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을 국가 권력의 도구로 사용…이코노미스트 “번영·안보 둘 다 놓칠 가능성 커” 지적
한때 박물관 속의 낡은 개념처럼 여겨졌던 ‘함포 자본주의’가 다시 부활했다. 군함을 앞세워 시장 개방과 무역 특혜를 강요하던 19세기 제국주의 시대의 유물이 이제는 관세, 제재, 수출 통제, 기술 차단, 기업 압박 등의 모습으로 되살아나고 있는 것이다. 포탄 대신 규제와 정책으로 상대국의 경제를 압박하는, 이른바 현대판 ‘함포 외교’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79)이 있다.
이 같은 변화의 흐름을 지켜보는 경제 전문가들의 전망은 어두운 편이다. 여러 해외 정치 및 경제 매체들은 “자유무역의 시대는 사실상 끝났다”고 진단하는 한편, “오늘날 세계 경제는 더 이상 효율과 비용을 기준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대신 전쟁 가능성, 제재 위험, 동맹 여부 같은 정치와 안보 요인이 기업의 투자 결정을 좌우한다”고 짚었다. 이와 관련, 영국의 경제 전문지 ‘이코노미스트’는 최근 사설에서 “미국의 함포 자본주의는 세계를 더 가난하게 만들 것이며, 기업을 국가의 도구로 사용하는 방식은 세계를 더 안전하게 만들지 못한다”고 경고했다.

실제 미·중 갈등,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동 지역 불안과 같은 위험 요소들은 더 이상 단순한 외교 문제가 아니다. 기업 경영의 핵심 변수로도 자리 잡았다. 한 조사에서는 글로벌 제조업체의 80% 이상이 “정치적 불안정성이 공장 입지 결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답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제 기업들은 공장을 세우기 전 다음과 같은 질문을 먼저 던진다. ‘이 나라는 향후 제재 대상이 될 가능성이 있는가.’ ‘특정 국가와 갈등이 격화될 경우 생산이 중단될 염려는 없는가.’ ‘관세와 규제로 인해 갑자기 위험 지역이 될 가능성은 없는가.’ 이처럼 과거에는 비용과 효율이 우선이었다면, 지금은 정치적 안정성이 최우선 기준이 되고 있다.
이에 대해 ‘글로벌포커스24’는 “기업의 권력이 국가 무기로 전환되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해 지금 세계는 과거 제국주의 시절처럼 다시 한 번 ‘경제와 안보의 경계’가 무너지는 국면에 진입하고 있다는 해석이다.
사실 기업과 국가는 근대 자본주의가 시작되던 때부터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때문에 최근 들어 보이고 있는 친밀한 결합 역시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가령 영국과 네덜란드는 동인도회사의 자금으로 제국을 운영했고, 국가는 그 대가로 기업에 군사력과 외교력을 제공했다. 또한 독일의 ‘크루프’, 일본의 ‘미쓰비시’는 산업화를 이끌었고, 국가는 그에 발맞춰 해외 광산과 무역 시장을 열어주었다. 미국 역시 중동과 남미에 개입하는 식으로 자국 석유 기업의 이윤을 뒷받침해 주었다(최근 트럼프가 베네수엘라의 니콜라스 마두로 정권을 축출한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양상은 달라졌다. 국가는 뒤로 한 발 물러섰고, 다국적 기업들은 규제의 족쇄에서 벗어나 국경을 넘나들며 효율과 이윤을 극대화했다. 저렴한 노동력, 최적의 공급망, 자유로운 자본 이동은 글로벌 번영의 엔진처럼 세계 곳곳에서 작동했다.

그리고 이 모든 변화의 촉매는 지정학이다. 요컨대 유럽에서는 전쟁이 재개됐고, 중국 역시 공세를 강화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미국, 다시 말해 트럼프의 선택은 분명했다. 바로 ‘기업을 국가 권력의 직접적인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다. 일례로 트럼프는 석유 기업들에게 “카라카스로 돌아가지 않으면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압박했고, 방산업체들에게는 “자사주 매입을 중단하라”고 요구했다. 첨단 반도체를 중국에 판매하는 테크 기업들에게는 정부 몫을 내놓으라고 으름장을 놓기도 했다. 더 나아가 광산 기업과 반도체 기업의 지분을 정부가 직접 인수하겠다는 야심도 드러냈다. 이는 시장 개입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 ‘국가가 기업을 관리하고 동원하는 단계’에 더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른 결과는 ‘세계화의 후퇴’다. 이 같은 변화는 숫자로도 확인되고 있다. 2016년 미국의 다국적 기업들의 자본 지출 가운데 44%는 해외에서 이뤄졌지만, 지금은 69%가 국내에 묶여 있다. 다시 말해 해외 매출은 줄고, 국내 매출은 늘었다. 특히 소프트웨어, 의약품, 자동차처럼 정부가 ‘전략 산업’으로 여기는 분야에서 이런 경향은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문제는 비용이다. 이미 다국적 기업들이 국내에서만 사업을 영위하는 기업들에 비해 수익성이 떨어지고 있다는 증거가 나타나고 있다. ‘이코노미스트’의 분석에 따르면, 2023~2024년 매출 100억 달러(약 14조 7000억 원) 이상인 서구권 비금융 기업을 조사한 결과, 아홉 개 산업 분야 가운데 일곱 개 분야의 다국적 기업들의 투자자본수익률(ROIC)은 국내만 상대하는 기업들보다 낮은 것으로 조사됐다. 지정학적 고려에 따라 자본을 배분하면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방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더 안전해졌을까. 사실 꼭 그렇지는 않다. ‘이 모든 비용이 안보를 위해 감수할 만한가’하는 질문에는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라고 답할 수 있다. 가령 반도체 수출 통제가 적국의 군사적 도약을 막는다는 점에서는 안보 측면에서 의미가 있다.

이에 현재 세계 각국은 각자도생하고 있으며, 대응하는 방식 역시 다르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권 국가들은 반도체, 배터리, 플랫폼에서 국가 주도의 ‘챔피언 기업’ 육성에 나섰고, 유럽은 ‘전략적 자율성’을 외치며 외국 자본을 경계하고 있다. 반면, 신흥국과 개발도상국의 입지는 더욱 취약해졌다. 먼 나라 수도에서 내려진 제재 한 줄에 금융, 에너지, 인프라 프로젝트가 흔들리는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이코노미스트’는 지금 세계가 ‘함포 자본주의’의 착각에 빠져있다고 진단했다. 요컨대 “정부는 지대를 만들고, 지대는 시장을 왜곡하며, 왜곡된 시장은 국가를 가난하게, 국민들은 주춤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함포 자본주의의 유혹은 번영과 안보를 동시에 제공할 것처럼 보이지만, 현실에서는 둘 다 놓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또한 ‘글로벌포커스24’ 역시 “현재로서는 함포 자본주의의 부활이 경제 권력이 복귀했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고 말하면서 “기업들이 점점 더 국정 운영(국가 통치술)의 궤도 안으로 끌려 들어가고 있는 가운데 안보, 번영, 개방성 사이의 균형을 맞추는 일은 앞으로 수년간 국제 질서를 규정하는 핵심 과제가 될 것이다”라고 전망했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