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1년 이상주 비서실장이 임명됐지만 그는 ‘얼굴마담’에 불과했다. 실세는 ‘왕수석’ 박지원씨. 사진은 올 2월14일 열린 대북송금 관련 기자회견장의 DJ와 박지원 당시 비서 실장(오른쪽). | ||
안 변호사는 그때까지 민정수석실에서 전혀 후보군에 넣지 않았던 인물. 신 수석은 그날 청와대가 안동수 신임 법무부 장관 임명사실을 공식 발표한 다음에 일부 기자들과 만나 이렇게 털어놨다. “김 대통령이 단수로 지목해서 검토하라는 것은 바로 임명하겠다는 뜻이다. 2~3명을 찍어주면 변수가 있지만 이번 경우는 달랐다.”
바로 DJ의 ‘낙점 인사’였다. 재조 경력이 일천해 자질시비가 예상됐던 안 장관을 선택한 이유는 신승남 대검차장을 검찰총장으로 임명하기 위해서였다. 호남 출신인 신 차장은 동교동계 및 DJ의 아들들과 친분이 두터워 정권 초부터 ‘예정된 검찰총장’으로 불렸다. 당시 박순용 검찰총장의 임기가 만료됨에 따라 신 차장은 유일한 대안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현직인 김정길 법무부 장관 역시 호남 출신이라는 게 걸림돌이었다. 결국 DJ는 김 장관을 교체하고 충남 출신인 안 장관을 발탁함으로써 신 총장 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영남 출신인 박순용 전 총장을 장관으로 기용하는 방안도 검토했으나 당사자가 사양했다. 박 전 총장은 ‘실세 총장’ 밑에서 ‘허세 장관’ 노릇을 하고 싶지 않다는 입장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처럼 DJ는 때때로 ‘얼굴마담’ 인사를 시도했다. 그 결과는 예외 없이 참담했다. 정권에 중상을 입혔다. 걷잡을 수 없는 부작용이 터져나왔다. 안 장관의 경우도 임명된 지 43시간 만에 낙마했다. 소위 ‘충성서약’ 파문 탓이다. 21일 임명 직후 안 장관의 변호사 사무실 여직원이 한 방송사 기자의 요청에 따라 팩스로 보내준 취임사 초본이 언론에 공개되면서 사태는 걷잡을 수 없게 됐다.
그 초본에는 ‘가문의 영광인 중책을 맡겨 주시고, 경력이 부족한 저를 파격적으로 발탁해주신 대통령님의 태산 같은 성은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목숨을 바칠 각오로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정권 재창출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등의 ‘황당한’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즉각 야당과 언론들의 질타가 쏟아졌다. 안 장관은 “내가 작성한 문건이 아니다”고 해명했다. DJ도 옷로비 사건과 같은 마녀사냥이라고 여겼지만 오래 버티지 못했다. 안 장관은 역대 최단명 각료가 됐다.
더욱이 민주당 정동영 최고위원 등 초·재선 의원들이 즉각 ‘밀실인사’의 문제점을 거론하며 DJ에게 국정쇄신을 요구했다. ‘마포사무실을 두고 온갖 인사에 관여하는 권노갑 고문을 정리하라’는 것이었다. 권 전 고문의 마포사무실은 50여 평 정도였지만 하루종일 정치인과 민원인들로 붐볐다. “신승남 총장을 기용하려고 김정길 장관을 교체하는 방안을 마련한 것도 마포사무실”이라는 얘기도 파다하게 돌았다.
DJ가 안 장관을 낙점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게 권 전 고문인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았다. 그러나 안 장관 파문이 빌미가 돼서 집권 후반기에 접어든 DJ의 권위가 집권당 내부로부터 공격당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진 것은 분명하다.
영남 출신인 이상주 청와대 비서실장의 기용도 ‘패착’이 되고 말았다. 2001년 9월9일 DJ는 한광옥 비서실장을 민주당 대표로 보내면서 한림대 총장인 이 실장을 후임으로 뽑았다. ‘조용히 보좌하는 비서실’이라는 명분을 내걸었지만 그가 ‘얼굴마담’이 될 것이라는 우려가 많았다.
전두환 정권 때 최연소 청와대 수석(교육문화수석)을 지낸 경력이 있지만 이후 줄곧 학계에 몸담아 정치 및 국정운영 경력이 일천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2000년 한빛은행 불법대출사건과 관련된 구설수로 문화부 장관을 사퇴했다가 청와대에 재입성한 박지원 정책기획수석이 버티고 있었던 상황이다. 이 실장은 허세이고 박 수석이 실세가 될 수밖에 없는 구도였다.
이 실장 본인도 이 같은 분위기를 모르지 않았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이 몰려가서 현안에 대해 질문을 하면 “내가 잘 몰라서 미안하다”는 식으로 얼버무리기 일쑤였다. 반면 박 수석은 DJ와 정확하게 코드를 맞추고 있었다. 이 실장은 ‘수모’를 겪기도 했다.
