액션신 데미지 ‘겉은 대리석 속은 유리’
이소룡은 갑옷을 입은 듯 단단한 몸을 자랑했지만 속으론 점점 골병이 들어 갔다.
그는 평생 ‘몸’을 단련한 사람이었다. 단 1그램의 군살도 없는 듯 마른 체형이었지만 힘을 주면 툭툭 튀어나오는 근육은, 만져 본 사람들이 “따뜻한 대리석 같다”고 말할 정도로 탄탄했다. 그는 스턴트는 물론 카메라 앞에서 트릭을 사용하는 것 자체를 허용하지 않았다. ‘절권도’의 창시자인 그는 배우 이전에 무술인이었으며, 중국 무예의 전통 속에 있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그 강한 남자도 쇼 비즈니스 세계의 압박을 견디긴 쉽지 않았다. 성공을 위해 달려왔던 그의 삶은 점점 쫓기기 시작했고, 특유의 완벽주의는 더욱 그를 옥죄었다. 그러면서 그의 육체는 점점 안으로 붕괴되었다. 마치 갑옷을 입은 듯 단단한 외면에 비해 이소룡은 말 그대로 ‘골병’이 들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영화적 파트너였던 골든하베스트의 레이먼드 초우 사장에 의하면 이소룡은 액션 신 촬영 중에 상대방으로부터 시나리오에도 없었던 일격을 종종 받았다고 한다. 액션 장면을 찍다 보면 이런 일은 종종 발생하지만, 몇몇 충격은 그에게 분명히 큰 데미지를 입혔다.
이소룡이 자신의 몸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알게 된 건 <맹룡과강>(1972)을 찍을 즈음이었다. 촬영 중에 이소룡은 자주 고통을 호소했고 머리를 싸안고 뒹굴 때도 있었다. 진통제를 상습적으로 복용했으며 마리화나도 접했다. 스태프들과 마찰을 일으키기 일쑤였고 화를 내다가 혼절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 시기 대만 배우인 베티 팅 페이와의 부적절한 관계는 점점 깊어졌다.
<용쟁호투>(1973) 때 그는 촬영을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신경안정제와 스테로이드의 도움을 받아야 했고, 너무나 쉽게 지쳤다. (한편 이런 설도 있다. 사실 그는 1972년 말에 정밀 검사를 받았을 때 삶이 몇 달밖에 안 남은 절망적인 상태였다고 한다. 하지만 의사는 그 사실을 숨겼고, 이소룡에겐 과거 거칠던 시절 누군가에게 맞은 상처가 뇌에 손상을 준 것으로 같으며, 너무 무리한 촬영 스케줄로 인해 그 상처가 악화된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고 한다)
이소룡의 미완성 유작 <사망유희>.
급히 홍콩의 뱁티스트 병원으로 옮겨졌고 그를 진찰한 닥터 찰스 랭포드는 당시의 이소룡을 “열이 40℃가 넘었고, 어떤 자극에도 반응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랭포드는 급하게 신경외과의 닥터 피터 우를 불렀고, 그는 간혹 눈은 떴지만 초점은 없었으며 죽어가는 사람처럼 거칠게 호흡했고 땀으로 범벅된 상태의 이소룡을 발견했다.
탈진, 신장 장애, 간질 등에 대한 다양한 검사가 이뤄졌다. 원인은 뇌부종. 뇌수가 팽창한 것이 발견되었다. 이소룡은 다시 무의식 상태에 빠졌고 의사들은 뇌부종을 완화시키기 위해 탈수제인 마니톨을 주입했다. 소변이 늘어나자 관을 꽂아 빼냈다. 거의 혼수 상태였던 이소룡은 거의 발작에 가까울 정도로 몸을 심하게 떨었고, 의사와 간호사들은 간신히 팔과 다리를 병상에 묶어 놓았다. 그는 거의 가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회복 후 기적적으로 다시 일어났고, 며칠 후엔 여행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됐다.
이소룡은 아내인 린다 에머리와 함께 캘리포니아대학 병원에서 정밀검사를 했다. 역시 1차 원인은 뇌부종이었고, 경련의 원인은 알 수 없었다. 간질 치료제인 다일랜틴을 처방받았다. 하지만 이소룡은 점점 몸이 안 좋아졌고 그는 불안감에 휩싸이기 시작했다. 이후 <사망유희> 촬영을 위해 홍콩으로 돌아온 이소룡은 자신이 죽었다는 루머가 돌고 있는 걸 알게 됐다. 무술 대회에서 대련 중에 사망했다는 식이었다. 사실 홍콩 언론들은 잡지와 신문을 팔아먹기 위해 그의 죽음에 대한 수많은 루머를 만들어내곤 했고, 그때마다 이소룡은 해명해야 했다. 그런데 이번엔 단지 소문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정말 그는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건망증은 점점 심해졌다.
1973년 7월 20일 그는 <사망유희>에서 공연할 조지 라젠비(2대 제임스 본드로 유명한 배우)를 맞이하기 위해 레이먼드 초우와 함께 공항으로 나갈 예정이었다. 하지만 라젠비는 초우 사장 혼자서 만나야 했다. 몸이 좋지 않았던 이소룡은 약을 먹은 후 잠이 들었던 것. 하지만 그는 그 잠에서 깨어나지 못했다.
김형석 영화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