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모닝시티 사건으로 정치생명의 최대 위기를 맞은 정 대표가 여권 핵심부를 향해 폭탄 발언을 연이어 쏟아내고 있기 때문이다. ‘판도라의 상자’라는 대선자금 문제를 언급한 데 이어 지난 7월24일에는 청와대 참모들에 대한 ‘문책’을 요구해 여권 전체를 긴장시켰다. 요즘 들어 정 대표 측근들의 입에서는 ‘음모론’이란 단어가 거리낌없이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 지난 7월27일 정대철 대표가 국립현충원의 부모 묘소를 참배했다. 이곳에서 그는 다시 한 번 청 와대에 386 참모 문책인사를 요구했다. 이종 현 기자 jhlee@ilyo.co.kr | ||
벼랑끝에 몰린 정 대표가 ‘3탄’ ‘4탄’을 준비중이라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이미 정 대표가 자신에 대한 여권 핵심부의 태도를 ‘배신’이라고 규정한 터에 청와대 입장을 고려해 봐주고 말고 할 상황이 아니라는 얘기다.
한 측근은 “정 대표를 죽이려는 음모에 대한 정황증거들이 너무 많다”며 “이에 대해 청와대가 직접 해명하고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전면전’으로 갈 수밖에 없다”고 잘라 말했다. 이 측근은 “검찰과 공방을 벌일 단계는 벌써 지났다. 이제는 노 대통령이 전면에 나서 문제를 풀어야 할 것”이라며 압박 강도를 높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대선 후보와 선대위원장의 관계에서 대통령과 집권당 대표로 이어졌던, 더구나 평소 ‘호형호제’할 정도로 친밀했던 노 대통령과 정 대표 사이가 결국 ‘파국’에 이르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여권 내에서 확산되고 있다. 특히 정 대표측이 준비중인 ‘3탄’ ‘4탄’의 실행 여부에 따라 양자 관계는 물론 여권 내 권력지형이 크게 바뀔 것이란 분석도 나오고 있어 정 대표의 ‘선택’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후속타’와 관련해 우선 거론되는 것은 역시 대선자금 문제. 정 대표는 ‘굿모닝 게이트’ 연루 의혹이 불거진 초기인 지난 7월 중순 측근들에게 “대선 때 있었던 일을 내가 다 아는데, 왜 나만 죽이려 하는지 모르겠다”는 의미심장한 발언을 한 바 있다.
선대위원장을 맡아 선거전의 전 과정을 총괄하는 위치에 있었던 정 대표의 이 같은 언급은 경우에 따라 ‘대선 비(秘) 파일’을 들춰낼 수도 있음을 의미하는 대목.
실제 여권 내에서는 민주당의 대선자금 내역 공개(7월23일)에 포함되지 않은 별도의 자금 리스트를 정 대표가 갖고 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특히 지난해 9월30일 민주당 선대위가 발족한 후 한동안 ‘자금난’이 심각했던 시기 정 대표가 선거자금을 모금하는 데 큰 역할을 했으며 그 중 상당액은 아직 공개되지 않았다는 주장이 나돌고 있다.
실제 민주당은 선대위 발족 후 선대위와 기존 당 체제가 이원화되면서 인사-재정권 문제를 놓고 양측간에 적지않은 ‘불협화음’을 빚었다. 특히 반노(反盧) 성향이었던 유용태 사무총장은 선대위에서 요구한 자금과 인력지원에 비협조적으로 대했고 김대중(DJ) 정권 시절 정치자금 루트를 잘 알고 있는 구주류 중진들은 노 후보에 등을 돌려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다.
때문에 선대위원장이던 정 대표와 선대위 본부장급들이 그때 그때 필요한 자금을 자신들의 호주머니에서 꺼내 가까스로 충당해 왔던 일은 익히 알려진 사실. 정 대표는 특히 선대위 본부장급에 지급한 노트북 15대 값 3천7백만원을 자비로 부담하기도 했다.
정 대표측도 ‘대선 파일’ 공개 가능성을 부인하지 않고 있다. 한 측근은 “노 대통령은 ‘실언’이라고 했지만 정 대표의 ‘대선자금 2백억원’ 발언은 결코 해프닝이 아니다. 그런 일은 없어야 하겠지만 만약 정 대표가 대선 과정에서 일어났던 상황에 대해 입을 열면 엄청난 핵 폭풍이 불 수도 있다”고 밝혔다.
