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의날’ 기념사 “정치 부당한 간섭” 언급, 민주당은 국회 법사위 증인 출석 다시 시도할 수도…이흥구 대법관 퇴임하며 자성 목소리

대법관후보추천위원회가 대법관 후보자를 대법원장에 추천하면 관례상 청와대와 대법원이 사전 협의를 통해 후보를 추리고, 대법원장이 대통령을 직접 찾아가 대면으로 제청 해왔다. 그런데 이번에는 협의가 제대로 없었고 제청 형식도 서면으로 통보했다는 게 청와대 입장이다.
조 대법원장은 지난 1월 후보추천위로부터 노 전 대법관 후임 후보군을 추천 받아놓고도, 청와대와 대법원 사이에 의사가 불일치하자 후보 임명 제청을 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대법관 자리는 반년 가까이 비어 있었다. 그러던 중 9월 이 전 대법관까지 임기만료 퇴임을 앞두자 더 이상 임명 제청을 미룰 수 없어 1+1 방식의 ‘끼워넣기’를 했다는 분석이다. 김성수 판사 관련해서는 청와대와 대법원이 사전 협의가 있었지만 손봉기 판사는 협의가 없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여권에서는 조희대 대법원장의 ‘서면 제청’에 격앙된 반응을 보였다. 김민석 당대표는 이번 사태를 ‘사법농단’이라고 규정하고 조 대법원장 즉각 사퇴를 요구했다. 민주당 일각에서는 ‘조희대 탄핵’ 주장까지 나왔다.
청와대 역시 조 대법원장의 ‘서면 제청’에 대해 “협의를 건너뛴 것이자, 대통령의 임명권을 존중하지 않은 일방 통보절차”라며 “전례가 없는 헌정사상 초유의 상황”이라고 규정했다.
장고 끝에 청와대는 지난 8월 28일 두 대법관 후보자에 대해 분리 대응을 하기로 결정했다. 사전 협의로 공감대를 이룬 김성수 후보자는 임명동의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반면 협의가 없었던 손봉기 후보자에 대한 임명동의안은 ‘절차적 완결성을 갖추지 못한 제청’이라며 국회에 제출하지 않고, 조 대법원장에게 대법관 후보자 재제청을 요청했다.

하지만 조 대법원장의 공식입장은 나오지 않았다. 이틀 뒤인 8월 30일 부친이 별세하며 상을 치러야 했기 때문이다. 부친상을 마치고 나흘 만에 출근한 조 대법원장은 “그동안 업무 관계로 전혀 논의한 바가 없어서, 들어가서 다시 한 번 이야기해보고 말씀드리겠다”고 말을 아꼈다. 이후에도 조 대법원장은 묵묵부답으로 일관했다.
법조계에선 9월 11일 열린 ‘대한민국 법원의 날’ 기념식에서 조 대법원장 입장이 나올 것이란 관측이 나왔다. 조 대법원장은 오는 16일부터는 나흘간 서울에서 열리는 아시아·태평양 대법원장 회의에 참석해, 자리를 비울 예정이기 때문.
하지만 조 대법원장은 기념사에서 재제청에 대한 직접적 언급은 피했다. 다만 조 대법원장은 “헌법상 독립된 국가기관인 법원이 다른 국가기관이나 정치권력, 사회 세력은 물론 소송 당사자로부터도 부당한 간섭이나 영향을 받지 않고 오직 헌법과 법률에 따라 중립적이고 공정하게 재판할 때, 국민의 자유와 권리를 온전히 보장하고 법치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고 말했다. 헌법이 정한 대법원장의 제청권 활용에 문제가 없었고, 다른 국가기관(청와대) 및 정치권력 등이 부당한 간섭을 해 법치주의를 흔들고 있다는 취지로 받아들여진다.
청와대와 민주당은 기존 후보추천위가 추천한 후보 가운데 한 명을 제재청해야 한다는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조 대법원장이 이런 인식을 갖고 있다면, 후보추천위부터 다시 꾸려 새로운 후보자를 추천 받는 방안을 발표할 가능성에 무게가 실린다. 그럴 경우 대법관 임명엔 시간이 더 걸리게 된다.

