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어포스원에 타는 척, 비밀 경로로 별도 군용기 이동…취재진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 한 달 이상 언론에 은폐
[일요신문] ‘내가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모르게 하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80)의 기상천외한 대피 작전이 뒤늦게 밝혀져 워싱턴 정가가 술렁이고 있다. 지난 7월 튀르키예 앙카라에서 열린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정상회의에 참석했던 트럼프 대통령이 마치 첩보 영화에서나 볼 법한 극적인 방법으로 현장을 벗어난 사실이 ‘워싱턴포스트’ 보도를 통해 폭로됐기 때문이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에어포스원에 올라탄 트럼프 대통령이 불과 몇 분 후 반대편 출입문을 통해 몰래 빠져나가 별도의 군용기로 이동한 사실이 뒤늦게 알려진 것이다. 이 기발한 작전의 배경에는 트럼프 대통령을 향한 이란의 암살 위협이 있었다. 행여 발생할지 모르는 위기 상황에 대비한 일종의 비밀 탈출 작전이었던 셈이다. 하지만 비난은 다른 곳에서 터져 나왔다. 당시 트럼프가 에어포스원에서 빠져나간 사실을 모른 채 탑승해있던 취재진과 백악관 직원들이 사실상 미끼로 활용된 것 아니냐는 비난이었다.
7월 8일 튀르키예 앙카라를 출발해 영국 밀든홀 미 공군기지에 도착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전용기인 에어포스원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지난 7월 8일, 튀르키예 앙카라 국제공항 활주로. NATO 정상회의를 마치고 영국으로 향하는 트럼프가 취재진과 TV 카메라가 지켜보는 가운데 에어포스원 계단을 올랐다. 계단 끝에 올라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하는 모습까지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었고, 이 평범한 모습은 전 세계에 생중계됐다.
트럼프가 기내로 들어간 후 펼쳐진 상황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달랐다. 트럼프와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 등 일부 핵심 측근들은 자리에 착석하는 대신 급히 반대편 출입문으로 이동했다. 그곳에는 기내식과 물품을 운반하는 케이터링 트럭이 대기하고 있었고, 트럼프 일행은 은밀히 이 트럭에 올라탄 후 공항 활주로를 가로질러 인근에 있는 미 공군 C-32A로 갈아탔다. C-32A는 보잉 757을 개조한 고위급 인사 수송기로, 대통령이 탑승하면 원칙적으로 ‘에어포스원’이라는 호출부호를 사용해야 했지만 당시 비행은 대통령의 탑승 사실 자체가 극비였기 때문에 ‘리치18(RCH18)’이라는 일반 군용 수송기 호출부호가 사용됐다.
당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전혀 모르고 있던 백악관 출입기자단과 직원들, 그리고 경호 인력은 에어포스원에 그대로 남아있었다. 모두가 평소처럼 트럼프가 비행기 안에 있다고 믿고 있었고, 그렇게 대통령이 탑승하지 않은 에어포스원은 공식 호출부호인 ‘AF1’을 사용하며 영국으로 향했다.
영국 밀든홀 미 공군기지에 먼저 도착한 것은 트럼프를 태운 C-32A였다. 트럼프는 그곳에서 은밀히 마련된 비밀 경로를 통해 에어포스원으로 건너갔고, 마치 에어포스원을 타고 막 도착한 듯 다시 카메라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야말로 치밀한 연출이 아닐 수 없었다.
7월 8일 트럼프 대통령이 튀르키예를 떠나기 전 앙카라 에센보아 공항의 에어포스원 옆에 케이터링 트럭이 주차돼 있는 모습. 사진=로이터/연합뉴스트럼프가 이처럼 사상 초유의 작전을 감행한 배경에는 이란의 구체적인 암살 위협이 있었다. 미 정보당국이 이란 최고지도부 및 정예군 혁명수비대(IRGC)가 대통령 또는 대통령 전용기를 겨냥한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했던 것이다. 더욱이 트럼프가 NATO 정상회의를 마치고 튀르키예를 떠나던 당시에는 미국과 이란 간 협상이 결렬된 뒤 긴장이 다시 고조되던 때였다.
튀르키예의 지정학적 위치도 불안을 더했다. 앙카라 공항을 이륙해 유럽 상공으로 향하는 비행 노선은 이란의 중거리 미사일 사정권 안에 들어있어 사실상 극도의 위험에 노출돼 있다. 이에 따라 미 비밀경호국(SS)과 국방부는 적을 혼란에 빠뜨리기 위해 대통령이 어느 비행기에 타고 있는지 알 수 없도록 교란하는 위장술이 불가피했다고 밝혔다.
