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팎 ‘아우성’ 못들은척 먼산보기
▲ 이건희 회장 | ||
이 회장의 묵묵부답을 답답하게 지켜보는 정·관·재계 인사들이나 삼성 사정에 나름대로 밝은 소식통들은 ‘이 회장이 이미 대략의 계획을 짜 놨을 것’이라 본다. 아마도 삼성공화국 파문에 이은 2006년 초 사과성명 때처럼 거액 기금 출연과 비자금 원흉으로 각인된 전략기획실 축소 개편 등이 골자를 이룰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항간에는 한발 더 나아가 ‘이 회장이 살생부를 작성하며 때를 기다리고 있을 가능성’을 거론하기도 한다. 시민단체들이 공공연히 이학수 부회장 퇴진을 논하는 것에 대한 장고에 들어갔을 여지도 있다는 지적이다. 일각에선 이 회장을 끊임없이 따라 다녀온 건강 이상설이 다시 거론되기도 한다. 평소 효심이 지극하기로 유명한 이 회장이 지난 연말 이병철 선대회장 추모행사에 불참하자 ‘거동이 불편할지 모른다’는데 호사가들 상상력이 미친 것이다.
외부 상황 때문인지 삼성 내 분위기도 제법 어수선해져 있다. 주요부서와 계열사에선 불시 수색에 대비해 중요 자료를 개인 컴퓨터에서 빼내 직원들 각자의 휴대용 메모리에 보관해왔는데 이마저도 사측에서 회수해가는 바람에 원성이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들려온다.
억측이 난무하는 가운데서도 이 회장과 삼성이 섣불리 입을 뗄 수 없는 배경엔 삼성 비자금 특검 일정에 대한 고민이 깔려 있을 것이다. 최장 105일까지 가능한 이 특검은 예상대로라면 4월 중순에 가서야 마무리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의 특별수사·감찰본부(특본)는 수사를 마무리하며 ‘김용철 변호사가 제기한 의혹이 대부분 맞다’고 밝혔으며 조준웅 특별검사도 취임일성에서 ‘필요하다면 이 회장 소환도 가능하다’는 식의 발언을 했다. 특검 수사가 만만치 않게 전개될 것을 예고하는 셈이다.
▲ 검찰 수사관들이 삼성증권 본사에서 압수수색하는 모습(위). 연합뉴스
삼성중공업 예인선과 유조선 충돌로 오염된 태안 앞 바다. 사진제공=대전일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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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회장이 걱정해야 할 대상은 비자금 파문뿐만이 아니다. 서해안을 죽음의 바다로 만든 기름유출 사고 원인의 일단이 삼성중공업에도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비난여론이 좀처럼 식지 않고 있다. 녹색연합 등 50개 시민단체들이 모여 ‘삼성중공업이 책임을 미루려고만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국민에게 사과해야 한다’고 나선 상태다. 기름 유출 피해 지역의 삼성에 대한 반발 정서가 극에 달하고 있다는 이야기도 들려올 정도다. 비자금과 관련 삼성중공업의 분식회계 정황이 포착됐다는 이야기도 나오면서 반 삼성 정서가 좀처럼 식지 않을 전망이다.
그러나 이 회장과 삼성은 요지부동이다. 이에 대해 재계 인사들은 지난 2006년 삼성의 대국민 사과성명과 총수일가 사재 8000억 원 출연 효과가 얼마나 지속됐는가를 거론한다. 삼성의 8000억 원이 화젯거리가 되나 했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현대차의 총수일가 사재 1조 원 납부 약속이 터져 나오고 이후 범 삼성가인 신세계에서 1조 원 상속세 납부 계획을 밝히고 나섰다. 삼성의 8000억 출연 약발이 일시에 시들해진 것이다.
이러한 전례 때문에 다수 재계 인사들은 이 회장과 삼성이 끝까지 기다렸다 한방 터뜨리는 식으로 일을 마무리할 것이라 보고 있다. 삼성 비자금 파문이 4월 총선 정치판에서 이슈가 될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에 총선과 특검이 일단락되는 4월 중순까지 숨죽이고 기다릴 것이란 관측이다.
▲ 지난 12월 28일 전경련회관에서 열린 이명박 당선자 초청 경제인 간담회에 참석한 이건희 삼성 회장, 김승연 한화 회장, 이준용 대림 회장. 국회사진기자단 | ||
‘기다리는 삼성’을 둘러싼 환경이 그리 나쁘게만 전개되지는 않을 것이란 전망도 있다. 공익법인의 동일기업 주식 보유한도를 5%에서 10%로 인상하는 상속세 및 증여세법 개정안이 국회 재경위를 통과해 삼성 지배구조에 숨통이 트일 가능성이 열린 점을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금산법 개정안이나 금융지주사법 등으로 인해 삼성에버랜드→삼성생명→삼성전자→삼성카드→삼성에버랜드로 이어지는 환상형 지배구조가 흔들릴 것으로 보였으나 삼성은 끝내 지배구조에 손을 대지 않았다. 대신 ‘삼성이 지배구조 유지를 위한 법 개정에 전력을 쏟고 있다’는 이야기가 반 삼성 정서를 지닌 정치권과 시민단체 인사들 사이에서 끊임없이 제기돼 왔다.
결국 공익재단 주식 보유한도 확대 가능성이 열리면서 삼성문화재단 삼성복지재단 삼성생명공익재단 등 삼성 지배구조를 이루는 계열사들 지배구조에 참여 중인 공익재단들이 증여세 한푼 낼 필요 없이 계열사 지분을 늘릴 여지가 마련됐다.
지난 12월 28일 재계총수들과의 회동에서 이명박 당선자의 친기업 성향이 드러난 점 역시 삼성이 기대를 걸어볼만한 대목이다.
이를 두고 ‘참고 기다리면 길이 열린다는 것을 삼성이 입증했다’고 비아냥거리는 목소리가 높지만 삼성으로선 ‘기다리는 자에게 복이 있다’는 말을 절실히 믿고 싶은 순간일 것이다. 새해를 맞이한 이 회장의 시선은 벌써부터 4월 향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