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에겐 대신 돌을 맞을 신하가 없었다
이명박 대통령이 대국민담화문을 통해 ‘미국산 소고기 파문’에 대해 유감을 표명하는 모습. 임준선 기자
노무현 정부였던 2007년,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협상이 타결되면서 미국산 쇠고기가 국내에 들어오게 됐다. 그러다 그해 미국산 쇠고기 검역과정에서 수입이 금지된 등뼈가 발견됐고, 시중에서 판매되던 미국산에서도 뼛조각이 발견되면서 미국산 쇠고기 수입이 전면 중단됐다.
2008년 이명박 정부가 들어섰고, 그해 4월 한미 간 쇠고기 2차 협상이 개시됐다. 방미 중이던 이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이 초대한 캠프 데이비드에서 한미정상회담을 했는데, 한미 FTA 비준안 처리를 위한 공동노력을 위해 한국은 별도의 쇠고기 협상에서 쇠고기 수입 전면 허용이라는 전격 양보안을 꺼내든다. 이명박의 외교 첫걸음은 그렇게 ‘굴욕외교’라는 주홍글씨를 새기며 출발하게 된다.
광우병 규탄 촛불집회의 서막은 그렇게 올랐다. 4월 29일, 문화방송 PD수첩 팀이 ‘긴급취재,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를 방영했다. 5월 13일 재차 ‘미국산 쇠고기, 과연 광우병에서 안전한가 2’의 전파를 쏘았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촛불이 들불처럼 이미 피어올랐을 때였다.
최근 만난 청와대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사실, 촛불집회가 없었다면…이명박 정부는 더 엉망이었을 것이다.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오만방자해질 수 있는 점령군(인수위를 빗댐)에서 따끔한 자극이 된 계기였다고 본다. 행정을 잘못하면 이렇게 비폭력 시위가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교훈을 줬다.”
이 인사는 할 말이 많은 듯 말을 이어나갔다.
“무엇보다, 청와대 민정 분야가 기능을 못 했다. 아무도 국민의 목소리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민심을 수렴하고 오라는 지시가 내려오면 돌에 맞을까 먼발치에 서서, 서성이다 돌아갔다. 만약 누군가 시민들의 앞에 서서 요구 사항을 들었더라면, 요구 사항을 듣다 혹 돌에라도 맞았더라면 상황이 바뀌었을지 또 누가 알겠느냐. 그런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이명박 정부의 임기 첫해에 벌어진 광우병 촛불집회는 예전의 시위나 집회와는 그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선동자가 없었고, 그래서 중심이 없었다. 그렇다고 배후세력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경찰이 종로를 막으면 을지로로, 을지로를 막으면 퇴계로로, 시청에서 광화문으로 오가며 전경과 맞서지 않으려 했다. 오히려 집회를 막느라 피로해진 전경들이 독기를 품었지만, 몰려나온 시민들은 웃고 즐겼다. ‘자발적’이라는 수식어가 거의 매일 언론 보도에 오르내렸다.
집회에 참여한 인물군도 다양했다. 교복을 입고 등장한 중고생들, 한국말이 서툰 해외 유학생들과 현지 교민들, 군복을 입고 나온 예비군들, 종교인, 아기를 유모차에 태우고 나온 유모차 부대, 패션이나 육아 등 비정치적 동호회 회원 등이 삼삼오오 운집했다. 전국 170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오로지 광우병을 막자며 ‘광우병 국민대책회의’를 발족했다. 인터넷에서는 ‘아고라 대학생 연합’이 새로 생겨났다. 대안 운동으로 ‘온라인 한우 직거래망’이 구축됐다. 깃발과 돌과 화염병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폭력에는 공권력을 투입해 진압할 수 있었지만, ‘조금 달라진’ 촛불집회에 정부도 적잖이 당황한 듯했다. 그해 6월, 추부길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은 한 종교행사에 참석해 촛불 집회를 언급하면서 “사탄의 무리들이 이 땅에서 판을 치지 못하도록 기도해 달라”고 말한 것이 드러나 파문에 휩싸였다. 추 비서관은 “그런 표현은 기도나 연설 끝 부분에 통상적으로 쓰는 관행적 용어일 뿐, 특별한 집단을 지칭한 것은 아니”라고 해명했지만, 이명박 정부의 ‘본심’으로 여겨지면서 ‘내상’을 크게 입었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이 대통령의 친형인 이상득 한나라당 의원도 당시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열린 경제5단체 주최 행사장에서 “실직하고 일자리가 없어 길거리를 헤매는 젊은이들과 서민, 어려운 중소기업 경영자들이 (촛불문화제에) 참가한 것 같다”고 해 논란이 크게 번졌다.
사실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는 새로운 흐름도 만들어냈다. 가장 컸던 것이 바로 무관심 영역이었던 정치가 관심 영역으로 옮겨 왔다는 것이다. 광우병 발생 우려가 있는 30개월 이상 된 미국산 쇠고기를, 특정 위험물질까지 포함해 제한 없이 수입하겠다는 정부의 발표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시작한 것이 생활 이슈 전반에 대한 관심으로 점차 이어지고, 집회를 문화제로 만들어버렸다는 것이다. 시민들은 정당의 역할과 능력에 대해 의심하기 시작했고, 대의제에 대한 의구심도 나타냈다.
이후 이 대통령의 학교 자율화 추진 계획, 한반도 대운하, 의료보험 및 공기업 민영화, 재벌규제 완화, 한미 FTA, 각종 청문회는 촛불로 깨어난 시민들의 큰 관심사가 되면서 사사건건 발목이 잡히게 된다.