한 번은 이 실장이 A수석에게 정책 현안에 대해 상의하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부처간 이견이 있는 문제였다. A수석은 이 실장에게 “아, 그 문제는 박지원 수석과 상의해서 얘기가 끝났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이 실장이 다시 “그래도 다시 검토할 필요가 있지 않느냐”는 식으로 말을 이어갔다. 그러자 A수석은 “아니 박 수석과 다 협의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라고 약간 짜증을 내면서 전화를 끊었다.
이 실장으로서는 참담한 경험이었다. 물론 청와대 직제상 정책기획수석이 부처간 조율을 책임지게 돼 있었다. 하지만 비서실장은 당연히 조율된 내용을 보고 받거나 재검토를 지시할 권한을 갖고 있다. 이 실장은 보고조차 받지 못한 상태에서 재검토 권한도 행사하지 못했던 셈이다.
바로 이 시기부터 박 수석에게 ‘왕수석’이라는 별명이 붙기 시작했다. 비서실장이라는 공식기구가 권한을 행사하지 못한 데 따른 현상이다. 동교동계 가신 출신인 남궁진 정무수석이 재·보궐 선거 출마를 위해 나가면서 후임으로 유선호 전 민주당 의원이 임명된 것도 ‘왕수석 현상’을 부채질했다.
유 신임 정무수석은 15대 총선에서 배지를 달았으나 16대 총선에서 낙선했다. DJ는 갈수록 드세지는 민주당 내 쇄신 요구를 의식해 유 수석을 기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유 수석은 쇄신파 리더인 정동영 천정배 의원 등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러나 바로 그 점으로 인해 유 수석은 DJ와의 거리 좁히기가 원천적으로 어려웠다.
세상 이치를 ‘빠삭하게’ 터득하고 있는 박 수석은 ‘왕수석’이라는 별명을 부담스러워했다. 야당과 언론 그리고 민주당 내 쇄신파의 타깃이 되기 때문이다. 그는 기자들을 만나면 종종 “왕수석이라고 부르지 말아 달라”고 요청하곤 했다.
▲ 국민회의 창당 기념식에서 JP와 함께한 DJ(위). 서로 갈등 을 빚은 권노갑 전 고문(아래 오른쪽)과 한화갑 의원(아래 왼쪽). 결국 이들은 모두 DJ정권에 부담만 안긴 셈이 됐다. | ||
DJ가 쇄신파의 당 총재직 사퇴 요구를 수용해 총재직에서 물러나자 박 수석은 동반 사퇴카드를 던졌다. 2001년 11월8일 박 수석은 DJ에게 사표를 제출했고 그 사표는 수리된다.
반면 권 전 고문은 이선 후퇴를 거부한다. DJ는 권 전 고문에게 정계은퇴 수준의 단호한 처신을 주문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권 전 고문은 반발했다. 당시 권 전 고문의 측근은 “우리가 뭘 잘못했느냐”고 흥분하기도 했다. 이후 DJ는 권 전 고문보다 박 수석을 신임하게 됐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DJ의 ‘얼굴마담용 인사’가 박 수석이 야당의 공세와 언론 비판의 타깃으로 굳어지게 되는 데 일조했다는 점이다. 이는 바로 DJ에 대한 정치적 부담으로 연결됐다.
DJ가 2000년 1월20일 국민회의 간판을 내리고 새천년민주당을 창당하면서 시민운동가 출신인 서영훈 전 KBS 사장을 당대표로 임명한 것도 ‘얼굴마담’ 인사의 또 다른 케이스다. 참신한 이미지의 서 대표가 그해 4·13총선 승리를 위해 유리하다는 게 공식적 설명이었지만 속사정은 달랐다.
권 전 고문과 연대해 차기 대권을 노리던 이인제 의원이 4·13총선 중앙선대위원장으로 낙점되면서 일종의 약체 대표체제를 구축한 것이다. 또 9월경으로 예정됐던 최고위원 경선을 앞두고 ‘관리형 대표’가 필요했던 측면도 있다. 진짜 대표는 9월 전대에서 선출한다는 시나리오였다.
서 대표도 이 같은 분위기를 의식해 대표 내정설이 나돌자 “정당에 들어가면 파벌싸움 등에 말려들어야 하는데 나는 소질이 없다”고 고민을 토로하기도 했다. 명망은 두텁지만 정치경험이 전무한 서 대표는 취임 직후 DJ에게 뼈아픈 말실수를 저질렀다. 민주당을 창당하면서 국민회의 때 있었던 ‘내각제 강령’을 삭제한 사실이 알려져 자민련이 강력 반발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서 대표가 기름을 부었다.
