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유소’는 많은데 ‘충전소’가 없네
▲ 정몽구 회장 | ||
최근 업계와 시민단체들 사이에 현대자동차그룹 지배구조에 대한 논란이 확산되고 있어 눈길을 끈다. 그동안 ‘현대차’ 하면 떠오르는 게 비자금 사건 재판이었던 터라 지배구조 문제는 뒷전에 머물렀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이란 이야기를 들어왔다.
지난 9월 6일 정몽구 회장이 항소심 집행유예 선고를 받으면서 한숨 돌리기 무섭게 다음날인 9월 7일 공정거래위원회(공정위)는 현대차그룹의 부당내부거래를 발표하며 600억 원대 과징금을 부과했다. 그리고 경제개혁연대 등 시민단체들이 현대차 이사회를 앞두고 지배구조 개선 요구를 공개적으로 하고 나서기도 했다.
시민단체들은 현대자동차가 지배구조 개선 방안을 내놓지 않을 경우 법적 대응을 하겠다는 으름장을 놓고 있다. 지난 2000명 법학 교수 43명이 이건희 회장 등을 고발한 것이 결국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재판을 불러왔다는 점을 떠올리면 시민단체의 강경 자세를 결코 무시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정 회장과 현대차가 지금껏 항소심 집행유예 판결을 위해 전력을 쏟아왔다면 이젠 지배구조 관련 여론 달래기에 나서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현대차그룹 지배구조는 삼성그룹과 마찬가지로 환상형 출자구조다. 현대차가 기아차 지분 38.67%를 갖고 있으며 기아차는 현대모비스(17.8%) 현대제철(21.4%) 현대하이스코(13.9%) 등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현대모비스는 현대차 지분 15%, 현대제철은 현대차 지분 5.85%를 갖고 있다.
정몽구 회장 아들인 정의선 기아차 사장이 그룹 경영권을 물려받기 위해선 이 계열사들 중 어느 한 곳의 최대주주가 돼야 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 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전무가 삼성에버랜드 지분만을 갖고도 그룹 전체 경영권을 물려받을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런데 정 사장에겐 이 전무와 달리 핵심 지분이 거의 없다. 주요 계열사 지분 보유 현황 중 눈에 띄는 것은 기아차 지분(1.99%)뿐이다. 현대차 주식은 고작 6445주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지분율 0.003%에 불과하다.
10월 10일 현재 현대차 주가는 7만 4000원이며 기아차 주가는 1만 1600원이다. 액수로만 봐도 기아차 지분 확보가 용이해 보인다. 현대차 지분 1% 확보하는 데 1624억 원이 드는 반면 기아차 지분 1% 확보엔 403억 원 정도면 되므로 정 사장이 기아차 지분 확보에 나설 것이란 관측이 업계 인사들 사이에 자리 잡아왔다.
관건은 자금 조달 방법이었다. 이와 관련, 그동안 정 사장이 최대주주로 있는 글로비스가 주목을 받았다. 물류 계열사 글로비스는 정 사장이 지분 31.88%를 확보해 정몽구 회장(28.12%)과 더불어 지배구조를 형성하고 있다. 지난 2001년 정몽구-정의선 부자가 50억 원을 갖고 설립한 글로비스는 그동안 현대차그룹 계열사들의 물량을 지원받아 6년 만에 매출액 2조 원대의 회사로 성장했으며 여기서 마련된 돈으로 정 사장이 기아차 주식 1.99%를 확보한 것으로 알려진다.
10월 10일 현재 글로비스 주가는 6만 800원으로 1년 전(2만 9400원)에 비해 두 배 이상 치솟은 상태다. 만약 정 사장이 글로비스 지분 전량(1195만 주)을 처분한다면 7268억 원을 마련할 수 있다. 이는 기아차 지분 4.5%가량을 사들일 수 있는 금액이다. 지금 같은 물량 지원과 주가 성장세가 지속될 경우 글로비스 지분을 통한 정 사장의 기아차 지분 확보의 길은 더 넓게 트일 수도 있다.
▲ 정의선 사장 | ||
공정위의 부당내부거래 적발 조치나 시민단체의 지배구조 개선 요구의 핵심은 정 사장의 경영승계 발판을 만들기 위해 글로비스에 대한 부당 물량지원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이다. 결국 관가와 여론의 궁극적 타깃은 경영권 편법 승계 논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편법 지분 승계 의혹을 불러일으켰던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재판이 아직 대법원 선고를 남겨놓은 상황이라 정 사장과 글로비스를 둘러싼 논란 역시 에버랜드 건과 더불어 주목받게 될 가능성이 열려있다.
현대차가 ‘매 한 대도 맞지 않고’ 경영권 승계를 할 수 있는 방법으로 정 회장이 개인 재산을 증여세 다 물어가면서 정 사장에게 물려주고 정 사장이 논란에 휘말리지 않는 사유재산으로 지분을 추가 매집하는 길이 있다.
정 회장은 현대차(5.19%)와 현대모비스(7.76%) 등의 지분을 갖고 있다. 정 회장 명의 현대차 지분의 시가총액은 8400억 원에 이르며 현대모비스 10월 10일 현재 주가(9만 300원)를 볼 때 정 회장 명의 현대모비스 시가총액은 6100억 원 정도가 된다. 1조 원이 넘는 지분을 증여하다보면 증여세가 절반을 차지할 것이다. 결국 글로비스를 키워서 기아차 지분 매입 대금을 마련하는 것보다도 못한 결과를 불러오는 셈이다.
글로비스는 지난 6월 터키, 7월 체코, 8월 미국 등에 해외현지법인을 설립해 계열사로 편입시키는 등 사세 확장 작업을 이어나가고 있다. 9월엔 경기도 시흥에 있는 기아차 명의 산업시설(토지 6만 6000㎡ 규모)을 물류시설 인프라 구축 명목으로 670억 원에 매입하기도 했다.
글로비스가 지분 24.96%를 보유해 최대주주로 있는 건설 계열사 엠코 역시 주목을 받는다. 엠코도 공정위로부터 물량 몰아주기 의혹 관련 조사를 받았다. 엠코는 지난 4월 현대제철과 충남 당진 일관제철소 건설 토목공사 계약을 체결했는데 계약금이 3000억 원인 것으로 공시돼 있다. 엠코 지배구조엔 글로비스 외에도 정몽구 회장(10%)과 정의선 사장(25.06%)이 대주주로 참여하고 있다.
SK CJ 두산처럼 지주사 전환을 통한 지배구조 개선을 꾀할 수도 있겠지만 지주사 전환 비용 부담이 다른 재벌에 비해 막대해 보인다. 설사 글로비스를 키워 그 이익을 통해 정 사장이 기아차 최대주주에 오른다 해도 현대차→기아차→현대모비스→현대차로 이어지는 환상형 출자구조에 대한 비판이 뒤를 따를 것으로 보인다. 항소심 집행유예로 일단 한 고비를 넘겼건만 정몽구·정의선 부자 앞엔 넘어야 할 산은 여전히 첩첩인 셈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