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신대장’ 포털공룡에 무릎?
NHN이 무료백신을 공급하겠다고 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지난해 9월 러시아산 ‘카스퍼스키’ 엔진을 탑재한 ‘PC그린’이라는 백신을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한 것. PC그린은 악성코드나 바이러스를 치료하는 기능뿐 아니라 실시간 감시기능까지 갖춘 백신 프로그램. 당시만 해도 실시간 감시기능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보안업계는 발끈했다. 그들은 “네이버가 무료백신 서비스를 시작할 경우 국내 보안업계는 초토화될 것이다”라고 주장하며 일제히 NHN을 성토했다. 특히 업계의 대표주자격인 안랩은 “법적 대응까지도 고려할 것이다”라며 NHN을 압박했다. 이처럼 보안업계가 강하게 반발하자 NHN은 한 발 물러섰다. PC그린에서 실시간 감시기능을 제외한 나머지 기능만 무료로 제공하겠다고 밝힌 것이다.
그로부터 4개월 후 NHN과 안랩은 무료백신 공급에 전격 합의했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보안업계에서는 유료백신 시장을 지배하고 있는 안랩이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즉, 인터넷 시장의 70% 이상을 점유하며 ‘제국’이라고 불리는 네이버와 대립각을 세우는 것보다는 화해하는 쪽이 유리할 것이라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여론도 안랩에 그리 호의적이지는 않았다. 지난해 NHN의 무료백신 공급을 안랩이 저지시키자 많은 네티즌들은 “업계 이기주의다”라며 안랩을 비난했다. 이러한 반응은 인터넷을 장악하고 있는 네이버를 중심으로 형성됐다. 그동안 네티즌들로부터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던 안랩으로서는 악화된 여론이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보안시장에서 유료백신의 입지가 좁아진 것도 안랩의 입장 변경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파일 압축 프로그램 ‘알집’으로 유명한 이스트소프트는 지난해 11월 개인 사용자에게 ‘실시간 기능’이 포함된 백신인 ‘알약’을 무료로 제공한다고 밝힌 바 있다. 알약에 대한 반응은 안랩이 위기감을 느낄 만큼 폭발적이었다.
더군다나 이스트소프트는 같은 보안업체였기 때문에 안랩으로선 더 이상 ‘NHN이 상대적으로 영세한 보안업체의 밥그릇을 빼앗는다’는 식의 논리를 펼 수도 없어졌다. 이밖에 여러 보안업체에서도 무료백신을 배포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상황에서 안랩이 마지못해 네이버에 무료로 백신을 공급하기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안랩에서는 이번 합의가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지난 연말부터 양사가 상생 방안을 찾기 위해 꾸준히 접촉을 한 결과 최선의 방안이 도출됐다는 게 안랩의 입장이다. 하지만 안랩이 지난해 “법적 대응” 운운하며 NHN을 강하게 밀어붙이던 모습을 떠올려보면 안랩의 이 말을 순순히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인다. 이것이 바로 “안랩이 결국 NHN에 무릎을 꿇었다”라는 말이 나오는 이유다.
▲ 안철수연구소(위)와 NHN 사이트의 회사소개 페이지. | ||
일부 언론에서는 안랩의 금전적인 손실을 거론하며 영업이익이 줄어들 것이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은 사실과는 다르다. 안랩에 따르면 백신의 무료 전환에 따른 적정의 보상금을 NHN으로부터 받을 것이라고 한다. 안랩이 돈을 받고 백신 엔진을 NHN에 넘기면 네이버가 무료로 이용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지금 안랩은 기존 유료 사용자들의 반발을 무마하는 것이 가장 어려운 문제라고 한다. 원하는 고객들에게는 환불까지도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이와는 별도로 무료백신과 차별화된 백신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개발해 유료백신 시장에도 힘쓴다는 게 회사 측의 입장이다. 안랩에서는 아무리 무료 시장이 커진다고 해도 유료 콘텐츠를 강화하면 큰 타격은 없을 것이란 전망을 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동종업계에서는 업계 1위인 안랩의 무료백신 공급으로 유료백신 시장은 점차 설 자리를 잃어버릴 것이라고 보는 이들이 많다. 백신은 무료라는 인식이 확산될 경우 ‘누가 돈을 내고 백신을 구입하겠느냐’라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안랩과 함께 유일하게 국산 백신 엔진을 개발해 생산하고 있는 하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 관계자는 “이제 누가 공들여 기술개발을 하겠느냐. 보안기술은 쇠퇴할 것이다”라며 우려의 뜻을 보였다. 이어 그는 “불특정 다수가 접속하는 네이버의 백신 이용자들이 위험에 노출될 경우 그 피해는 막심할 수 있다”며 철저한 관리를 주문했다.
하우리도 지금 NHN과 무료백신을 놓고 협의 중이라고 한다. 만약 이것이 성사되면 네이버 사용자들은 국내 보안업체 1, 2위의 유료백신을 무료로 이용할 수 있게 된다. 보안업계에서 유료 시장이 무너질 것이라고 걱정하는 것도 이런 까닭에서다. 그렇다고 대세를 거스를 수는 없다는 점이 보안업계의 딜레마다.
보안 전문가인 숭실대학교 컴퓨터공학과 김명호 교수는 “앞으로 백신은 무료 시장으로 재편될 것이다”라며 “이 경우 검증되지 않은 백신이 쏟아져 나와 보안에 구멍이 뚫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김 교수는 “네이버가 무료백신을 단지 마케팅 수단으로만 이용하려고 한다면 사후 점검 시스템이 허술해질 수밖에 없기 때문에 소비자의 피해가 늘어날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NHN 측은 이러한 우려들에 대해 “그럴 일은 없다”고 반박했다. 안랩과 끊임없는 협력을 통해 최대한 기능이 향상된 백신을 신속하게 공급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루에도 수십 개의 악성 바이러스가 생기고 있는 현실에서 전문 보안업체가 아닌 네이버가 재빠른 대응책을 마련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그래서 많은 전문가들이 지금보다 많은 인력과 비용을 백신 업무에 할애할 필요가 있다고 NHN에 충고하고 있다. 이에 대해 네이버는 “무료백신과 관련해 별도의 인력 충원은 계획하고 있지 않다”고 밝혔다.
동진서 기자 jsdong@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