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 잘 키운 나무, 철강·플라스틱 대체재로 부상…정작 원목 생산자들은 낮은 수익성에 한숨
[일요신문] 나무로 어디까지 만들 수 있을까. 집과 가구 정도를 떠올렸다면, 이미 옛말이다. NHK에 따르면, 일본에서는 나무가 84m 고층빌딩을 떠받치고, 자동차 부품이 되며, 급기야 우주로 날아갈 인공위성 소재로 변신하고 있다. 이러한 배경에는 반세기 넘게 자란 숲이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로 조성한 인공림이 이제 본격적으로 꺼내 쓸 ‘이용기’에 접어든 것이다. 때마침 기술도 달라졌다. 불과 충격에 약했던 목재의 한계를 보완하고, 목재에서 뽑아낸 성분으로 철강과 플라스틱을 대신하려는 기술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이른바 ‘목재 르네상스’다.
도쿄 니혼바시에 지상 18층 목조 오피스 빌딩이 건설 중이다. 사진=미쓰이부동산 홈페이지일본은 국토의 약 3분의 2가 산림이다. 야노 히로유키 교토대 명예교수는 “흔히 일본을 자원이 없는 나라라고들 하지만, 사실 뒷산에는 얼마든지 있다”고 말한다. 철강이나 플라스틱의 원료 상당 부분을 수입에 의존하는 것과 달리, 목재는 일본에서 키우고 다시 생산할 수 있는 ‘자국 자원’이라는 얘기다.
물론 나무를 산업 자원으로 쓰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진이 잦은 일본에서 대형 목조건축물을 세우려면 고도의 기술이 필요하다. 강도와 화재 위험, 비용 등의 문제가 번번이 걸림돌이 돼왔다. 그리고 최근 내진·내화 기술이 발전하면서 그 벽이 하나둘 허물어지고 있다.
지상 18층 목조 오피스 빌딩 조감도. 일본산 삼나무 등 약 4400그루 분량의 목재가 기둥과 보 등에 쓰인다. 사진=미쓰이부동산 홈페이지상징적인 곳이 도쿄 니혼바시다. 이곳에는 지상 18층, 높이 84m의 목조 고층빌딩이 건설 중이다. 일본산 삼나무 등 약 4400그루 분량의 목재가 기둥과 보 등에 쓰인다. 관건은 ‘흔들림’을 어떻게 견디느냐다. 판재의 결을 서로 엇갈리게 붙이는 ‘CLT(직교집성판)’ 등을 활용해 여러 방향에서 가해지는 힘에 버티도록 했다. 화재에도 대비했다. 기둥 바깥쪽 목재가 불에 타면서 탄화층을 만들어 불길이 번지는 속도를 늦추고, 안쪽의 석고 등이 열을 흡수해 중심부를 보호하는 방식이다. 이러한 구조를 통해 철골과 비슷한 수준의 성능을 확보했다.
환경적 이점도 빼놓을 수 없다. NHK에 따르면 “철골로 지을 때보다 목재를 활용하면 건설 과정의 이산화탄소 배출을 약 30% 줄일 수 있다”고 한다. 일본 정부도 중·대규모 목조건축에 대한 보조금과 기술 실증 지원 등을 통해 목재 이용 확대에 힘을 싣고 있다.
나무의 가능성은 건축에서 멈추지 않는다. 이번엔 자동차다. 차량의 보닛을 목재 100%로 만들고, 실내 부품에도 목재를 적용하는 시도가 이뤄지고 있다. 휠 등에 쓰인 ‘셀룰로오스 나노파이버(CNF)’는 나무를 자동차 소재로 바꾸는 핵심 기술 중 하나다.
CNF는 나무를 구성하는 강한 섬유 성분인 셀룰로오스를 나노미터 크기까지 잘게 쪼개 만든다. 무게는 철강의 5분의 1에 불과하지만, 강도는 약 5배에 달한다. 플라스틱과 섞으면 강도를 높이면서 플라스틱 사용량도 30%가량 줄일 수 있다. 그동안 약점으로 꼽혔던 충격 문제도 기술로 보완하고 있다. 일본 자동차 부품업체와 대학 연구기관이 충격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새로운 가공법을 개발해 실용화에 한 발 더 다가섰다는 평가다.
