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형선고 피하려고 총수직도 내놨는데…
▲ 실형 선고를 피하기 위한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징역 4년을 선고받은 최태원 SK(주) 회장의 앞날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해 3월 첫 공판 당시의 최 회장.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최태원 SK(주) 회장이 징역 4년의 실형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검찰의 판단과 완전히 반대 결과가 나왔다. 구속됐던 동생은 무죄로 풀려나고 불구속 상태이던 형은 그 자리에서 구속됐다. 검찰 구형이 4년이었으니 집행유예 선고를 받을 수도 있다는 SK 측의 기대는 와르르 무너졌다. 검찰 구형 후 그룹의 지배구조를 개선하고 계열사의 독립경영을 강화하겠다며 그룹 회장직도 내놓은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틈날 때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강조해왔던 이미지는 ‘가식’이란 지탄을 받으며 갈가리 찢어졌다. 동생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나섰으나 법원은 최고책임자이자 최종 의사결정권자인 형에게 잘못을 추궁했다. 결백을 주장하며 항소의 뜻을 밝혔지만 최 회장의 앞날은 어둡기만 하다.
지난 1월 31일 끝까지 “모르는 일”이라고 항변한 최태원 SK(주) 회장이 법정구속됐다.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1부(부장판사 이원범)는 1심 선고공판에서 최 회장이 회사 돈 465억 원을 횡령한 혐의에 대해 검찰 구형과 같은 징역 4년을 선고했다. 반면 ‘모든 일은 내가 한 일’이라고 자백한 동생 최재원 수석부회장에게는 무죄를 선고했다. 최 부회장 진술에 신빙성이 없다고 본 재판부는 “유출 자금의 실질적 사용 주체는 최태원 회장”이라며 “모든 정황과 증거를 봤을 때 최태원 회장이 지시한 것으로 판단된다”고 결론 내렸다.
최 회장은 재판부 판결에 억울함을 호소하며 법정구속 직전까지 관련 혐의를 부인했다. 하지만 최 회장의 혐의 부인은 오히려 재판부를 자극했다. 재판부가 집행유예 없이 실형을 선고한 이유 중 하나가 “공동피고인들에게 책임을 전가하고 변명으로 일관하는 등 책임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결여된 점”이었기 때문이다.
지난 2010년 9월 주가조작 혐의로 글로웍스 사무실이 검찰의 압수수색을 받으면서 불거진 최태원 회장 사건은 2011년 4월 ‘최 회장이 선물투자로 수천억 원대의 손실을 봤다’는 사실이 공개되면서 급물살을 탔다. 박성훈 글로웍스 대표, SK그룹 계열사 상무 출신인 김준홍 전 베넥스인베스트먼트 대표가 구속되고 김 전 대표와 최태원 회장·최재원 부회장의 관계가 드러나면서 두 형제의 검찰 소환으로 이어졌다. 지난해 11월 22일 검찰은 최태원 회장에게 징역 4년, 최재원 부회장에게 징역 5년을 구형했다.
검찰 구형 이후 한상대 전 검찰총장의 개입설도 나돌았다. 사건을 수사한 검찰은 최 회장 형제의 죄질이 나쁘다고 결론, 구형량을 높이려 했으나 한 전 총장이 개입해 4년으로 낮췄다는 것. 구형이 4년이라면 1심에서 형량이 낮아져 집행유예로 풀려날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전 총장과 최 회장은 고려대 동문으로 오래 전부터 테니스를 함께 즐길 정도로 친한 사이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검찰의 ‘노력(?)’에도 최 회장이 법정구속되자 SK그룹은 그야말로 초상집이 됐다. SK그룹은 예상과 다른 판결이 나오자 즉각 항소의 뜻을 밝혔으나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SK그룹 관계자는 “의사결정구조 등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어 내부적으로는 큰 영향이 없겠지만 대외신인도 하락과 글로벌 사업 등의 타격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재계도 술렁이고 있다. 당초 집행유예를 선고받을 것으로 본 사람이 적지 않았던 재계는 최 회장이 법정구속되자 놀라워하고 있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법원이 최태원 회장을 법정구속한 것에 대해 유감으로 생각한다”고 밝혔다. 재계 관계자는 “사법부 판단을 존중하지만 정치적·사회적 판단은 중시하고 경제적 파장은 고려하지 않은 것 같아 아쉽다”고 말했다. 또 다른 재계 관계자는 “재벌이라고 해서 사법부가 특혜를 줘서도 곤란하지만 그룹 총수로서 불가피한 일을 한 것마저 엄벌에 처하는 것은 다시 생각해봐야 할 일”이라고 보탰다.
1심 결과 재판부가 최 회장에 대한 검찰 구형을 그대로 선고한 점과 최재원 부회장은 오히려 무죄로 선고한 점이 얘깃거리가 되고 있다. 일반적으로 법원은 검찰 구형보다 낮은 형을 선고해왔다. ‘최태원 회장 집행유예, 최재원 부회장 실형’을 예상한 사람이 적지 않았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러나 경제범죄 사건에 정통한 중견 법조인은 “기업과 재계에서 예상이 빗나갔다며 당혹스러워하는 까닭은 안이한 옛날 생각에 함몰돼 있기 때문”이라며 “법원이 이 사안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고 밝혔다.
시민단체는 오히려 아쉬움을 나타냈다. 경제개혁연대는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이라는 재벌총수에 대한 봐주기 판결 공식이 깨졌다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나, 대법원의 양형기준에 비추어 볼 때 최소형량을 선고했다는 점에서는 여전히 아쉬움이 남는다”는 입장을 전했다. 강정민 경제개혁연대 연구원은 “처음부터 구형 자체가 잘못됐다는 점, 한상대 전 검찰총장이 이 사건에 개입했다는 점 등이 증명된 셈”이라며 “구형보다 더 강하게 선고할 수 있었다”고 강조했다.