사실 경호 측면에서는 충분히 납득할 만한 결정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기자와 일부 백악관 직원들이 에어포스원에 그대로 탑승해 있었다. 이에 미 언론과 정치권에서는 거센 비판이 쏟아졌다. 백악관이 민간인을 ‘인간 방패’이자 ‘미끼’로 삼았다는 윤리적인 측면에서의 비난이었다. 과거 빌 클린턴, 조지 W. 부시, 조 바이든 전 대통령 역시 위험 지역을 방문할 때면 간혹 비행기 전등을 끄거나 은밀히 이동하는 등 보안 조치를 취한 바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일부 기자들이 동행하거나, 사후 즉각적으로 사실관계를 설명하는 등 기자들의 안전과 취재 권리를 보장했었다.
이번 작전은 전혀 달랐다. 취재진을 위험에 무방비로 노출시켰을 뿐만 아니라, 그 후에도 한 달 이상 사실을 은폐하고 거짓 브리핑을 해왔다. 심지어 트럼프는 작전 직후 영국 기지에 도착해서는 “왜 창문 가리개를 내리라고 지시했느냐”는 기자들의 질문에 작전 사실은 숨긴 채 “위험한 비행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죽으면 당신들도 죽는 거다. 안 그런가”라는 식으로 농담을 던진 것으로 확인돼 더욱 공분을 샀다.
7월 8일 에센보아 공항엔 에어포스원과 C-32A가 나란히 주기되어 있었다. 이미지=워싱턴포스트트럼프 정부에서 비밀 대피 작전과 기만 전술이 처음 사용된 건 아니다. 사실 위험지역에 대통령이 방문할 때면 이런 비밀 작전을 펼치는 것은 미국 대통령 경호국의 오랜 전술이기도 하다. 가령 2019년 첫 임기 당시 트럼프는 추수감사절에 예고 없이 몇몇 기자단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바그람 기지를 전격 방문해 미군 장병들을 만났다. 이 당시에도 플로리다에서는 트럼프가 마러라고에 머물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하기 위해 또 다른 기자들이 머물러 있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번 비밀 작전의 또 다른 배경으로 신형 에어포스원에 대한 불신을 꼽는다. 카타르 왕가로부터 기증받은 약 4억 달러(약 5600억 원) 상당의 이 기체는 화려한 내장재는 물론이요, 높은 수준의 보안 프로토콜을 갖춘 최첨단 항공기다.
다만 애초에 대통령 전용기로 설계된 항공기가 아니었다는 점이 문제였다. 약 14년 된 보잉 747-8을 개조한 기체로, 미국 정부가 차세대 에어포스원 도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보잉사의 납기가 지연되자 임시로 활용하고 있는 대체수단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방호 시스템이었다. 단기간에 대통령 전용기로 개조돼 투입된 만큼 기존의 에어포스원과 동일한 수준의 방호 시스템이 완벽하게 갖춰져 있지 못한 것으로 알려졌다.
가령 기존 에어포스원에는 미사일 교란 장치인 DIRCM/LAIRCM 등 레이저 지향성 적외선 미사일 교란 장치가 완비되어 있는 반면, 신형 전용기에는 이런 교란 장치가 미비한 상태다. 또한 구형에는 핵폭발 시 발생하는 강렬한 전자기파를 차단하는 특수 방호 차폐가 적용되어 있지만, 신형에는 이런 기능이 부족하다. 뿐만이 아니다. 전시에 공중 지휘센터 역할을 하는 암호화된 백악관 전용 군용 통신망도 신형 에어포스원에는 민간 위성 통신망으로 이뤄져 있다.
이런 배경에서 전문가들은 트럼프가 앙카라에 도착했을 당시에는 신형 에어포스원을 이용했지만, 정작 돌아갈 때는 신형 대신 구형 에어포스원을 타겠다고 공개적으로 밝혔던 이유가 이런 불신에서 비롯된 것 아니냐고 추측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추측에 대해 당시 트럼프는 “영국에 주둔하는 미군 장병들이 새 비행기를 구경할 수 있도록 내가 구형 에어포스원을 타겠다”는 취지로 해명한 바 있다.
과거 대통령들은? 클린턴, 대피 작전 기자단에 브리핑
대통령의 신변 안전을 위해 벌이는 백악관의 비밀 이동 작전은 사실 낯선 게 아니다. 미 정보당국과 비밀경호국(SS)은 대통령이 전쟁지역이나 테러 위협이 높은 지역을 방문할 때면 간혹 기만 비행 작전을 펼쳐왔다.
클린턴 전 대통령이 1996년 11월 6일 에어포스원에서 자신의 대선 승리에 대해 기자들과 대화하고 있다. 사진=AP/연합뉴스대표적인 사례는 2000년 3월,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파키스탄 방문이었다. 당시는 카슈미르를 둘러싼 인도와 파키스탄 간의 긴장이 극에 달했던 상황이었던 데다,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가 클린턴이 탑승한 에어포스원을 겨냥해 지대공 미사일(스팅어) 공격을 준비하고 있다는 구체적인 첩보까지 입수된 상황이었다.
이에 미 당국은 ‘에어포스원’이라는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진 보잉 747 전용기를 ‘미끼’로 먼저 띄웠고, 식별용 표지가 없는 소형 민간 업무용 제트기에는 클린턴 대통령이 탑승하도록 조치했다. 심지어 도착지인 이슬라마바드 공항에서도 대역 경호원이 미끼로 사용된 에어포스원에서 먼저 내리는 등 치밀한 연출이 이뤄졌다.
