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지중지 키웠더니 애태우는 ‘반도체’
▲ 두문불출 김준기 회장이 하이텍 밀어주기 논란 등으로 구설수에 오르면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 ||
먼저 지난해 동부가 비메모리 반도체 업체 동부하이텍 고문으로 영입한 진대제 전 장관이 동부로부터 법인 지분을 인수하려다 성공하지 못한 것이 눈길을 끌었다. 진 전 장관이 운영하는 펀드 ‘스카이레이크’는 동부 계열사들이 보유하고 있는 반도체 웨이퍼 제조업체 실트론 지분 49%를 8000억 원에 인수하려 했다. 그런데 동부 측이 해당 지분을 보고펀드와 KTB펀드 등으로 구성된 SHP컨소시엄에 7000억 원대에 넘기기로 결정하면서 뒷말을 낳은 것이다. 스카이레이크 측이 ‘왜 더 비싼 가격에도 팔지 않느냐’라며 아쉬움을 표해 일부 언론은 이 일로 동부와 진 전 장관의 관계가 깨졌다고 다뤘으나 동부 측은 손사래를 쳤다. 진 전 장관은 앞으로도 동부에서 고문직을 계속 수행할 거라 밝힌 것이다. 1000억 원 싼 가격에 SHP컨소시엄에 팔아넘긴 것에 대해서는 “매각 주간사인 JP 모건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지분 판매가격 외에도 다른 조건들을 고려해 결정한 것”이라며 갈등의 소지가 없음을 덧붙인다.
이 일과 관련해 동부 측의 공시 때문에 혼선이 빚어지기도 했다. 실트론 지분 2%를 보유하고 있던 동부정밀화학이 지난 12월 17일 보고펀드 지분 매각을 결정하지 못해 이사회 부결 공시를 냈다가 열흘 만에 지분 매각 이사회 결정 공시를 낸 것이다.
이는 불성실공시 논란을 낳기도 했다. 동부정밀화학 이사회에서 한 사외이사가 ‘1000억 원 더 비싸게 부른 진 전 장관 측에 팔아야 한다’고 주장해 당일 가결되지 않았던 것이며 결국 이사회 재소집을 통해 의견이 모여 지분 매각 결정이 났다는 것이다. 이는 나머지 47% 지분을 지닌 동부 계열사들이 모두 이사회에서 지분 매각을 결의한 이후 벌어진 일이라 관심을 끌었다.
동부 측은 이 일에 대해 오히려 단순한 거수기가 아닌 민주적인 이사회 절차를 보여준 사례라 설명한다.
동부하이텍의 재무구조 개선 작업의 일환으로 벌어진 몇 가지 일을 놓고도 논란이 일었다. 12월 28일 동부하이텍은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부동산을 동부화재에 매각한다고 공시했다. 매각 가격은 299억 원. 계열사에 부동산을 팔아넘김으로써 현금유동성을 확보한 것이다.
해당 부동산은 동부금융센터가 들어서 있는 건물·토지의 일부다. 동부 입장에선 동부하이텍이 필요한 자금을 확보하는 동시에 동부 계열사들이 들어서있는 건물의 일부를 다른 기업에 팔아넘기느니 동부화재에 매각하는 것이 합당하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설명이다.
김 회장이 자신 명의의 동부화재 지분 200만 주(지분율 2.82%)를 동부하이텍에 빌려주면서 주식시세의 연간 1%를 수수료로 받기로 한 일도 눈길을 끌었다. 동부 측은 동부하이텍이 당장 필요한 자금을 금융권에서 끌어오는데 필요한 담보를 김 회장이 대주주 차원에서 제공한 것이며 그냥 건네줄 경우 부당 내부지원이 되기에 ‘시세의 1%’라는 1년 수수료를 달아놓았다고 밝힌다.
일각에선 김 회장이 ‘대여’가 아닌 ‘증여’를 통해 동부하이텍의 재무구조를 지원하는 것이 대주주로서 ‘더 통 큰 자세’였을 것이라 지적하기도 한다. 그러나 이 경우 동부하이텍의 재무상황에 대한 외부 인식을 악화시킬 수 있다는 우려가 뒤를 따를 수 있다. 대여가 아닌 증여는 동부하이텍의 대여금 상환능력에 의심을 품게 하는 요인이 될 수 있는 까닭에서다. 김 회장이 대여해준 지분의 가치가 1034억 원에 달해 증여의 경우 만만치 않은 증여세 부담이 김 회장 몫이 될 수도 있다는 점 또한 대여 결정의 배경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저런 일들로 김준기 회장이 골머리를 앓고 있을 것이란 시각 때문인지 얼마 전 김 회장이 사석에서 짤막하게 던진 한마디가 단숨에 화젯거리가 되기도 했다. 지난 10일 구자경 LG 명예회장 부인 고 차정임 씨의 빈소를 찾은 김 회장에게 근황을 묻는 기자들 질문이 쏟아지자 김 회장이 “40년이나 (경영을) 했는데 이제 그만둬야죠”라고 답한 것이 금세 언론과 재계 인사들로 하여금 동부그룹의 후계 시점을 저울질하는 단초를 제공하고 만 것이다.
동부 측은 “(기자들이) 요즘 추진하는 일들이 많다고 치켜세우자 (김 회장이) 그저 겸손하게 건넨 이야기일 뿐”이라고 밝혔다. 올해로 65세가 되는 김 회장이 여전히 건재하고 34세인 아들 남호 씨가 아직 학업 중이라 후계 문제 언급은 이르다는 입장이다. 동부 측은 김 회장이 관련 보도를 접하고 웃어 넘겼다고 밝힌다. 그러나 최근 동부를 둘러싼 개운치 못한 여건들을 대변한 김 회장의 우회적 심경 토로로 보는 시각도 가시지 않고 있다.
천우진 기자 wjchu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