서 대표는 “내각제 합의는 자민련과 없어진 국민회의 사이의 일”이라고 딴 소리를 했다.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내각제 없이는 공조도 없다”고 격분했다. 이로 인해 민주당과 자민련의 불편해진 관계는 양당의 4·13총선 연합공천이 무산되는 중요한 단초로 작용한다.
서 대표는 시간이 흐르면서 권 전 고문, 김옥두 사무총장 등 동교동계 구주류가 실권을 장악하는 당내 역학관계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권 전 고문측과 권력갈등을 벌이던 한화갑 의원과의 우호관계도 형성했다. 이러한 대결구도는 민주당 분열을 촉진시켰다.
서 대표는 9월경 권 전 고문이 당대표 교체설을 흘리자 “이 당은 동교동 정당이 아니라 전국정당”이라고 주장, 파문이 일기도 했다. 이후 서 대표 교체문제는 그가 12월 말에 사퇴하기 직전까지 권 전 고문과 한 의원 간의 ‘양갑 갈등’의 주요 테마로 지속됐다.
DJ의 ‘고집인사’도 여권 내의 불필요한 갈등을 부추겼다. 정권 출범을 앞두고 DJ는 청와대 정무수석으로 이기택 전 의원의 ‘꼬마민주당’ 전문위원 출신인 이강래씨를 원했다. 97년 대선 과정에서 보여준 기획 능력 등을 높이 산 것이다. 그러나 측근 그룹인 동교동계는 문희상 의원을 강력 추천했다. DJ는 일단 동교동계의 건의를 수용해 ‘문희상 정무수석-이강래 안기부 기조실장’ 체제로 갔지만 3개월 만인 5월 말에 두 사람의 자리를 맞바꾼다.
문제는 이강래 정무수석을 민주당 실세그룹인 동교동계가 전혀 인정해주지 않았다는 점이다. “금배지를 단 적도 없고 당력도 일천한 이강래가 어떻게 정무수석이냐”는 게 동교동계의 정서였다.
당시 한화갑 원내총무는 이 수석을 문전박대하기도 했다. 국회의사당 1층의 원내총무실로 이 수석이 찾아온 적이 있었다. 책상에 앉아 일을 보던 한 총무는 힐끗 이 수석을 쳐다보고 “기다리라”고 한마디를 던진 뒤 업무를 계속했다. 의자를 권하지도 않았다.
10여 분 가까이 기다리던 이 수석의 표정은 갈수록 붉어졌다. 동교동계 핵심들이 이 수석을 무시한 만큼 당·청 협조도 원활하지 않았다. 기본적인 정보 공유조차 이뤄지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동교동계는 “이 수석이 할 일을 못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DJP 공동 정권이라는 한계도 DJ인사의 난맥상을 부추겼다. 김종필 자민련 명예총재는 확실하게 각료 지분을 챙겼지만 선택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김선길 자민련 전 의원은 DJ정권의 초대 해양수산부 장관으로 기용됐으나 1년 만인 99년 3월 사퇴한다. 한일 어업협정에서 우리 어민들의 생계가 달린 ‘쌍끌이어선’을 아예 협상 대상에서 빼먹어 막대한 피해를 초래했기 때문이다.
JP는 후임으로 정상천 자민련 부총재를 천거했다. DJ는 청와대에 들어온 JP에게 정치인 출신인 김 전 장관이 한일 어업협상에서 중대한 실수를 한 만큼 ‘전문가 장관’이 바람직하다는 입장을 표명했다. JP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정 부총재 카드를 밀어붙였다. 결국 DJ는 손을 들었다.
정 장관은 취임 초부터 여러모로 눈총을 받았다. 어느 방송프로그램에 나가 “왜 해수부 장관이 됐다고 보느냐”는 질문에 “나도 생선회를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답변해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다. 정 장관은 농담조로 말했지만 한일 어업협상 실패로 어민들의 분위기가 험악했던 사실을 감안하면 도에 지나친 태도였다.
JP가 전국구 의원인 정 장관을 끝까지 민 것은 오랫동안 연설문 작성을 도맡아온 송업교 자민련 정책실장이 전국구 의원직을 승계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관측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정 장관은 한동안 “국회에서 무시당하지 않으려면 의원직을 유지하는 게 좋다”는 논리를 펴며 의원직 유지를 고집해 논란이 일기도 했다.
이밖에 부동산 투기 의혹으로 2개월 만에 중도하차한 주양자 보건복지부 장관, 자신이 소유한 건설회사 부도과정에서 재산은닉 혐의로 시달리다가 미 연방항공청의 항공안전 2등급 사태로 결국 경질된 오장섭 건설교통부 장관 등은 모두 자민련 몫 장관들이었다. DJ정권 내내 야당 등은 ‘호남편중 인사’를 집중 공격했지만 DJ정권의 인사 난맥상은 훨씬 넓고 깊게 퍼져 있었던 셈이다.
이진설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