다만 백악관 측은 당시 기자들에게도 작전 사실을 전달했었다. 위험 지역에 진입하기 전, 백악관 출입기자단 대표인 수전 페이지에게 비공식 브리핑을 통해 안보상 위협 상황과 미끼 비행기 운용 사실, 기자단의 안전 대책을 설명했다.
조지 W. 부시 전 대통령 역시 2003년 이라크를 방문했을 당시 이 사실을 최대한 비밀에 부친 채 극비리에 이동했었다. 백악관이 이라크 방문 사실을 공개한 건 부시가 미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탑승한 후였다. 그런가 하면 2010년 아프가니스탄을 비밀리에 방문했던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의 실제 행선지는 출발 전까지 극비에 부친 채 공개되지 않았다. 위험지역에 대통령이 나타나는 순간 공격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에 이동 자체를 비밀에 부치는 전형적인 경호전술이었다.
조 바이든 전 대통령의 2023년 우크라이나 키이우 방문 역시 극도의 보안 속에 이뤄졌다. 바이든은 백악관에서 새벽에 빠져나와 C-32를 타고 폴란드로 이동한 뒤 키이우까지 비밀 열차를 이용했다. 기자들에게 방문 사실을 사전에 대대적으로 알리지는 않았지만, 두 명의 기자가 동행해 바이든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만남을 기록했다.
미사일 감지하고 속이고…에어스포스원 최첨단 공중 경호 시스템
‘날아다니는 백악관’이라고 불리는 에어포스원은 단순한 대통령 전용기가 아닌, 전시에 미군 전체를 지휘하는 공중 통수권 본부이자 최첨단 요새다. 보잉 747-200B를 기반으로 제작된 전용기로, 1990년부터 대통령의 해외 순방에 사용됐다. 외관은 민간 여객기와 비슷하지만 실제로는 대대적인 개조 작업을 거친 후 세계 최고 수준의 방어 시스템이 탑재된 최첨단 항공기로 거듭났다. 단, 방호 시스템 가운데 상당수는 기밀이며, 공개자료를 통해 확인되는 것은 전체 시스템 가운데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카타르 왕가로부터 기증받은 신형 에어포스원. 트럼프는 이 기체의 방호 시스템을 불신하고 있다. AP/연합뉴스#미사일 경보 시스템(AN/AAR-54)
미사일 엔진에서 나오는 자외선(UV) 신호를 감지하는 시스템이다. 미사일이 발사될 때 엔진에서 발생하는 강한 신호를 감지하고, 여러 위협을 추적 및 분류해 대응 시스템에 정보를 넘기는 역할을 한다. 즉, 미사일이 육안으로 보이기 전에 먼저 공격 징후를 찾아내는 센서다.
#지향성 적외선 교란장치(DIRCM / LAIRCM)
열추적 미사일의 ‘눈’을 속이는 장치다. 지대공 미사일이나 휴대용 미사일(MANPADS)이 접근하면 적외선 미사일 경보 시스템(MWS)이 이를 즉각 감지한 후 방향성 적외선 에너지를 쏘아 접근하는 미사일의 탐지기를 혼란시킨다. 다시 말해 미사일의 목표물 추적 기능을 완벽히 교란 및 무력화하는 임무를 맡는다.
#전자기파(EMP) 및 핵폭풍 방호
핵폭발 시 발생하는 강력한 전자기파(EMP)는 일반 항공기의 모든 전자 회로를 마비시킨다. 하지만 에어포스원은 기체 전체에 특수 차폐 배선과 밀폐식 격벽을 적용해 EMP 공격이나 강력한 전자기 교란 속에서도 모든 항공 전자 장비와 통신망이 정상 작동하도록 특수 설계되어 있다.
#물리적 기만 시스템(채프&플레어)
기체 하부와 측면에 대량 탑재되어 있는 ‘채프’는 작은 금속성 물질을 분사해 레이더 신호를 교란하는 시스템이다. 레이더를 이용해 항공기 위치를 추적하는 미사일이 실제 항공기와 주변에 생성된 신호를 구분하기 어렵도록 만드는 기만 장치다.
‘플레어’는 열추적 미사일을 속이는 대표적인 장비로, 항공기 엔진 열보다 훨씬 뜨거운 화염을 내뿜는다. 이로써 미사일이 항공기 엔진 대신 더 뜨거운 ‘플레어’를 쫓도록 유도한다.
#보안 기밀 통신망 및 공중 급유 시스템
에어포스원에서는 암호화된 위성 통신을 사용해 전 세계 어디서든 미 국방부 및 핵전력 지휘부와 실시간 기밀 통신이 가능하다. 또한 비상시에 공중에서 연료를 공급받는 공중 급유 장치가 탑재돼 있어 지상에 착륙하지 않고도 며칠 동안 공중에 체류하며 지휘권을 행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