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아성애 디즈니의 노리개였다” 수군
▲ 디즈니(가운데)와 드리스콜(오른쪽) 그리고 또 한 명의 전속배우인 루애너 패튼. |
최근 여배우 폴라 킨스키가 자서전을 통해 아버지인 클라우스 킨스키에 의해 긴 세월 동안 성적 학대를 당했다는 걸 밝혔다. 아버지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지만 어린 시절 남겨진 트라우마는 평생 그녀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었고 환갑이 넘은 나이에야 비로소 세상에 호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누구에게나 유년기의 악몽은 평생의 짐이 되는 법. 특히 아역 배우들은 그런 위험에 가장 크게 노출되어 있는 존재들이다. 할리우드 역사에도 그런 비운의 스타들이 종종 눈에 띄는데, 오늘 소개할 바비 드리스콜의 비극적 인생은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1968년 뉴욕 한구석의 허름한 공동 주택. 버려져 아무도 살지 않는 그곳에서 한 젊은이의 싸늘한 시체가 발견되었다. 병원에선 동맥 경화에 의한 심장마비로 죽었으며, 긴 세월 동안 이뤄진 마약 중독이 직접적 원인이라는 소견서를 작성했다. 시체 공시소로 옮겨졌지만, 그의 신원을 파악할 수 있는 건 없었다. 그는 지문을 뜬 후 매장되었다. 1년 뒤 이사벨라 드리스콜이라는 여성이 뉴욕 경찰서 문을 열고 들어섰다. 실종된 아들을 찾고 있다는 그녀는 지문 대조를 통해 아들이 이미 세상을 떠나 묘지에 묻혔다는 걸 알았다. 거리의 부랑자로 지내다 불과 서른한 살에 세상을 떠난 아들의 이름은 바비 드리스콜. 오스카까지 손에 쥐었던 당대 최고의 아역 스타였다.
아역 배우가 성인이 되어서 힘든 세월을 보내는 게 일반적인 일이라곤 하지만, 어떻게 그토록 나락까지 추락할 수 있었을까. 드리스콜이 어린 시절 겪었던 트라우마를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일도 아니다. 동네 이발소 아저씨가 권유와 소개로 여섯 살(1943년)에 연기를 시작한 바비 드리스콜은 데뷔 때부터 천재 소리를 듣던 아역 배우였다. <설리번 가족>(1944)에서 공연한 앤 벡스터는 그에게 ‘원더 차일드’라는 별명을 붙여주며 “카메라 앞에서 너무 자연스럽고, 그 어떤 성인 연기자보다 대사를 빨리 외웠다”고 드리스콜에 대해 칭찬을 늘어놓기도 했다.
아역 스타로 승승장구하던 바비 드리스콜. 이때 관심을 가진 사람은 다름 아닌 월트 디즈니였다. 당시 애니메이션을 벗어나 가족용 실사 영화를 제작하려던 디즈니는 똘똘한 아역을 찾고 있었고, 드리스콜은 디즈니가 찾던 바로 그 이미지였던 것. 리무진을 보내 드리스콜을 데려온 디즈니는 매력적인 소년에게 완전히 넋이 나갔고, 드리스콜은 월트 디즈니와 처음으로 계약한 배우가 된다. 이상한 얘기가 돌기 시작한 건 이때부터였다. 드리스콜은 <남부의 노래>(1946) 현장에서 아홉 번째 생일을 맞이했는데, 이때 디즈니는 커다란 케이크를 들고 현장을 방문했다. 디즈니는 드리스콜에게 입맞춤을 했는데, 당시 현장에 있던 배우 루스 워릭에 의하면 그것은 뺨에 하는 키스가 아닌 입술에, 그것도 매우 질펀한 느낌을 줄 정도로 긴 키스였다.
1948년엔 <내 마음 가까이>라는 영화에서 뷸러 본디, 벌 아이브스 같은 관록파 배우들과 공연했는데 이때 드리스콜은 할머니뻘인 본디와 친해졌다. 역시 아역 출신인 본디는 드리스콜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면서 아이에 대해 걱정을 하기 시작했다. 아이의 이야기를 들은 결과, 드리스콜에 대한 디즈니의 관심이 너무 과하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디즈니 스튜디오의 애니메이터들도 디즈니가 바비와 사랑에 빠진 것 같다고 수군거렸다.
이후 1950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특별상(지금은 없어진 아역상)을 수상한 드리스콜과 디즈니는 다시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틴에이저로 접어들면서 더 이상 아이가 아닌 드리스콜이 설 자리는 점점 좁아졌다. 디즈니도 재계약을 하지 않았고 결국 드리스콜은 TV 쪽으로 진로를 바꾸었다. 이때 공연했던 엄마뻘 되는 여배우 제인 와이먼(레이건 대통령의 전부인)과 드리스콜은 친해졌는데, 와이먼은 친구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바비는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으며 뭔가 도움이 필요해 보였다. 디즈니와 이 아이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다. 다들 쉬쉬하지만 반드시 경찰 수사가 필요한 그런 일 말이다.”
하지만 계약이 끝나면서 디즈니는 드리스콜을 문전 박대했다. 이것은 경제적 가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은밀하지만 강렬한 소아성애 취향을 지녔던 디즈니에게 사춘기에 접어든 드리스콜은 더 이상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었던 것이다. 버림받았다는 상실감과 학교에서의 부적응 상태 속에서 우울증과 소외감에 빠진 드리스콜은 마약에 손을 댔다. 열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 결혼했지만 세 아이를 남긴 채 4년 만에 이혼한 드리스콜은 점점 마약에 빠져들었다. 일감은 줄어들면서 마약 살 돈이 없게 되자 급기야 수표 위조를 하게 됐고, 결국 형무소에 갇히게 되었다.
출옥 후에 디즈니를 몇 차례 찾아갔지만 한때 ‘엉클 월트’라고 불렀던 그 친숙한 아저씨는 단 한 번도 만나주지 않았다. 연극 무대를 통해 재기하려 뉴욕으로 갔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고, 앤디 워홀의 ‘팩토리’에서 실험 영화에 출연했다. 그러면서 점점 마약에 빠져들었고, 그의 모습은 완전히 바뀌었다. ‘충격 수기’ 류의 책을 내려 출판사와 접촉한 그는 디즈니가 자신에게 행한 모든 성적 행동을 이야기했는데, 출판사 사장은 급전이 필요한 드리스콜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1968년 3월 그는 서른한 살의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할리우드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죽음이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