의 주 관심사는 그룹을 이끌어온 두 기둥인 이학수 윤종용 부회장에게로 향한다. 특히 이건희 회장의 문책 대상인 삼성전자의 대표이사 윤종용 부회장의 향후 거취에 대한 이런저런 추측들이 나돌고 있다. 이 회장의 질타를 받은 건 황창규 사장으로 알려지지만 삼성전자의 간판 격인 윤 부회장의 거취 문제는 단순히 계열사 수장 자리 변동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닌 그룹 내 역학구도를 뒤바꾸는 결과를 낳는 까닭에서다.
이학수 부회장과 더불어 윤 부회장은 삼성그룹 내 이건희 회장 다음 가는 영향력을 지닌 인물로 평가받는다. 지난 10월 2일 남북정상회담 방북단에 이건희 회장이 4대 그룹 총수들 중 유일하게 불참했지만 그 빈자리를 윤 부회장이 대신했을 정도의 상징성을 갖고 있다.
재계 정보통들 사이에선 올 12월 이건희 회장 취임 20주년 행사가 이재용 전무의 ‘대관식’이 될 것이란 관측이 나돌기도 한다. 그동안 이 회장과 삼성을 괴롭혀온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 논란이 어느 정도 수그러든 까닭에서다.
이미 승계에 필요한 지분 확보를 마친 이건희-이재용 부자를 옥죄어 온 에버랜드 건에 대해 항소심 재판부가 검찰이 기소한 액수(969억 원)의 10분의 1도 안 되는 89억 원만 인정하면서 이 회장 소환설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고 삼성 측도 부담을 덜게 됐다.
▲ 이건희 회장(왼쪽)과 이재용 전무. | ||
윤 부회장을 둘러싼 인사 논란은 이건희-이재용 부자에게 적지 않은 고민거리가 될 것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재계 일각의 예상대로 만약 윤 부회장이 2선 후퇴하게 될 경우 이건희 회장 체제를 떠받쳐온 이학수-윤종용 두 부회장 세력 간 힘의 균형이 무너질 가능성이 거론된다.
회장 비서실에서 잔뼈가 굵어온 이학수 부회장과 삼성전자 입사 이후 전자맨으로 성장해 오늘날에 이른 윤종용 부회장 사이엔 묘한 긴장감이 흐른다는 전언이다. 둘 중 한 사람이 후퇴할 경우 그룹 내 힘이 한 방향으로 쏠려 오히려 이 전무의 그룹 장악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렇다고 이건희 시대를 풍미해온 이학수-윤종용 투톱의 동반 퇴진이 이건희-이재용 부자 입장에서 최상의 시나리오일지는 미지수다. 그동안 그룹을 지탱해온 두 축이 흔들릴 경우 심각한 리더십 부재를 초래할 수 있으며 이를 이재용 전무가 어렵지 않게 수습할 수 있을지에 의문도 제기되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차 정몽구 회장이 임원진 수시인사에 이은 현대차 비자금 사태 촉발 이후 어수선해진 그룹 분위기를 다잡기 위해 박정인 부회장을 다시 데려온 사례를 학습효과로 꼽는 시각도 있다.
‘이 회장의 황창규 사장 질책’ 보도내용이 윤 부회장의 거취 문제로 이어질지, 그리고 이 같은 상황이 이 회장이 진정 원하는 것인지에 대한 논란도 제기된다. 윤종용-황창규 라인의 거취 문제를 필두로 한 삼성그룹 대규모 인사설이 찻잔 속의 태풍으로 그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윤 부회장을 중심으로 한 삼성전자 인적 쇄신론의 진원지가 이 회장의 뜻과 무관한 삼성 내 다른 세력일 것이란 관측도 일각에서 제기된다. 삼성 내부 상황을 주의 깊게 지켜보는 재계 정보통들 사이에선 ‘이 부회장이 그룹 내 정보수집과 대관업무 라인을 쥐고 있다’는 이야기가 곧잘 오간다.
일부 재계 인사들 사이에선 ‘삼성전자 고위층 책임론이 퍼지는 배경에 윤 부회장 측과 반대편에 서 있는 인사들의 여론 주도 작업이 깔려있을 것’이란 미확인 소문마저 나돈다. 한편 삼성 측은 이학수-윤종용 두 부회장 간의 알력설에 대해 “절대 근거 없는 소문”이라며 극구 부인해왔다.
아들의 후계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이건희 회장과 그룹 지배 지분을 확보하고 대관식을 기다리고 있을 이재용 전무, 그리고 이를 둘러싼 이학수-윤종용 두 부회장 간의 관계는 항상 재계 인사들의 주 관심사였다. 곧 다가올 삼성그룹 정기인사를 통해 이들의 역학구도가 어떻게 펼쳐질지 숨죽이고 지켜보는 시선들이 제법 많아 보인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