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기계 수혜, 자동차·석유화학 부담…미국선 관세로 가격경쟁력 상쇄, 유럽·아세안 쪽은 기대

환율 분석에서 주목할 지표는 국가 간 환율의 상대 수준 비교가 가능한 ‘실질실효환율(REER)’이다. REER은 주요 교역 상대국 통화와의 환율을 물가 수준까지 반영해 계산한 지표로, 수치가 낮을수록 가격 경쟁력이 높다는 의미다. BIS(국제결제은행)이 집계한 2025년 10월 말 기준 한국의 REER은 85.87로 2009년 12월 이후 16년 만에 최저치다. 그런데 일본은 65.76으로 더 낮다. 2009년 12월 일본의 REER은 120.65였다. 글로벌 시장에서 2009년 일본보다 훨씬 경쟁 열위에 있다는 뜻이 된다. 생산 과잉에 직면해 초저가로 밀어내기 수출을 하고 있는 중국 위안화도 약세다. 그나마 독일이 103.14로 강세를 보여 유럽과의 경쟁 강도는 높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특히 우리나라의 최대 수출시장인 미국에서는 환율 효과가 사실상 ‘무용지물’이 됐다. 트럼프 행정부는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면서 그동안 0%이던 한국산 자동차와 전기차용 배터리에 대한 관세를 15%로 높였다. 환율이 10% 올라도 관세로 15%를 부담하면 이전보다 5%포인트(p) 원가가 높아지는 셈이 된다.
최대 경쟁국인 일본도 미국에 완성차와 배터리를 수출할 때 15% 관세를 부담하지만 엔화 약세는 원화보다 더 심하다. 일본이 애초부터 미국과 FTA를 맺지 못했다. 트럼프 행정부의 관세로 세율이 기존 최혜국 기준(2.5%)에서 15%로 12.5%p 높아져 한국보다 상승폭이 낮다. 일본 완성차 업체들은 미국 현지 생산 기반이 한국보다 더 탄탄하다. 일본이 한국보다 더 유리해진 셈이다.

반도체는 이른바 인공지능(AI)과 데이터센터로 인한 슈퍼사이클을 맞이하고 있어 관세 부담은 상대적으로 적다. 주력 품목인 고대역메모리(HBM)는 주로 대만 TSMC로 수출돼 AI용 칩으로 만들어진 후 미국으로 수출된다. 미국 관세의 직접적 영향을 받지 않는다. 환율 상승은 원화기준 매출액 증가로 이어질 만하다. 다만 중국의 반도체 산업 발전에 따른 대중 수출 감소와 국내 및 미국 공장 설립에 필요한 장비 수입 부담은 있다. 미국 투자나 장비 구입 모두 달러화 기반이다.
석유화학 업종 상황은 더 어렵다. 유가 하락폭보다 환율 상승폭이 더 커서 원유 도입 비용 부담이 커졌다. 통상 유가가 오르면 글로벌 경기도 개선돼 석유화학 업체들은 원가 상승분을 가격에 반영시켰다. 하지만 올해 상황은 다르다. 글로벌 수요 둔화로 달러 기준 유가는 약세를 보이고 있어 환율 상승에 따른 비용 부담을 가격에 반영하기 곤란하다. 특히 중국이 저가 석유화학 제품 수출에 적극적이어서 이들과 경쟁하려면 비용 부담 대부분을 내부적으로 흡수해야 한다.
유일하게 환율 상승의 수혜를 고스란히 누릴 업종은 조선이다. 선박 수출은 95% 이상이 달러 표시 계약이어서 환율 상승이 고스란히 매출 증가로 이어진다. 한국조선해양, 삼성중공업, HD현대중공업 등은 올해 사상 최대 실적이 유력하다. 중국이 저가 경쟁을 펼치는 일반 화물선 대신, 한국이 기술 우위를 가진 LNG(액화천연가스)선, 친환경 선박과 같은 고부가가치 전략 선박에 집중한 전략도 주효하고 있다. 유럽과 중동의 LNG 인프라 투자 확대도 수주 호조를 뒷받침하고 있다.
다만 지역별로 환율 상승의 수혜는 다를 수 있다. 유로·원 환율이 크게 상승한 지난 9월 대 유럽연합(EU) 수출은 전년 동기 대비 19.3% 급증했다. 10월까지 누적 수출액은 전년 동기대비 2% 줄었지만, 미국(-15%), 중국(-5%)와 비교하면 아주 양호한 실적이다. 독일 정부가 500억 유로 규모의 재정 부양책을 가동하며 유로존 경기가 회복세를 보인 영향이 크다. ECB(유럽중앙은행)가 정책금리를 2.00%로 동결하며 통화 안정을 유지한 점도 긍정적이다. 중국 전기차들이 EU 시장에서 약 40% 저가로 공세를 펼치고 있지만, EU가 중국산 전기차에 최대 반덤핑 관세를 부과하며 한국 업체들에게 기회가 열렸다. 현대차·기아는 체코·슬로바키아 공장을 활용해 EU 역내 생산 비중을 높이며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고 있다.
기계·산업재도 강세다. 독일 기업들과의 가격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며 9월 수출이 두 자릿수 증가율을 기록했다. 한 기계업체 수출 담당자는 “유로 강세 덕분에 독일 경쟁사 대비 10% 이상 낮은 가격을 제시할 수 있게 됐다”고 귀띔했다.
아세안 시장 역시 주목할 만하다. 지난 9월 대 아세안 수출액은 전년 동기 대비 17.8% 급증했다. 올해 10월까지 누적 수출액 감소폭도 2% 정도로 EU와 비슷하다. 특히 원화는 아세안 주요국 통화 대비 상대적으로 더 큰 폭의 약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하반기 들어 지난 11월 26일까지 원화의 달러 대비 약세폭은 4.1%로, 대만 달러(7.11%)를 제외하면 싱가포르 달러(2.31%), 인도네시아 루피아(2.54%), 베트남 동(0.96%), 태국 바트(0.09%) 등 주요 아세안 통화의 약세폭을 크게 상회하고 있다. 일본도 아세안 지역에 수출이 많지만 한류 확산으로 한국 제품에 대한 선호도가 높다. 뷰티, 식품, 소비재 수출이 크게 늘어날 여지가 크다.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최근 발간한 ‘2026년을 향한 수출 전략 보고서’에서 “관세·기술·비용구조가 1차 변수가 된 시대에 환율은 2차 변수로 밀렸다”며 “고부가가치 제품 집중, 글로벌 생산거점 다변화(멕시코·인도·중동), 비중국 공급망 구축이 생존 전략”이라고 강조했다.
최열희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