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나가는 그들에겐 색다른 DNA가 있다
‘들어갈 땐 최고가 아니라도 나올 땐 최고가 된다.’ 삼성그룹 직원들 얘기다. 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부터 내려 온 ‘인재제일’ 경영철학의 영향으로 삼성은 그룹 규모뿐 아니라 막강한 인재풀로서도 국내 여타 기업들의 추종을 불허한다. 글로벌 기업 삼성에서 갈고 닦은 폭 넓은 경험과 시스템 인프라 덕분에 퇴직 후에도 다른 기업들에서 러브콜을 받기 일쑤다.
타고난 인재가 아니더라도 삼성을 거치면서 최고의 인재로 거듭난다는 얘기다. 늘 그래왔지만 최근 ‘삼성 임원 출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른다. 1주일 새 동부, 농심, 한국수력원자력 등 국내 대기업과 공기업들이 저마다의 혁신을 위해 영입한 외부 인사는 삼성 임원 출신들이었다.
지난 15일 동부그룹은 서울 대치동 동부금융센터에서 채권단과 ‘대우일렉트로닉스 매각 및 인수종결’ 행사를 개최하며 대우일렉 인수에 마침표를 찍었다. 이 행사에서 동부는 대우일렉을 오는 2020년 세계 10위의 종합전자회사로 만들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면서 이재형 동부라이텍 및 동부LED 부회장을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선임했다. 또 최고운영책임자(COO)로는 이성 전 대우일렉 사장을, 최고재무책임자(CFO) 부사장으로는 이재국 전 CJ GLS 대표이사를 영입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최고경영자(CEO)인 이 부회장과 CFO인 이 부사장이 모두 삼성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재형 부회장은 삼성그룹 회장비서실, 삼성물산 구주총괄, 정보통신부문장, 미주총괄을 거치며 삼성그룹의 전자·정보통신사업 분야에서 30년 이상 경력을 쌓았다. 이재국 부사장은 삼성전자에서 지원그룹장, 북미경영지원팀 상무, 생활가전사업부 경영지원 총괄 전무 등을 거친 후 생활가전전문업체인 리홈과 종합물류회사인 CJ GLS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오랜 채권단 생활을 마치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대우일렉을 위해 동부가 꺼내 든 인사 카드는 ‘삼성 임원 출신’인 것이다. 동부의 ‘삼성맨’ 중용은 업계에서는 유명하다. 동부그룹에 따르면 전체 임원 300여 명 중 27~28%는 삼성 출신일 정도로 김준기 회장의 ‘삼성 사랑’은 남다르다.
식품 대기업 농심도 잇따른 위기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전직 삼성 임원 기용이라는 깜짝 카드를 꺼냈다. 농심은 지난 15일 사장 직속 전략기획실을 신설하고 초대 실장에 삼성전자 경영전략 상무와 삼성코닝정밀소재 전무를 역임한 김경조 부사장을 영입했다. 공채 출신이 아니고서는 좀체 임원이 되기 어려운 농심의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경영 스타일을 고려할 때 이례적인 일이다. 미래 신성장 동력을 발굴하고 대내외적 경영 불확실성에 대한 대처 능력을 키우기 위한 농심의 자구책이라는 게 업계의 분석이다.
이러한 김 부사장이 올 초 ‘도전’을 경영지침으로 내세운 신춘호 농심 회장의 뜻에 부합할 수 있을지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농심은 지난 2008년 삼성전관(현 삼성SDI) 대표이사 사장과 삼성종합기술원장을 지낸 손욱 회장을 영입해 변화를 꾀한 바 있다. 하지만 손 회장은 적극적인 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오너인 신 회장과의 이견 등으로 2년 만에 회장 자리를 내놓고 말았다.
지난해 11월 ‘위조 부품’ 사태 등으로 큰 홍역을 치른 한국수력원자력도 삼성 출신 임원을 수혈하며 대대적인 쇄신에 나섰다. 한국수력원자력은 18일 인사를 통해 본사 처장급 고위직인 구매사업단장과 품질보증실장에 삼성물산에서 임원을 역임한 김홍묵 전 상무와 박병근 전 전무를 영입했다. 그동안 폐쇄적이라고 지적받아 온 조직 문화의 쇄신을 꾀하기 위한 외부 전문가 수혈이었다는 게 한국수력원자력 측 설명이다.
이처럼 ‘삼성맨’들이 업종을 불문하고 국내 굴지의 대기업들에서 융숭한 대접을 받고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삼성그룹에선 매년 150명 정도의 임원들이 옷을 벗는다고 한다. 전체 임원 1899명 중 약 7.9% 임원들이 매년 갈리는 것을 의미한다. 2008년 리먼브러더스 사태로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엔 300여 명의 임원이 삼성을 나왔다. 삼성 이외의 기업 입장에선 매년 150명의 검증된 고급 인력들이 시장에 공급되는 셈이다. 이 중 20~30명 정도가 러브콜을 받고 다른 대기업으로 이직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을 요구한 삼성 임원 출신 인사에 따르면 삼성 임원 출신의 가장 큰 경쟁력은 오너에 대한 충성심 즉 ‘로열티(Loyalty)’다. 이 인사는 “오너가 있는 그룹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바로 ‘충성심’”이라며 “삼성 임원들은 삼성이라는 큰 조직에서 성공하기 위해서 ‘충성 DNA’를 자연스레 체득하게 된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또한 체계적인 조직 인프라와 시스템 속에서 다양하고 폭넓은 경험을 쌓으면서 배양된 업무 능력과 미래를 보는 시각 등이 ‘삼성맨’의 차별화 포인트라는 게 이 인사의 설명이다.
하지만 삼성 출신 임원들이 다른 기업들에서도 모두 승승장구하는 것은 아니다. 새로운 조직에 적응하지 못하고 단기간에 퇴사하는 경우도 허다하다. 재계 관계자는 “과거부터 동부는 삼성 출신 인사 영입에 적극 나서며 그들을 중용하곤 했다”며 “하지만 조직 문화 괴리 등으로 인해 동부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태되는 경우도 여럿 봤다”고 말했다.
삼성 계열사에서 상무를 지내고 대형 건설사에 재입사한 지 3개월 만에 자진 퇴사한 한 인사는 “삼성의 경영이 벤츠로 굴러 간다면, 재입사한 건설사는 한낱 마차에 불과했다”고 털어놨다.
이연호 기자 dew9012@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