▲ 2011년 12월 최태원 회장이 서울중앙지검에 소환됐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강 연구원은 “최 회장이 자기 돈으로 피해를 보전했다는 것을 재판부가 감경 사유로 내세웠으나 가중 사유에 대해서는 철저히 적용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즉 재판부가 “2008년 광복절 특사로 사면복권된 지 3개월 만에 또 다시 범죄행위에 연루돼 죄질이 나쁘다”고 분명히 했음에도 형량을 높이지 않은 데 따른 아쉬움이다. 강 연구원은 “비록 사면은 받았지만 이번 범죄는 (2008년 징역 3년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던 때의 죄와) 동종범죄라 할 만해 가중 사유를 줘야 했다”고 지적했다.
1심 선고와 관련해 일부에서는 최태원 회장이 최시중 전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 천신일 세중나모 회장 등 특별사면 대상자들의 희생양이 됐다는 얘기도 흘러나온다. 이명박 대통령의 특별사면에 대해 거센 비판 여론이 일자 이를 무마시키기 위해 최태원 회장에게 실형을 선고하고 법정구속시켰다는 얘기다. 그러나 신빙성은 떨어진다. 오히려 대통령의 특별사면이 재판부의 심기를 건드렸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앞서의 법조인은 “법원이 구속시킨 사람을 대통령이 특별사면으로 풀어준 탓에 법원으로서는 농락당한 기분도 들었을지 모른다”고 말했다.
어쨌든 법정구속을 당할 때까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억울함을 호소한 최태원 회장은 허탈해할 것으로 보인다. 사건이 불거지고 난 후 최 회장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다할 것을 여러 번 약속한 데다 틈날 때마다 대외적으로도 이를 강조해왔다. 가까이는 지난 1월 25일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다보스포럼)에 참석, ‘사회적 기업 전도사’로 활약한 바 있다.
최 회장은 또 기업의 의사결정이 총수에 집중돼 있다는 이미지에서 탈피하기 위해 계열사의 독립경영을 강화하고 그룹 경영체제를 수직적 구조에서 수평적 구조로 바꾼 ‘따로 또 같이 3.0’ 체제를 수립했다. 그룹의 최고의사결정은 SK수펙스추구협의회가 하며 5개 위원회가 그룹 살림을 수평적으로 이끌겠다는 계획이었다. 이를 위해 최 회장은 그룹회장직과 총수 권한도 과감히 내려놓았다.
최 회장의 이 같은 행보를 일각에서는 ‘1심 재판용 아니냐’는 시선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기업과 총수 비리는 결국 의사결정의 정점에 있는 최고책임자의 결정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일반적인 생각을 떨쳐버리기 위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다. 쉽게 말해 ‘이 정도 노력하고 있으니 참작해달라’는 무언의 변론이었다는 것. 재계 한 고위 인사는 “의사결정구조를 개선하는 등 정부에 유화 제스처를 여러 차례 보냈음에도 결과가 바뀌지 않은 것이 최 회장이나 SK그룹으로서는 허탈할 것”이라고 말했다.
최 회장의 이러한 행보가 오히려 재판부에 밉보였을 수 있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강정민 연구원은 “‘따로 또 같이 3.0’이라는 것이 판을 새롭게 짠 것도 아니고 예전에 하던 것을 반복한 것에 불과하다”며 “국민정서와 사회 분위기가 변화했는데 기업만 변하지 않고 빤한 수를 둔다면 더는 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못 박았다.
재계 일각에서는 최악의 경우 최태원 회장이 4년 내내 감옥생활을 할지도 모른다는 우려도 제기되고 있다. 경제민주화 바람이 워낙 거센 데다 새 정부가 들어서는 시점이다. 박근혜 대통령 당선인도 경제민주화에 나름대로 신념을 갖고 있다. 또 박 당선인이 대통령의 특별사면을 강도 높게 비판한 데다 대통령 사면권을 제한하겠다고 약속한 터라 최 회장이 쉽게 나오지 못할 것으로 예상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강정민 연구원은 “최 회장이 무죄를 입증하기 전까지 형량이 낮아질 가능성은 적어 보인다”며 “재판부가 검찰 구형을 그대로 선고하고 징역 5년을 구형한 최재원 부회장은 무죄로 풀어준 것은 검찰에도 미숙한 점이 있다는 점을 지적한 셈이어서 자존심 상한 검찰도 본격적으로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따라서 앞으로 최 회장에게 유리하게 작용할 여지가 적다는 것이다. 앞서의 중견 법조인도 “경제민주화 바람이 강하다”며 “최태원 회장 측이 1심과 같은 전략으로 접근하면 어렵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그러나 양형 변화 가능성을 조심스레 점치는 쪽도 있다. 판사 출신의 한 중견 변호사는 “1심 재판장들이 갖는 마음의 부담과 항소심 재판장들이 갖는 부담은 다르다. 승진 앞둔 판사들하고 또 다르고…”라며 “이번 양형 선택이 어쩔 수 없다 실형 하자, 해서 조건을 붙인 것이지 냉정하게 저울에 달아서 나온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최태원 회장 법정구속으로 SK그룹은 당장 글로벌 사업 전략의 차질이 불가피해졌다. 비록 그룹 회장직에서는 물러났다고는 하나 최 회장은 ‘전략적 대주주’를 자청하며 SK그룹의 중국사업 등 글로벌 사업 전략을 수립하고 추진해나가는 데 매진할 것을 다짐한 바 있다. SK그룹 관계자는 “수평적 구조와 조직을 정비하고는 있지만 그래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고 밝혔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