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명적 흉터’ 덮을 수 없다면 도려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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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학수 부회장(왼쪽)과 김용철 변호사. 일각에선 김 변호사가 삼성의 비자금을 폭로한 배경에 이 부회장과의 갈등이 있었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이 부회장은 김 변호사에게 만나자는 휴대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도 했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김 변호사의 차명 계좌 공개는 단순히 삼성의 비자금 의혹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건희 회장이 직접 지시했다는 로비 지침 공개와 이 회장 아들 이재용 전무의 경영권 승계 토대를 닦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에 대한 증언 조작 폭로 등이 이어지면서 자칫하면 삼성과 이 회장 부자의 도덕성이 크게 훼손될 수도 있는 처지다. 삼성은 이러한 모든 의혹을 ‘사실 무근’이라며 부인하며 겉으로는 당당한 자세를 보이고 있지만 속으로는 삼성의 핵심 임원을 지낸 김 변호사의 입에서 앞으로도 어떤 주장들이 새롭게 제기될지 알 수 없다는 점에서 애를 태우고 있다.
삼성의 사태 해결을 위한 노력과 더불어 삼성 조직 전체에 덮칠 후폭풍에 대한 전망 역시 업계를 달구는 화두 중 하나다. 철옹성 같기만 했던 이학수 부회장 입지 논란마저 일 정도로 삼성 안팎이 어수선한 실정이다. 이렇다 보니 삼성의 핵심 의혹 비켜가기 노력과 더불어 내부 조직 추스르기 방안에 대한 관심 또한 커지는 상황이다.
현재 가장 관심이 쏠리는 것은 비자금 의혹과 관련한 삼성의 행보. 삼성으로선 자칫 이 의혹이 커질 경우 에버랜드 사건을 능가하는 최대의 치명타가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각종 의혹을 해명하고 희석하려는 각종 전략 마련에 분주하다.
지난 5일 김용철 변호사가 직접 참석한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삼성 비자금 2차 기자회견 직후 삼성은 적극적인 반박을 통해 김 변호사 주장이 거짓임을 강조하며 김 변호사의 전 부인이 보냈다는 편지 일부분을 공개했다. 여기엔 ‘김 변호사가 불륜을 저질렀고 이 과정에서 흥청망청 돈을 뿌렸다’는 취지의 내용이 담겨있다. 일종의 ‘물타기 전략’이라며 사제단은 반발하고 있다.
실제로 김 변호사는 부인과 이혼했다가 재결합한 뒤 올 초 다시 이혼하는 부침을 겪었다. 김 변호사가 ‘가족을 잃었다’고 밝힌 것처럼 그의 가정사가 순탄치 못했음을 짐작해볼 수도 있다. 비자금 의혹 폭로의 동기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라는 삼성 측의 설명이다. 그러나 김 변호사가 “내 사생활이 이번 사건의 본질이 아니다”고 언론 인터뷰에서 밝힌 것처럼 가족사가 삼성 비자금 논란의 진위를 가릴 잣대는 아니라는 비판론이 제기된다.
한편에서는 김 변호사가 야기한 삼성 비자금 논란이 첫 ‘총성’이 요란했음에도 불구하고 용두사미로 끝날 가능성이 아주 없는 것도 아니라는 전망도 나온다. 삼성으로서는 가장 바라는 바다. 이른바 ‘떡값 검사 리스트’에 대해 지난 8일 MBC 라디오 <손석희의 시선집중> 인터뷰에서 김 변호사는 “옛 동료, 선후배(도 있는데), 그 문제를 공개하는 것은 저에게 정말 힘든 일입니다”고 밝힌 바 있다. 당초 사제단을 통해 로비를 받은 인사들 이름을 밝히겠다던 태도에서 한 발짝 물러선 것 같은 인상을 풍긴다. 일각에선 ‘사제단 2차 기자회견 직전 검찰 수뇌부가 김 변호사를 직·간접적으로 접촉하려 했다’는 이야기가 나돌기도 했다. 대한변호사협회가 김 변호사에 대한 징계를 논의한 사실이 알려진 것 또한 김 변호사의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을 법한 대목이다.
검찰이 얼마나 깊이 있게 이번 일을 파고들지도 여전히 미지수다. 만약 김 변호사 주장대로 검찰의 고위급 인사들이 삼성으로부터 뇌물을 받아왔다면 검찰의 강도 높은 수사 결과가 ‘제 살 도려내기’로 점철될 수도 있다. 김 변호사에게 ‘명단을 제시하라’고 요구하는 검찰의 속내에 가득 찬 것이 자신감인지 불안감인지 현재로선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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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제기된 삼성 비자금 특검이 실타래처럼 엉킨 이번 파문을 풀어낼 열쇠가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정파 간 조율 난항으로 특검 조기 실시 여부가 불투명한 상태다. 대선을 앞두고 각종 음모론과 합종연횡설이 난무한 시점에 정치인들이 특검에 얼마나 공을 들일지도 미지수다.
14일 김경준 씨가 귀국하면 세인의 관심이 그 쪽으로 쏠리지 않겠느냐는 관측도 있다. 각계의 삼성맨들이 BBK 건을 키우는 정보를 제공하는 데 주력할 수 있다는 설도 나온다. 그러나 이명박 후보가 삼성의 이해관계에 부합하는 금산분리 완화 등을 주장해온 점이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 출마 선언에도 여전히 견고한 지지율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도 있다. 자칫하다가는 더 큰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점에서 삼성 측이 이 카드를 선택할 수 있을지 의문을 보내는 시각도 없지 않다.
