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색 내며 실속 챙기기 딱
한진그룹 조양호 회장이 지주회사 전환을 서두르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현재 한진그룹의 지배구조는 ‘정석기업→한진→대한항공→정석기업’으로 이어지고 있다. ‘가족회사’라 할 수 있는 정석기업이 지주사 역할을 하면서 순환출자구조를 띠고 있는 것. 이 같은 지배구조를 해소하고 사업의 집중성을 높이기 위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한다는 것이 한진그룹 측 입장이다.
한진그룹의 결정에 대한 증권가 반응은 엇갈린다. 장기적으로 봤을 때는 긍정적이지만 당장 코앞의 일이 우려스럽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증권가 전망을 간추려보면 지배구조의 투명성, 핵심사업 집중 등 기업의 질적 개선에는 도움이 될지 모르나 당장 대한항공의 부채비율이 771%에서 908%로 높아지고 진에어 같은 고성장 회사가 지주회사에 편입된다는 점 등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또한 지배구조 변화에 따른 계열사 간 지분 거래가 불가피하기 때문에 많은 비용이 드는 것도 문제점으로 꼽힌다. 박은경 삼성증권 연구원은 “이 과정에서 회사의 주가부양 의지가 약해지거나 대규모 비용이 필요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길게 봤을 때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이 긍정적인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그런데 서두르고 있다는 인상이 짙다. 지난해 10월 한진관광을 대한항공에 흡수·합병시키면서 지주회사 체제를 예고하긴 했지만 지난 3월 22일 이사회에서 결정하고 불과 넉 달여 만에 지주회사라는 새로운 체제로 출발하겠다는 것은 아무래도 급해 보이는 것이다.
주채권은행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은 상태에서 지주회사 체제 전환에 필요한 대규모 자금을 어떻게 조달할지도 관건이다. 한진그룹의 자금 문제는 지난해 말 한국항공우주산업(KAI) 인수전이 펼쳐질 때도 지적된 부분이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지난해부터 준비해온 것이며 지분관계 정리는 지주회사 출범 후 2년 내에 하면 되므로 자금 사정에도 문제가 없다”고 답변했다.
재계에서는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이 새로 설립하는 한진칼홀딩스를 지배하기보다 정석기업과 (주)한진을 합병하고 조 회장이 합병회사를 통해 그룹을 지배할 것이라는 얘기에 무게가 실리고 있다. 이럴 경우 비용도 5000억 원 더 적게 든다는 것. 한진그룹 측은 “구체적인 방안은 추후 알릴 것”이라며 즉답을 피했다.
일각에서는 대한항공이 박근혜 정부의 경제정책에 발 빠르게 대응하고 오너 일가가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계열사들의 일감 몰아주기 증여세를 피하기 위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기된다. 한진그룹의 비상장 계열사 중 정석기업과 토파스여행정보는 지배구조의 핵심이자 알짜로 꼽힌다. 사실상 조양호 회장 일가가 지배하고 있는 이 두 기업은 해마다 적지 않은 이익과 배당성향을 보이며 조 회장 일가의 짭짤한 수입원이 되고 있다.
조양호 회장이 27.21%를 보유하고 있는 것을 비롯해 조 회장의 친인척과 관계회사가 100% 지분을 보유하고 있는 정석기업은 당기순이익이 2010년 76억 원에서 2011년 91억 원으로 늘었다. 2011년 배당금은 9억 9503만 원이 지급됐다.
토파스여행정보는 대한항공(67.35%), 유니컨버스투자(27%), 조양호 회장(0.65%) 등이 지분을 나눠 갖고 있다. 이 가운데 유니컨버스투자는 한진그룹 계열사인 유니컨버스의 자회사다. 유니컨버스의 최대주주이자 대표이사는 조원태 대한항공 부사장. 토파스여행정보의 2011년 당기순이익은 114억 원이다. 놀라운 것은 현금배당을 2010년 80억 원에서 2011년에는 무려 264억 원으로 확 늘렸다. 순이익보다 배당이 월등히 많았던 셈이다.
두 기업은 ‘일감 몰아주기’로 성장한 대표적인 기업으로, 일감 몰아주기 과세 대상으로 분류되고 있다. 그런데 지주회사의 자회사로 편입되면 증여세 과세 대상에서 제외된다는 것. 재계 관계자는 “정석기업 등을 바라보는 부정적인 시선을 피하면서 기업 이미지를 개선하는 데도 지주회사 체제 전환이 도움이 될 것으로 본 듯하다”고 말했다.
후계 승계 과정에서 지주회사 체제가 도움이 될 것이라고 내다보는 사람도 적지 않다. 지주회사의 주가가 비중 있는 계열사 주가보다 낮기 때문에 후계 승계 비용이 조금이라도 덜 든다는 것. 한진그룹 관계자는 “지주회사 전환과 후계 승계 문제는 전혀 관련 없다”고 반박했다.
한편 한진그룹의 지주회사 체제 전환 결정을 계기로 한진해운 분리설이 또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더욱이 한진해운은 이미 지주회사 체제를 갖추고 있는 상태여서 한진그룹 차원에서 지주회사를 출범한다면 한 그룹 내에 두 개의 지주회사가 있는 상황이 벌어진다.
최은영 한진해운 회장은 이미 지난 2010년 지주회사 체제 전환 뒤 시아주버니인 조양호 회장을 향해 암묵적으로 계열분리를 요구해왔다. 계열분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조 회장은 “아직 때가 아니다”라는 말로 분리의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한진그룹이 지주회사 체제로 전환할 경우 한진해운 분리 문제가 불거질 수밖에 없다.
최은영 회장은 계열분리를 위한 지분 정리를 모두 마친 상태다. 조양호 회장이 한진해운홀딩스의 지분을 3% 미만으로 낮추면 된다. 하지만 조 회장은 여전히 한진해운홀딩스 지분을 대한항공(16.71%), 한국항공(10.70%)을 통해 보유하면서 한진해운을 거느리고 있다.
지난해 KA 인수전 때 조 회장이 한진해운 지분을 팔아 자금을 마련할 것이라는 관측도 나왔지만 당시에도 한진그룹 측은 “한진해운 지분을 매각하지 않아도 충분하다”며 분리할 뜻이 없음을 못 박았다. 한진그룹 관계자는 “한진해운 분리는 자연스럽게 되지 않겠느냐”며 “다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임형도 기자 hdlim@ilyo.co.kr