신소재 셀룰로오스 나노파이버(CNF)를 활용한 자동차 휠 부품. 사진=NHK 캡처일본산 나무의 다음 행선지는 뜻밖에도 우주다. 지난 5월에는 목재 유래 CNF 100%로 만든 인공위성용 신소재가 국제우주정거장(ISS)으로 보내졌다. 향후 인공위성 등 우주산업에 활용하기에 앞서 우주 환경에서의 내구성을 확인하기 위한 시험이다. 이 소재는 인공위성이 수명을 다한 뒤 대기권에 재진입 때 완전히 연소할 수 있어 우주 쓰레기와 환경 부담을 줄이는 데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그렇다면 일본은 왜 지금 나무의 새로운 쓰임을 찾는 데 공을 들이는 걸까. 답은 산에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대규모로 심은 인공림이 반세기를 훌쩍 넘기며 본격적인 ‘이용기’를 맞았기 때문이다. 야노 교수에 따르면 일본 인공림의 상당수는 이미 50년 이상 자랐다. 계속 고령화하면 가공이나 이용이 까다로워지고, 이산화탄소 흡수량도 둔화할 수 있다. “잘 자란 나무를 적절한 시기에 베어 쓰고 다시 심어 숲의 세대교체를 이어갈 때”라는 설명이다.
에히메현의 산간마을 기호쿠는 오래된 숲에서 새로운 산업의 가능성을 찾고 있다. 약 20억 엔(약 172억 원)을 투입해 목재 신소재 ‘개질(改質) 리그닌’ 생산공장을 짓는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전체 면적의 약 80퍼센트가 산림인 일본 에히메현 기호쿠. 이곳에서는 지역의 삼나무를 활용한 ‘개질 리그닌’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사진=에히메현 TV 캡처리그닌은 나무의 약 30%를 차지하며 단단함을 유지하는 성분이다. 특히 일본 삼나무는 구조의 편차가 적어 리그닌을 안정적으로 추출하기에 유리하다. 문제는 리그닌이 가공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NHK에 따르면 “일본 연구진이 리그닌에 열을 가하면 녹는 성질을 부여하는 방법을 찾아냈다”고 한다. 이렇게 만든 ‘개질 리그닌’은 석유계 플라스틱에 섞거나 이를 대체해 강도와 내열성을 높일 수 있다. 향후 PC와 스마트폰의 전자기판 등으로도 쓰임새를 넓혀갈 것으로 보인다.
공장이 가동되면 연간 1만 6000㎥의 삼나무 수요가 새로 생긴다. 나무를 첨단소재로 바꿔 지역의 새로운 산업으로 키우겠다는 구상이다. 그런데 현지 임업인들의 반응은 마냥 밝지만은 않다. 기존 공급 물량을 대는 것만으로도 빠듯한 상황에서, 개질 리그닌 공장에 들어갈 나무까지 추가로 생산할 여력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낮은 수익성이다. 18년째 임업에 종사하는 한 생산자는 “지금의 목재 가격으로는 보조금 없이 사업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토로했다.
잘 자란 나무를 베어 목재로 공급하는 일본의 임업 현장. 사진=NHK 캡처원목 가격이 낮은 데는 복잡한 유통구조가 영향을 미친다. 산에서 벤 나무가 최종 제품이 되기까지 원목시장과 제재공장, 프리컷공장, 판매업자, 제조업체 등 여러 단계를 거친다. 그 과정에서 정작 원목 생산자에게 돌아가는 몫은 좀처럼 커지지 않는다. 기호쿠의 임업인들이 “공장에서 아무리 많은 나무를 써도 원목 가격이 오르지 않으면 별다른 이익이 없다”고 말하는 이유다.
온도 차는 크다. 건축과 자동차, 첨단소재가 있는 ‘다운스트림’에서는 기술 혁신으로 나무의 가치가 높아지는 반면, 나무를 심고 베는 ‘업스트림’은 여전히 낮은 수익성에 시달린다. 구라지 고이치로 도쿄대 교수는 “최종 제품의 가치가 높아져도 그 이익이 원목 생산자에게 돌아가지 않는다면 ‘목재 르네상스’는 지속되기 어렵다”고 지적한다. 결국 나무의 가치를 산까지 돌려보내고, 생산자가 다시 나무를 키울 수 있는 순환구조를 만드는 것이 과제로 남는다. 일본의 ‘목재 르네상스’가 완성해야 할 마지막 고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