‘386 음모론’과 청와대 참모 문책에 대한 추가공세 여부도 관심의 대상이다. 정 대표측은 현재 음모론과 관련한 정황증거를 상당부분 수집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일부는 검증까지 마친 것으로 전해진다. 특히 청와대 핵심 386 참모들과 굿모닝시티 사건 수사검사와의 ‘학연’을 매개로 한 커넥션 의혹과, 정 대표 사전구속영장 청구 과정에 이들 외에 386 관계자와 긴밀한 관계에 있는 검찰 고위 인사까지 개입한 사실을 포착했다는 주장이 흘러나오고 있다. 정 대표는 지난 7월22일 문재인 민정수석과의 만남에서 ‘특정 대학’ 출신들의 커넥션 의혹을 직접 제기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 대표측은 음모론에 대해 이미 알려졌던 것보다 구체적인 정황을 제시할 경우 386 참모들에 불만이 많은 당내 중진들의 동조를 이끌어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미 김근태 고문이 “정 대표가 희생양이란 의구심이 일고 있다. 이를 부인할 수 있는 근거를 청와대가 제시해야 한다”며 지원사격에 나섰으며 ‘굿모닝 게이트’ 연루설이 보도됐던 신주류 핵심인사들도 내놓고 말은 하고 있진 않지만 “이번 기회에 386 참모들의 ‘전횡’은 확실히 근절시켜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정 대표측은 일단 문책 요구에 대한 청와대측의 대응을 지켜본 후 별반 조치가 없을 경우 386 참모와 검찰 간 커넥션 의혹을 실명으로 거론하는 방안을 검토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한 측근은 “정 대표가 자신의 절친한 후배인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을 통해 음모론의 중심에 일부 386 참모들이 있다는 자신의 판단을 노 대통령에게 가감없이 전할 것을 요청한 것으로 안다”며 “정 대표가 워낙 온순한 성품이라서 그렇지 김영삼 전 대통령과 이인제 의원 같은 사람이었으면 벌써 대통령과 절연할 각오로 임했을 것이다. 만약 노 대통령이 정 대표와의 관계를 복원할 생각이 있다면 음모론의 배후에 있는 인사들을 내쳐야 할 것이며 그렇지 않을 경우 음모론은 결코 가라앉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일각에서는 정 대표가 자신의 대표직 사퇴와 함께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을 정면비판하면서 ‘탈(脫) 신주류’를 선언한 후 다른 중도파 중진들과 연대를 모색할 것이란 전망도 나오고 있다. ‘7월 말 출두’ 방침을 밝힌 정 대표로서는 자신이 주도하고 있는 신·구주류 간 신당 이견 조정이 일단락되는 대로 대표직을 사퇴해 홀가분한 입장에서 청와대-민주당 관계, 현 정부의 국정혼선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려 할 것이란 얘기. 이를 통해 그동안 검찰의 출두요구에 불응한 데 대한 비판여론을 가라앉히는 한편 노 대통령에 대한 비판을 통해 향후 정치적 거취를 모색해 나갈 것이란 시나리오다.
이와 관련, 여권 주변에선 정 대표가 노 대통령과의 결별을 계기로 신당 논의과정에서 ‘분열없는 통합신당’이란 ‘코드’를 맞춰 온 한화갑 김근태 추미애 의원 등과 연대해 활로를 찾으려 할 것이란 얘기가 나오고 있다.
공교롭게도 정 대표를 제외한 3인은 새 정부 출범 이후 노 대통령의 국정운영에 대해 계속 비판의 날을 세우며 비노(非盧) 중도파의 입지를 다져왔다. 김 의원은 최근 “신당이 ‘노무현당’이 되면 내년 총선에서 필패할 것” “신당이 대통령당이 되는 그날은 신당의 제삿날”이라고 주장했고 한 전 대표 역시 “내년 총선에서 국민들에게 표를 달라고 하려면 ‘탈(脫) 노무현’을 내세워야 할 판”이라고 가세했다.
추 의원도 지난 7월 초 “(노 대통령이) 선거 때는 (당에서 지원한) 돈을 원없이 써보는 등 단물을 먹고도 당선된 뒤에는 당을 국정운영에 별다른 도움도 되지 않으면서 귀찮게 하는 존재 정도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원색적으로 노 대통령을 비난한 바 있다.
이준원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