그동안 조 대법원장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 등으로 의견서만 내고 불출석하거나, 인사말만 하고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이번엔 민주당이 조 대법원장 불출석에 대해 법적 조치에 나설 수 있다는 관측이다. 민주당 지도부 한 관계자는 “조 대법원장 법원의 날 기념사는 사실상 싸우자는 것 아니냐”며 “법사위 증인 채택 등은 아직 정해진 바는 없다. 다시 추진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또 다른 민주당 관계자는 “그동안 국회가 대법원 국감을 진행할 때 대법원장이 인사말 후 이석하는 것을 허용한 것은 ‘사법부 존중’ 차원에서 관례였다”며 “조희대 대법원장 측이 ‘서면 제청’이 법적으로 무슨 문제가 있느냐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그럼 민주당도 ‘법대로’ 나갈 수밖에 없다. 조 대법원장이 증인 출석해 답변을 하게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여권에선 조희대 사법부와의 정면 충돌이 길어질 경우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최근 이재명 대통령 국정수행 지지율은 연일 하락 추세다. 한국갤럽이 지난 9월 8~10일 무선 전화면접 조사 방식으로 자체 실시한 여론조사를 보면 이 대통령 직무수행에 대한 긍정평가와 부정평가는 각각 38%와 51%를 기록했다. 긍정평가는 취임 후 최저치, 부정평가는 최고치로 오차범위 밖 데드크로스가 발생했다(여론조사 자세한 사항은 여론조사기관 또는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민주당이 추진한 보완수사권 전면 폐지 등 검찰개혁 문제가 지지율 부정평가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되는 가운데, 민주당이 사법개혁까지 전선을 넓힐 수 있겠느냐는 의문이다.

이어 “12·3 비상계엄 후 벌어진 일련의 상황을 보면서 대법원이 국가적 위기상황에서 국민들께 법원의 입장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거나 실패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며 “정치적 사건이 법원에 몰려들수록 정치의 문법에서 벗어나 법원의 언어와 문법으로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다.
조희대 대법원이 비상계엄 직후 위헌·위법성을 곧바로 밝히지 않은 것이 사법부에 대한 불신과 정치권의 압박을 키웠고, 이 대통령 재판 초고속 파기환송·대법관 공백 사태 방치 등으로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지적으로 풀이됐다.
이흥구 전 대법관은 문재인 정부에서 임명된 진보성향 판사로 분류된다. 지난 2025년 5월 이재명 당시 민주당 대선후보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 사건의 ‘초고속’ 유죄 취지 파기환송 결정에 반대한 2명의 대법관 중 1명이었다.
김민석 대표도 ‘서면 제청’ 논란 초기 “근본 문제는 사실 국회가 흥분할 일이 아니고 사법부가 흥분할 일”이라며 “대법원의 대법관들과 대한민국의 훌륭하신 대법원·사법부 전체 판사께서 지혜를 집단지성으로 모아서 (조희대 사태 관련해) 국민과 국회와 대통령이 걱정하지 않도록 해주셨으면 좋겠다”고 사법부 내부의 자정 움직임을 촉구했다.
다만 사법부 구성원들이 집단으로 조 대법원장에 반기를 들 수 있겠느냐는 회의적 시선이 높다. 민주당 소속 한 법조인은 “이흥구 전 대법관이 이제라도 조희대 대법원에 따끔한 충고를 한 것이 다행이다. 하지만 12·3 비상계엄 이후 대법원 내부 문제가 여럿 도출됐고, 바로 잡을 시도를 할 시간이 많았는데 너무 늦은 게 아닌가 아쉽다”고 했다. 이어 “대법관마저도 퇴임할 때서야 직언을 할 수 있는데, 일선 판사들이 대법원장에 어떻게 반대 목소리를 내겠나”라고 아쉬워했다.
민웅기 기자 minwg08@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