한편에서는 삼성의 ‘물타기’ 전략이 끝내 빛을 발하지 못하게 돼 결국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어야 할 시점이 올 수도 있다는 관측도 있다. 이른바 ‘희생양’의 등장 가능성이다.
김용철 변호사 비자금 발언이 터지고 나서 삼성을 향한 다양한 시선들 속에 한 가지 공통점이 눈에 띈다. ‘삼성 내부에서 누군가 한 사람이 다치게 될 것’이란 관측이다. 김 변호사 발언 이후 삼성은 차명 계좌 존재는 인정하면서도 ‘한 재무팀 임원이 김 변호사의 사전 양해를 얻어 개설한 것’이라 주장해 왔다. 금융실명제 관련 처벌을 감수하고서라도 비자금 파문 확산을 막으려는 삼성의 의지 표출인 셈이다.
삼성은 아직 차명 계좌를 개설했다는 문제의 임원을 공개하지 않고 있다. 만약 그 임원 이름이 세상에 알려질 경우 그는 모든 언론의 집중포화와 검찰 수사의 우선적 타깃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정·관·재계 일부 호사가들은 삼성이 해당 임원을 밝히지 않는 것에 대해 ‘희생양 선별 중’이란 해석을 내놓기도 한다.
그러나 일각에선 ‘임원급 희생양’이 설사 드러난다 해도 이번 파문의 불길에 물을 끼얹기엔 다소 부족할 것이란 의견도 제기된다. 차명계좌에 담긴 수십억 원 관리에 대한 전결권이 과연 누구에게 있을지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다보면 결국 이학수 부회장의 이름을 떠올릴 수밖에 없는 까닭에서다.
지난 10일 이종왕 삼성 법무실장이 이번 파문에 대해 책임지고 사임했다. 이학수 부회장을 비롯한 삼성 임원들의 만류에도 이 실장은 변호사직도 포기하고 아예 법조계를 떠나겠다는 입장을 밝힌 것으로 알려진다. 이 실장은 사임하면서 임직원에게 보낸 이메일을 통해 ‘삼성은 우리 사회의 어느 조직보다 상대적으로 청결하고 건강한 조직’ ‘전직 법무팀장의 파렴치한 행위로 비리집단으로 매도되어 임직원 모두 마음에 깊은 상처를 입었다’고 밝혔다. 이 실장의 이러한 살신성인은 조직의 치부를 드러낸 전직 임원과의 대조적인 면을 부각시켰으며 흐트러진 내부 분위기 수습에도 보탬이 될 것으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사장급인 이 실장의 사임으로 내부 책임론의 여파가 모두 잠재워질 지는 미지수다. 이번 파문을 잠재울 희생양으로는 볼 수 없다는 지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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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지난해 2월 이학수 삼성 부회장(가운데) 등 그룹 수뇌부들이 정치자금과 에버랜드 전환사채 문제 등 잘못을 사과하고 있다. 당시 8000억 원 사회 환원을 약속했다. | ||
2차 사제단 기자회견장에서 김 변호사가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편법증여 의혹 사건과 관련한 증언 조작 폭로를 한 점 역시 이 부회장의 입지를 부담스럽게 하는 대목. 김 변호사는 자신도 개입했음을 밝히면서 에버랜드 사건과 관련된 모든 진술 내용이 모두 거짓이라 주장했다. 이미 항소심 판결까지 난 이 사건을 둘러싼 삼성-검찰-법원 모두가 들썩거릴 수밖에 없는 내용이었다. 특히 이 부회장은 에버랜드 사건에 대한 삼성 측 총지휘권을 행사해온 것으로 알려져 에버랜드 논란이 커질수록 이 부회장을 향한 부담스러운 시선 역시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한편에선 비자금 파문의 화살이 이학수 부회장으로 향한다면 오히려 이건희-이재용 부자의 경영권 승계를 용이하게 할 인사태풍 명분이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들려온다. 현실성은 거의 없지만 일부에서 거론되는 ‘이건희 회장의 명예회장 2선 후퇴, 이재용 전무의 사장 등극’설은 많은 것을 시사한다. 에버랜드 재판 장기화로 경영권 승계에 필요한 지분 확보가 완료됐음에도 대관식 절차를 미뤄왔지만 이참에 이 회장과 이 부회장의 사죄 형식으로 이 전무의 등극을 도모해볼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이 대목에서 SK그룹의 예를 드는 인사들도 있다. 고 최종현 회장의 오랜 가신이자 탁월한 2인자로 평가받았던 손길승 전 SK 회장은 지난 1998년 최종현 회장 작고 이후 최태원 회장의 추대를 받아 그룹 회장직에 올랐던 바 있다. 손 전 회장은 2003년 SK글로벌(현 SK네트웍스) 분식회계 사태 당시 최태원 회장 구속 등 위기를 헤쳐 나가 현재 재계 3위 SK 초석을 다졌다. 당시 SK글로벌 사태 주역으로 꼽힌 인사들이 대거 퇴진했던 일 또한 삼성이 타산지석으로 삼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그러나 삼성 비자금 파문의 후폭풍이 그룹 전체를 뒤흔들 대형 인사로 나타날 것이라고 섣불리 진단할 수는 없다. 실세 부회장들의 부재는 그룹 전체에 적지 않은 리더십 공황을 야기할 수 있는 까닭에서다. 그러나 난공불락처럼 보였던 이학수 부회장 입지 논란이 가중되는 것만으로도 사회 각계를 들쑤셔 놓은 김용철 변호사의 삼성 비자금 발언 여파가 얼마나 큰 것인지 어렵지 않게 가늠해볼 수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