또 정치를 조롱하는 소셜네트워크가 뜨게 됐다. 제도 언론을 믿지 못하는 시민들 사이에서 ‘스스로 기자’가 된 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들은 ‘프레스’가 찍힌 완장을 차고 신문과 방송에서 보도하지 않던 ‘현장 그대로’를 자신의 SNS와 블로그에 실어 날랐다. 전경들과 마찰이 있을 때마다 사진을 찍어 남기면서 힘을 얻었다. 기자 행세를 하던 경찰 프락치를 솎아냈다. 보수언론과의 인터뷰는 꺼리면서 ‘언론도 별것 아니다’라는 의식을 만들어내게 된다.
집회는 무겁지 않았다. 전경버스를 뒤집으려 하면 뒤에 있던 시민들은 “비폭력!”을 외쳤다. 도로에서 행진하면 차량 운행을 방해한다며 인도만 걷는 준법투쟁이 늘어났다. 연인의 데이트코스이기도 했다. 경찰이 물대포를 쏘면 “세탁비를 돌려 달라”고 웃었다. 젖은 옷을 말려야 한다며 모닥불을 피워 그 주위에 빙 둘러앉았다. 보수언론에 광고를 낸 기업들에 대해 광고 철회 운동이 펼쳐지기도 했다.
무엇보다 제도권 언론이 격렬하게 담론투쟁을 벌이면서 좌우의 대리전쟁이 시작됐다. 촛불집회 보도에 대한 매체의 편향성이 극심했다. 물러설 곳이 없었던 언론은 정치를 좌우하고 심지어 유도하는 ‘언론 정치’를 펼치기 시작했다. 공론장으로서의 언론은 신뢰를 잃었다.
이 대통령은 세 차례 고개를 숙였다. 역대 최다 표차(530만 표)로 당선된 그로서는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었다. “청와대 뒷산에서 끝없이 이어진 촛불을 바라보며 저 자신을 자책했다” “국민이 원하지 않으면 30개월 이상 된 쇠고기를 수입하지 않겠다”.
결국 농림수산식품부 정운천 장관이 30개월 이상 쇠고기에 대해 미국에 수출 중단을 요청했다고 밝히기까지 꽤 긴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국민적 신뢰 회복은 쉽지 않았다.
당시 이 대통령은 ‘실기’를 처음으로 경험했다. 수습할 수 있는 때, 사과할 수 있는 때를 놓쳤다. 전문가들의 진단은 이랬다. 문제에 대한 책임을 분명히 밝히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해야 했지만 “송구스럽다”라고만 한 점, 쇠고기 문제가 불거진 초기에 적절히 대응하지 않다가 집회 분위기가 느슨해지지 않자 여론에 밀려 움직여 불신을 키웠다, 특히 “내가 책임을 진다”고 해 결국 그 누구도 책임을 지지 않는 무책임한 행정을 펼쳤다. 국민으로선 정부가 미국과의 신뢰는 강조하면서 국민과의 신뢰는 무시한다는 기분이 들었고, 이명박은 국민을 섬기는 대통령이 아니라 국민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이라는 인식이 퍼져버렸다.
6월 4일, 전국 52곳에서 치러진 재·보궐선거에서 한나라당은 참패했다. 서울 강동구청장, 인천 서구청장, 경기 포천시장 등 수도권 기초단체장 3곳을 모두 잃었고, 42곳에 후보를 냈지만 9곳에서만 승리했다.
6월 10일. 한승수 국무총리는 이 대통령에게 쇠고기 파문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자신을 포함한 내각 일괄 사의를 표명했다. 류우익 대통령실장과 청와대 수석들의 일괄 사의 표명에 이은 것으로 이 대통령으로선 손발이 다 떨어져 나가는 것과 같은 꼴이 됐다.
“공직자는 머슴이다”라는 말로 건설 CEO로서의 실용주의 노선을 내세운 이 대통령은 “의식 속의 전봇대를 뽑자”면서 집권 한 달까지 아주 기세등등했다. 하지만 그런 그의 지지율은 촛불 정국을 거치면서 20%대 지지율로 떨어진다. 치욕적이었다.
이 대통령은 촛불 정국 이후 대중주의적인 통치노선을 내려놓기 시작한다. 우호 세력을 가까운 거리에 두기 시작했다. ‘3친’(親) 즉, 친재벌. 친보수, 친부유층 정책은 그때부터 강화됐다는 지적이 있다. 공기업과 정부 관계기관, 정부투자기관 등에는 자신과 맞는 ‘코드 인사’로 채우면서 국민과 직접 대면하지 않고 ‘완충지대’를 마련하기 시작한다. 원세훈 행정안전부 장관을 국정원장으로, 박영준 전 기획조정비서관을 다시 국무차장으로 재 발탁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읽혔다.
불법시위는 법과 원칙에 따라 엄정 처리한다는 ‘공안정국’도 그때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이명박이 당시 촛불정국에서 드러난 민심을 그대로 수용해 ‘친국민’적이 되었다면, 퇴임을 맞는 요즘 더 많은 국민들의 사랑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최기서 언론인
잠깐 - 물로 흥하고 불로 망해 서울시장 시절엔 청계천 복원으로 인기를 얻었고, 대선정국에선 (논란은 있었지만)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내놓아 얻은 점수도 있다. 그러나 남대문이 불탔고, 용산 참사, 화왕산 산불 등이 일어나면서 그의 마음도 새까맣게 타들어 갔다. 그는 ‘광우병 촛불집회’도 ‘물대포’로 응수하며 공분을 사기도 했다. 이명박 표 물이 국민들의 불에 꺼진 꼴이 됐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